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초당영웅(初唐英雄) 정교금(程咬金)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성당의 번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초당영웅의 이미지도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고, 희극화, 검보화(臉譜化), 심지어 만화화의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어떤 경우는 이미 중국에서 누구나 아는 속담이 되었다. 예를 들어: "중도에 튀어나오는 정교금(半路殺出來個程咬金)", "정교금의 세번 도끼질(程咬金的三板斧)"등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는 정교검이 황망을 약탈하거나, 와강채에서 혼세마왕으로 활약할 때, 항상 중도에 매복해 앴다가, 돌연 튀어나가서 적을 놀라서 물러나게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를 가지고 어떤 일이 원래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갑자기 닥쳐 결과가 엉망이 된 경우를 가리키게 되었다. 후자는 정교금이 꿈속에서 72로의 부법(斧法)을 배웠는데, 깨고나니 겨우 앞의 36로만 기억했다. 그중에 전3부(前三斧)가 특히 위력있어, 앞의 세번 도끼질을 막아내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고, 앞의 세번 도끼질이 통하지 않으면 정교금이 몇번 도끼를 휘두르다가 말을 때려서 도망치곤 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용두사미'인 경우를 형용한다. 다만 세번 도끼질을 할 줄아는 정교금은 항상 위기에서 잘 빠져나왔고, 그리하여 민간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복장(福將)이 된다.

 

기실, 이것은 그저 민간의 수당 초망영웅에 대한 유머와 놀림이다. 민간의 명인에 대한 최초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역사상 진정한 정교금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정교금은 제주 동아(산동성 동아) 사람이다. 사서에는 정지절(程知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교금은 청소년때 아주 용맹하고, 마삭(馬槊, 말위에서 장창을 쓰는 것)을 잘 다루었다.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64근 팔괘선화부(八卦宣花斧)를 잘 다룬 것이 아니다. 그는 수나라말기 난세에 태어나서 처음에 세상에 나온 것은 와강채로 가서 혼세마왕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의 무리를 모아 집단을 이루어 고향을 지킨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교금은 당초에 강도가 된 것이 아니라, 향민을 이끌고 도적을 막아내던 민간조직의 두령이었다.

 

수나라말기에 각지에서 속속 의거가 일어난다. 정교금의 고향을 지키는 비정규군의 생존은 아주 어려웠다. 부득이, 정교금은 수나라 대업13년(617년), 수백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당시에 아주 강대했던 와강군에 의탁한다. 이밀(李密)의 수하로, 정교금은 물만난 고기처럼 잘 지낸다. 진숙보(秦叔寶)와 함께 이밀의 최정예 8천위대의 우두머리가 된다. 직함은 내군표기였다. 이때부터 정교금은 이름을 정지절로 고친다.

 

당나라 무덕원년(618년), 수나라군대와 북망산에서 대결전을 벌이는 중, 정지절은 두각을 나타낸다. 당시 와강의 명장 단웅신(單雄信)은 외군을 이끌고 바깥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나라군대의 왕세충(王世充)에게 기습당한다. 단웅신은 이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밀은 정지절과 또 다른 '만인적(萬人敵)'이라는 별명의 배행엄(裴行儼, 즉, 소설에 나오는 수나라말기 천하제3의 사나이 裴元慶)을 보낸다. 배행엄은 용맹하게 앞에 나섰으나 불행히도 빗나간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정지절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연속 수인을 죽이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간다; 급히 땅위에서 배행엄을 안아서 말에 걸치고, 자신의 군영으로 되돌아온다. 수군은 나중에 추격하였다. 정지절은 배행엄을 안고 있어서, 행동이 재빠르지 못했다. 가슴이 서늘하다고 느낀 순간, 한 장삭(長槊)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정지절은 장삭을 꺽어서 창끝을 되돌려 살수를 찔러 죽인다. 그러자, 추격병들은 놀라서 흩어진다. 그제서야 그는 배행엄과 평안하게 군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장삭이 가슴을 뚫고 나왔는데도, 죽지를 않고 오히려 적군을 죽이고, 전우를 구해냈다. 이런 장거는 정교검이 복장이라는 전설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 실패한 것은 이밀이다. 정지절, 배행엄, 진숙보, 단웅신등은 모두 왕세충의 포로가 된다. 이밀은 죽음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이연에게 의탁한다. 얼마후에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피살된다.

 

왕세충은 이들 용맹한 항복장수들을 아주 중시한다. 그리고 잘 대해준다. 진숙보는 용양대장군에 봉하고, 정지절은 장군에 봉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와강채에서 투항한 장군들은 왕세충을 멸시한다. 정교금은 진숙보에게 말한다: "왕세충은 도량이 좁을 뿐아니라, 큰소리나 치고 헛소리를 한다. 그리고 맹세하고 저주하기를 좋아하니, 이는 무당할망구의 방식이다. 어찌 난을 바로잡고 반정을 이루어 천하를 평정하는 명주(明主)가 될 수 있겠는가?" 명주는 누구인가? 당연히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진왕 이세민이다. 아마도 이세민은 일찌감치 사람을 보내어 진숙보, 정요금등과 내통했을 것이다.

 

당나라 무덕2년(619년) 이월, 왕세충은 구곡(九曲)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인다. 쌍방은 진을 펼치고 대치한다. 정교금은 진숙보등과 군대를 이끌고 진의 앞으로 나간다. 돌연, 정교금, 진숙보와 기타 수십기는 서쪽으로 백여보를 달려간다. 그리고 정교금은 말 위에서 왕세충에게 읍을 하며 말한다: 저는 공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으므로 깊이 감사들인다. 그러나 공은 성격이 의심이 많고, 참언을 듣기 좋아하여 제가 몸을 맡길만한 곳이 아니다. 지금 더 이상 일을 같이 할 수 없으니 이제 떠나겠다."(<자치통감.당기삼>) 말을 마치고 수십명의 동료를 데리고 말을 달려 당군으로 간다. 진숙보, 정교금의 위명에 눌려, 왕세충의 인마는 그저 눈을 벌거니 뜨고 말이 달려간 후에 나는 먼지를 바라본다. 감히 추격할 생각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정교금과 진숙보가 당나라에 귀순한 가장 극적인 과정이다.

 

당나라에 귀순한 후, 이연은 정교금을 진왕부(秦王府)에 소속시킨다. 이세민은 그를 잘 대해준다. 진왕부좌삼통군이 된다. 그후, 정교금은 진왕 이세민의 오른팔이 된다. 매번 전투를 벌일 때면 가장 앞장서서 모범을 보인다. 송금강을 격파하고, 두건적을 생포하고, 왕세충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는 당왕조를 위하여 크나큰 공로를 세운다. 다시 영좌일마군총관이 되고, 숙국공(宿國公)의 작위를 받는다.

 

무덕9년(626년), 태자 이건성집단과 진왕 이세민집단의 태자쟁탈전의 피바람이 부는 과정에서, 좌일마군총관 정교금은 먼저 이건성의 숙청대상이 된다. 그를 장안에서 십만팔천리나 떨어져 있는 강주(광동성 수경현)의 자사로 보내고자 한다. 정교금은 초조해져서 이세민에게 말한다: "대왕의 손발, 날개가 모두 잘리면, 몸이 어찌 오래 버티겠습니까. 지절은 죽어도 가지 않을 것이니 하루빨리 결정을 냅시다."(<자치통감.당기칠>). 육월 초나흘, 여러 장군들의 옹립하에, 이세민은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이건성집단을 소멸시킨다; 2달후, 이연이 선양하여, 이세민이 정식 등극한다. 정교금은 이 공로로 태자우위솔이 되고, 다시 우무위대장군이 되며 실제 봉록 7백호를 하사받는다.

 

당태종 정관연간에 정교금은 노주도독, 좌영군대장군을 지낸다. 그리고 노국공(盧國公)에 다시 봉해지고, 보주자사(普州刺史)가 된다. 정관17년(643년), 다시 좌둔위대장군, 검교북문둔병, 가진군대장군이 된다. 바로 이 해에, 그의 화상은 능연각의 당24개국공신으로 걸리게 된다.

 

당고종 영휘6년(655년), 정교금은 좌위대장군이 된다. 그리고 총산도행군대총독에 임명된다. 현경원냔(656년) 팔월, "총산도행군총관 정지절은 서돌궐을 치고, 가알록(歌遏祿), 처월(處月)의 2부와 유모곡에서 전투를 벌여 대파하고 천여명의 수급을 벤다." "십이월, 정지절은 군을 이끌고 응사천에 도착하여 서돌궐의 이만기병을 만난다. 별수 서니시등 2만기병이 이어서 도착한다. 전군총관 소정방(蘇定方)은 오백기병을 이끌고 나가서 친다. 서돌궐이 대패하고 이십리를 추격한다. 천오백여명을 붙잡아 죽인다. 말 및 기계를 획득했는데, 산과 들에 이어져 있어서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자치통감>). 그때 정교금은 이미 68세였다. 영웅의 황혼이라는 느낌이 있다.

 

소정방의 공로는 행군부대총관 왕문도(王文度)의 시기를 불러온다. 왕문도는 정교금에게 말한다: "이번 전투는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두었으나, 우리 군도 사상자가 생겼다. 위기에 가벼이 진군하여 고군으로 깊이 진입하였으니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우리 군은 급진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오늘의 계책은 당연히 방진을 만들어 물자를 군대의 가운데 두고, 조금씩 전진하여 적을 만나면 싸우는 것이 만전지책이었다." 동시에 정교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상은 밀조를 내려서 말했다. 정대총관은 용맹함을 앞세워 적을 경시하였으니 왕문도에게 이를 견제하라고. 정교금은 그의 말을 믿는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방진을 이루어 천천히 전진하고,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병사들은 하루종일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진을 이루니,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말도 피로하여 죽는 경우가 많았다. 소정방은 정지절에게 말한다: '병사를 데리고 나왔으면 적을 토벌해야 하는데, 이제 스스로 지키기에 급급하고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곤란에 빠졌다.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처럼 유약하면 어찌 공을 세우겠는가! 주상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 부대총관을 보내어 호령하게 할 것인가. 분명히 일이 그렇지 아니할 것이다. 왕문도를 가두고 급히 글을 올려 물어보자'고 한다. 그러나 정지절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자치통감.당기십육>)

 

당군은 항독성아래에까지 전진한다(지금의 카자흐스탄 동남쪽). 수천의 소그드인이 성을 열고 투항한다. 왕문도는 정교금에게 말한다: "이들 오랑캐는 거짓으로 투항하는 것이다. 우리가 떠나면, 다시 도적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들을 깡그리 죽여버리고, 그들의 재물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소정방은 반박하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도적이 된다. 대당은 정의의 군사인데 앞으로 어찌 반란을 평정하러 가겠는가!"

 

아쉽게도, 정교금은 소정방의 간언을 듣지 않고, 눈을 멀거니 뜨고 왕문도가 성을 도살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지켜본다. 성안의 금은보화는 모조리 빼앗는다. 소정방은 명에 끝까지 따르지 않고, 자신에게 배분해준 보물도 받지 않는다. 이번 살륙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서역의 각부는 다시는 당나라에 투항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당군은 고립되고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게 된다.

 

장안으로 돌아와서, 왕문도는 성지를 거짓으로 전했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당고종 이치는 그를 사면해준다. 그저 직위만 면직시켰을 뿐이다; 정교금도 관직을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주자사의 직위를 받는다. 그러나 정교금은 스스로 나이가 너무 많다고 여겨서, 은퇴하겠다고 신청하여 허가받는다. 그때부터 집에서 말년을 조용히 보낸다. 인덕2년(665년), 칠십칠세의 정교금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소릉(당태종릉)에 배장된다. 그의 복장으로서의 일생은 이렇게 끝난다.

 

어떤 사람은 정교금이 서역정벌에 나선 것은 말년에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늙어서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기실, 정교금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전쟁으로 보냈다 어찌 병귀신속(兵貴神速), 추호무범(秋毫無犯)의 이치를 몰랐겠는가? 이는 완전히 화를 피하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현경원년은 이미 당태종의 정관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고종 이치는 개국공신들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무측천은 이미 이치의 소의에서 황후로 승격된다.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제거하려는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치는 왕문도에게 밀지를 내린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저 나중에 사정이 드러나자, 처리하기 곤란해져서, 왕문도가 밀지를 날조했다고 말할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밀지를 날조한 자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3년후 다시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기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밀지의 비밀을 말해준다. 즉, 당시 정교금이 왕문도가 전달한 밀지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중에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교금은 비록 늙었지만, 멍청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