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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법률이야기

중국고대의 변호사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유전(劉典)

 

변호사는 고수입의 대명사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괜찮은 명성과 지위를 누린다. 그러나, 중국고대에 변호사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나가는 쥐새끼를 보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마다 두들겨 팼고, 설사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로부터도 멸시당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왜 일을 해주고서도 욕을 먹은 것일까? 사회적 지위는 왜 그렇게 낮았던 것일까?

 

변호사는 중국고대에 송사(訟師)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송사는 소송하는 사람을 위하여 아이디어를 내고, 소송서류를 작성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현재 변호사의 일부 직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고대에 소송 자체는 성인이 보기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송을 하는 것은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다. 반드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이 말은 나중에 유가의 소송문제에 대한 기조가 된다. 후대의 유생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관청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대사중 하나가 "식송(息訟)"(소송을 없애는 것)이라고 하였다. 송사는 민간에서 소송하려는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므로 자연히 각급 관리들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가정신으로 제정된 고대법률에서도 송사의 지위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송사의 중국고대 사회의 지위는 아주 낮았다. 고대의 소송에서 대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신분있는 관리, 사대부, 부녀는 가족이 소송을 대신할 수는 있었다. 소송쌍방당사자는 반드시 친히 법정에 출석해야한다. 그리고 '소송을 교사'해서도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소송하라고 가르쳐주어서도 안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소장을 작성해주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정황을 가감하거나 소송청구를 바꾸거나 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어떤 송사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여 출정하기도 한다. 만일 들키면, 곤장을 밪는다. 다른 사람의 소송을 도와주는 송사,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법정에 출석하는 송곤(訟棍)을 직업으로 삼으면, 모두 충군(充軍, 입대시켜 변방이 군대로 보내는 형벌)의 벌을 받는다. 소송을 가르치는 서적을 출판하여 판매하는 것도 3년의 유기징역을 받는다.

 

송사의 행위는 고대 유생들이 숭상하는 유가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근대이전의 문학작품에서의 송사이미지도 추악하기 그지없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청나라초기 방여호(方汝浩)가 쓴 <선진일사(禪眞逸史)> 제24회 "복위계탈승금자, 현사교사상피근>이라는 대목에서 송사인 관현사에 대하여 이 책에서 묘사한 내용은 이렇다: "창도불견철(槍刀不見鐵), 살인불견혈(殺人不見血), 봉타불견동(棒打不見疼), 상한불발열(傷寒不發熱), 독구불견사(毒口不見蛇), 칩미불견갈(蟄尾不見蝎), 고통불문성(苦痛不聞聲), 분리분견별(分離不見別). 세상약무차등인(世上若無此等人), 관부아문불용설(官府衙門不用設)". 세상에 이런 자들이 없다면 관청을 두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악독한 인물이라면 세상의 원죄는 모두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전해져 내려오는 송사의 이미지는 아주 엉망이지만, 일부 송사들은 확실히 제대로 일을 하였다.

 

증육여(曾六如)의 필기 <소두붕(小豆棚)> 권8에는 호주(湖州)의 여송사(女訟師) "흘탑노낭(疙瘩老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과부이고, 원근에 유명한 도필송사(刀筆訟師)이며, 그녀의 글을 아주 날카로웠다.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사건이 그녀가 붓을 들어 글을 써주기만 하면 시원스럽게 해결되곤 했다. 그녀는 이런 재주로 큰 돈을 번다.

 

호주의 한 부잣집에 젊은 며느리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 개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허락하지않고 그녀에게 수절하기를 요구했다. 그 며느리는 흘탑노낭에게 부탁한다. 흘탑노낭은 글자 1자에 백냥을 달라고 하고는 모두 합쳐서 1600냥을 요구한다. 그리고 16글자의 소장을 작성해준다. 소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씨년십구(氏年十九), 부사무자(夫死無子), 옹장이환(翁壯而鰥), 숙대미취(叔大未娶)"

며느리의 나이는 19인데, 남편은 죽고 자식은 없다.

시아버지는 아직 한창나이인데 홀아비이고, 시동생은 어른이 되었지만 장가가질 못했다.

 

중국고대에, 여자의 가족내에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결정적요소는 바로 낳아서기르는 아들이 몇이냐는 것이다. 속담에 "양아방로(養兒防老)"(자식을 키워서 늙을 때를 대비한다)라는 말이 있다. 아들이 있으면 비록 과부로 살아도 이후의 생활이나 집안에서의 지위가 모두 보장된다. 아들이 없는 여자가 수절을 하면, 가정요소이건 경제요소이건 모두 미래의 생활에 보장이 없다. 동시에 집안에 가까운 두 남자가 모두 홀로 살면 당시의 법률에 따라,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사통하면 사형을 받을 죄이고, 시도생과 형수가 사통을 해도 역시 사형을 받을 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대의 정치이념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일단 이런 난륜사건이 벌어지면, 지방관리의 업적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장이 올라가자, 현관은 즉시 며느리의 개가를 허락한다.

 

또 한번은 강북지방이 매년 흉년이 들어서, 쌀장수들이 속속 강남으로 건너와서 양식을 구매해갔다. 강남사람들은 쌀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쌀을 지역바깥으로 반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소송이 벌어진다. 쌀장수는 흘탑노낭을 찾아와서 도움을 구한다. 흘탑노낭은 3천냥을 받고는 소장을 작성해서 준다. 다음날 현아문은 명령을 내려 쌀의 반출을 막지말도록 한다. 그 소장은 아주 날카롭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열국분쟁(列國分爭), 상유이민이속(尙有移民移粟)

천조일통(天朝一統), 하분강북강남(何分江北江南)"

여러 나라가 다툴 때도 백성은 옮겨다니고 식량도 옮겨갔다.

이제 나라가 통일되었는데, 어찌 강남, 강북을 나눈단 말인가.

 

이런 유사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를 보면 고대의 송사들은 지혜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사는 고대소송에서, 자신의 몫을 해냈고, 사건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이는 당시소송절차가 완비되어 있지 못하고, 진술에 의존하고 증거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변론절차가 결핍되어 있던 것과도 관련있다. 그래서 송사의 붓아래에서 쓰여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소송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사의 붓의 공로는 그의 글의 날카로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남다르다는데 있다. 비록 많은 송사들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지만, 그중 흘탑노낭같은 송사들도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고심막측한 아문앞에서 속수무책이던 백성들에게 구명도초와 같다. 백성들의 바램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체 사회에 유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