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무삼사(武三思)의 처세명언: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중은우시 2013. 11. 10. 09:53

글: 독서삼매(讀書三昧) 

 

 

 

무삼사가 한 처세명언이 있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不知何等名作好人, 唯有向我好者, 是好人耳)"(<구당서.무삼사열전>).  그의 말을 들으면, 아주 실제적이다. 어떻게 들어도 조조의 그 말 "차라리 내가 천하인을 배신할지언정 천하인이 나를 배신하지는 못하게 하겠다" 보다는 훨씬 편안하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같은 맛이다.

 

무릇 관료사회에 있는 사람은 "각자 모시는 주인이 있다(各爲其主)"는 마음 상태가 일종의 잠규칙(潛規則)이다. 이런 잠규칙은 비록 말을 안해도 다 알고 있지만(心照不宣), 왕왕 뇌지(雷池)처럼 만일 반보(半步)만 넘어가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몸을 망치는 화를 불러온다; 가벼우면 왕왕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무거우면 아마도 패가망신할 것이다. 이런 잠규칙은 넓게 말하자면 원칙과 입장에 관한 것이고, 좁게 말하자면 사람됨과 품행에 관련된 것이므로, 양면삼도(兩面三刀), 배주구영(背主求榮)의 사람은 왕왕 사람들이 멸시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정치투쟁의 게임규칙으로 한 사람의 본성의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기는 정말 어렵다.

 

무삼사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그의 비황등달(飛黃騰達)은 모조리 무측천의 덕분이다. 그래서, 그는 "각위기주"의 심리상태를 가지고, 무측천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했다. 그러다보니 나쁜 짓도 적지 않게 하게 된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사람들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인간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려면, 인간성의 각도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객관적인 표준이 필요하다. 그 표준은 무엇인가? 풍몽룡(馮夢龍)이 한 마디 한 바 있는데 의미심장하다: "개락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은 '의리(義利)'라는 두 글자에 착안하면 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맞을 것이다. 현(賢), 간(奸)의 모습은 비록 천태만상이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항상 이 두 글자에 다름아니다." 풍몽룡의 이 말로 무삼사를 보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당중종 이현이 무측천에게 연금되어 있을 때, 위후(韋后)는 그의 곁에서 그 힘든 나날을 함께 보낸다. 그러므로, 이현은 위후에게 시종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번은 이현이 위후에게 말한다: "만일 언젠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된다면, 너는 하고 싶은대로 해라, 나는 절대로 반대하지 않겠다." 그래서, 당중종이 황제위에 다시 복위된 후, 위후가 계속 조정에 간섭했던 것이다. 그녀가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위후라는 큰 나무에 기대기 위하여, 무삼사는 상관완아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위후와 관계를 맺는다. 이런 관계때문에, 위후는 무삼사를 위하여 적지 않은 일을 처리해준다. 다만, 무삼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위후에게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이용하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위후와 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인 필요가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에 몇몇 중신이 있었다. 경휘(敬暉) 같은 사람들이다. 무삼사가 보기에, 그들은 눈엣가시(眼中釘, 肉中刺)였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삼사는 손초(損招,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는 수법)를 쓴다.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위후의 음란한 일에 관하여 곳곳에 글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 당중종은 대노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한다. 조사하는 사람은 자연히 무삼사가 배치했다. 조사결과는 생각하면 알 것이다. 글을 붙인 사람은 바로 경휘등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량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상을 벗어난 것이라면, 만일 무삼사가 동료를 모해하기 위하여 '용심양고(用心良苦)'했다면, 정치투쟁의 필요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몸 이익을 위하여 위후 즉, 자기와 관계가 그렇게 밀접하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여인을 팔아먹었다. 이것을 참으면 더 참아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무삼사의 이 명언의 실질을 말해준다. 극단적인 이기심. 보기에 어떤 처세철학을 지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장한다는 말이 정말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