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홍빈(侯虹斌)
나는 지금까지 한 사람이 정말 재능이 있다면, 처에 의지해서 성취를 거두더라도 별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리안(李安)이 두번째로 오스카상 최우수감독상을 받은 후,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안과 왕샤오보(王小波)는 한 때 변변한 일도 없이, 마누라에 의지해서 집안을 꾸려갔던 난감한 과거가 있다. 그들이 성공한 후에는 돌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바뀐다.
기실,이런 이야기는 <독자>에서 보면 그만이고, 웨이보의 유명인들이 포워딩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같은 이유로, 유방(劉邦), 사마상여, 진평(陳平), 장창(張蒼)등은 처에 의지하여 성공한 이야기를 사서에서 그대로 다 적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그저 남자의 재능, 견식 혹은 기우(機遇)를 칭송할 뿐이다. 아예 그들 배후의 돈주인이 누구인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마상여가 바로 전형이다. 탁문군과 사랑의 도피를 해서, 술을 판다는 사랑이야기는 이천년간 전해져 왔다. 다만 이렇게 금전 위에 건립된 애정을 사람들은 그다지 곱게 봐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탁문군이 없었더라면, 사마상여는 어느 구석에서 우울해하면서 하급관리로 일생을 마쳤을지, 우울하게 오두미를 위하여 허리를 숙였을지 모를 일이다.
사마상여의 자는 장경(長卿)이다. 아명은 견자(犬子)이다. 효경시대에 랑(郞)이 된다. <한서.사마상여전>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자위랑(以貲爲郞)"했다고. 그것은 결국 돈으로 관직을 샀다는 말이다. 한나라때 '자선(貲選)'도 정당한 선발방법중 하나였다. 재산의 수량으로 관리를 뽑는 것이다. 즉 호적이 있고 일정한 재산이 있는 평민(상인제외)중 뛰어난 자를 뽑아서 관리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자산이 많은 자는 '랑(郞)'이 되고, 자산이 적은 자는 '이(吏)'가 된다. <한서.경제기>의 조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금자산십이상내득관(今貲算十以上乃得官)". 응소의 주석에 따르면, "십산, 십만이다" 서한전기의 경제상황을 보면 집안재산이 십만이면 '중민지가(中民之家)'이다.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다. 글을 배울 수 있고, 검을 배울 수 있다.
관직을 얻은 후, 사마상여는 무기상시가 된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더욱 좋아하는 것은 사부문장과 구설지설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양효왕이 내조할 때, 곁에는 모두 유세지사인 제나라사람 추양, 회음매승, 오엄기라는 것을 본다. 이것은 사마상여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마침 이 때 그는 병이 난다. 그는 그 기회를 틈타 사직하고, 양나라로 간다. 그리고 제후유사와 함게 논다. 몇년 후, <자허부(子虛賦)>를 쓴다.
나중에 양효왕이 죽고, 사마상여는 성도로 되돌아간다. 가난해서 방법이 없었다. 이상할 것도 없다. 낭관은 원래 그다지 돈을 만지는 자리가 아니다. 사마상여의 사산으로는 보통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와 접촉한 고관대작들과 같은 생활을 즐기려면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양왕부에 있을 때, 그는 대개 청객(淸客)의 모습이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다만 돈을 벌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짧은 몇년만에 후반생의 금의옥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마상여는 정말 가난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부귀로운 생활에 대하여 초조해하고 노심초사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면, 그가 가난하다고 하면서, 공경하는 임공령에 대하여 무시하는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
임공이라는 곳은 돈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중,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탁왕손(卓王孫)이다. 집안에 노비만도 팔맥명에 달했다. 탁왕손은 임공령 왕길로 하여금 귀빈들을 모두 손님으로 부르게 한다. 사마상여도 왕길에게 억지로 끌려간다. 왕길은 사마상여에게 곡을 바치고 금을 켠다. 마침 이 때, 사마상여는 탁왕손의 새로 과부가 된 딸 탁문군을 본다. 그래서 그는 왕길과 서로 곡을 바치는 것처럼 하면서, 실은 금음으로 탁문군을 꼬신다. 탁문군은 몰래 본다. 사마상여는 일표인재(一表人才)이다. 마음이 이미 움직였다. 사마상여는 쇠뿔도 단 김에 빼는 것이라고 탁문군의 시녀에게 큰 돈을 주어 연락을 한다.
밤에 사마상여와 함께 도망쳐서 두 사람은 성도로 간다. 탁왕손은 대노하여 한푼의 돈도 주지 않는다!
성도에서 사마상여의 집은 겨우 벽만 네 개 서 있었다. 시간이 오래되니 탁문군은 견디기 힘들어졌다. 다시 임공으로 돌아가서 가마와 말을 팔아, 술집을 차린다. 바로 부친의 눈앞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천금소저가 얼굴을 내밀고 술을 팔고 있고, 사마상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짧은 바지를 입고 길거리에서 천한 일을 한다. 사람들마다. 모두가 이들이 임공거부 탁왕손집안의 딸과 사위라는 것을 알았다. 탁왕손은 체면을 잃게 되니, 할 수 없이 탁문군에게 시비 100명과 돈 백만을 준다. 탁문군은 사마상여와 성도로 돌아간다. 거기서 전답을 사서 부자가 된다.
그러나, 단지 부유한 것만으로는 안된다. 사마상여는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한무제가 한번은 <자허부>를 읽었는데, 아주 좋아했다. 곁에서 모시던 태감 양득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허부>를 쓴 사마상여를 추천한다. 사마상여는 이로 인하여 총애를 받는다. 그냥 보기에는 사마상여가 한무제의 눈에 든 것은 운인 것같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한 태감이 부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게 한무제가 어떤 부를 좋아할지 알았겠는가? 당연히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마상여가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돈이 없다면, 어찌 황제의 곁에 있는 태감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후, 사마상여의 업무중 파촉에 사신으로 가고 서남이(西南夷)에 사신으로 갔다. 그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촉의 땅으로 간다. 태수 이하는 모두 친히 교외까지 나와서 영접했다. 탁왕손이 이를 보고는 탄식을 했다. 그리고 돈을 모조리 이 딸과 사위에게 넘기고, 딸을 아들처럼 대한다.
사마상여의 일생은 모두 '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관료생활에서 일찌기 관직을 잃은 적도 있는데, 누군가 글을 올려 그가 일찌기 사신으로 나갔을 때 돈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상황으로는 토로하지 않았다. 폐후 진아교는 천금을 주고 그의 <장문부(長門賦)>를 사서, 황제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했으나 실패한다. 다만, <한서>에 다시 또 다른 상반된 사실이 나온다. 탁문군과 결혼한 후, 사마상여는 돈이 너무 많았다. 자주 병을 핑게로 한가롭게 살면서, 관직과 작위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정말 모순된 동물이다.
기실, 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 어찌 사마상여뿐이겠는가? 유방은 깡패였다. 관상으로 부잣집 딸 여공의 딸 여치를 취한다; 진평도 먹기나 좋아하고 게으른 자이다. 예쁘게 생긴 부자 장부의 손녀를 취한다; 유수는 약간 좋았다. 그러나 취한 음려화의 집안은 그보다 나았다. 이때부터 이들은 "자용익요(資用益饒), 유도일광(遊道日廣)"했다. 여자가 이 단계에서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원인은 그녀들의 남자가 처음에는 모두 가난하기 그지없던 유협이라는 것이다. 교제, 출유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건 돈이 필요하다.
이런 때, 남자를 고르는 것은 마치 경마에 돈을 거는 것과 같다. 너는 모른다. 백만명의 할일없는 백수인 남자들 중에서, 어느 날 유방, 진평, 사마상여, 리안, 왕샤오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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