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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대당제일재녀 상관완아(上官婉兒)는 정말 음탕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9. 19.

글: 이자지(李子遲)

 

710년, 이융기(당현종)가 정변을 일으켜, 위후(韋后) 일당을 제거하였다. 그중에는 당나라 역사상 저명한 여성정치가 상관완아가 포함되어 있다. 그녀가 죽은 후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이 수수께끼는 풀렸다.

 

<서안만보>등 매체신문의 2013년 9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섬서성 고고연구원에서 고고학자들이 함양공항의 부근에서 상관완아의 묘를 찾아냈다고 한다. 묘지의 규모는 크지 않고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으며, 출토문물도 많지 않지만, 현재 현장은 봉쇄되었고, 현재 정리와 발굴과정에 있다고 한다.

 

한당왕 웨이보(섬서성 문물국 공식웹사이트)에서 9월 9일 상관완아의 무덤을 찾았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후,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여러 네티즌들이 뜨겁게 토론하고 있다. 이 웨이보는 9월 9일 오후 5시까지 이미 2000여번이나 퍼갔고, 댓글도 400여개나 달렸다. 모두 이 발견에 대하여 기뻐하고 놀라는 내용이었다.

 

"계수용수"라는 이름의 네티즌은 "도굴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당나라때의 벽화와 당나라때의 정교한 기물을 보고 싶다."라고 남겼다. 네티즌 "창우"는 "이것은 아주 익숙한 일므이다...언제 묘지(墓誌)를 공개할 것인가?" 또 다른 포럼이 네티즌은 '장안미인도'라는 여행노선을 그려냈다: "시급하게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측천 + 양옥환(양귀비) + 상관완아....멋진 한 폭의 '장안미인도'이다. 절대로 인기관광지가 될 것이다."

 

당나라때 묘장에는 묘지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묘지에 근거하여 묘의 주인이 상관완아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성 고고연구원의 관련책임자는 상황이 복잡하고, 고고발굴이 여전히 진행중이므로, 10일후에 묘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관완아는 일대여황 무측천이 중용한 '건괵재상'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신비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당나라를 주제로 한 많은 드라마, 영화, 희극, 소설에서 그녀의 모습이 나온다. 문예작품과 문인묵객들 그리고 민간전설에서는 아주 신비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역사상 진실한 상관완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관완아는 상관소용(上官昭容)이라고도 하고, 별명은 소완(小婉)이다. 664년에 태어나서, 710년 7월 21일에 죽는다. 당나라때 여황 무측천의 여관이며 당중종 이현의 황비이고, 재능이 뛰어난 여시인이다. 용모는 청려(淸麗)하고, 총명하며 공부를 좋아했다. 변신에 능하고 권모술수와 투기에 능했다. 모든 관계를 잘 처리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중국역사상 가장 재능있는 10명의 여인중 한 명", "중국역사상 지위가 가장 높았던 10명의 여인중 한 명", "대당제일재녀", "중국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10대여인중 한 명"이라고 부른다. 앞의 3개는 절대로 문제가 없다. 단지 뒤의 하나는 야간 의문이 있다. 만일 '중국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20대여인중 1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하.

 

상관완아는 당고종때의 재상 상관의(上官儀)의 손녀이다. 증조부 상관홍(上官弘)은 일찌기 수나라때 강도궁 복감(福監)을 지낸다. 조적은 섬주 섬현(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이다. 그녀의 일생은 부침이 심했다. 무측천 그리고 무측천의 아들 당중종과 계속 함께 했다. 특히 무측천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 28년간(677-705)이나 활약한다. 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재주에 의존하여 한걸음 한걸음 권력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당시의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친다.

 

상관완아의 조부는 상관의이다. 664년 당고종을 위하여 무측천을 폐위하는 조서를 초안하였다가, 나중에 무측천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 때, 막 촐생한 그녀는 모친 정씨(鄭氏)를 따라 궁으로 들어와 궁비(宮婢)가 된다. 677년, 14살된 그녀는 시서를 익숙하게 읽고,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한번은 무측천이 즉석에서 문제를 냈는데, 그녀는 금방 문장을 만들었고, 글의 뜻은 잘 통했고, 문구도 화려했으며, 언어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무측천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노비신분을 면제해준다. 그리고 그녀에게 궁중의 조서를 담당하게 한다. 얼마후 상관완아는 다시 무측천의 뜻을 거스르다가 사형의 벌을 받는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녀의 재주를 아껴 사면해주고 경면(黥面)으로 끝낸다. 그후 상관완아는 신경을 써서 무측천을 모시고, 무측천의 뜻에 영합하여 더욱 무측천의 환심을 산다.

 

699년, 상관완아는 무측천에게 중용된다. 궁중의 조서를 책임진지 여러해 되었고, '건괵재상'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중에 당중종시대에는 소용에 봉해진다. 후궁의 지위는 황후의 바로 다음갔다. 모친 정씨는 패국부인이 되어 권세가 더욱 강해진다. 그녀는 정계, 문단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른다. 황비의 신분으로 내정과 외조의 정령문서를 장악했고, 정치에 참여했다. 서관을 확대하고 학사를 확충할 것도 건의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문단을 주재하여 조정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문을 평가한다. 일시에 많은 사신(詞臣)들에 그녀의 문하에 모여든다. 여러번 부녀의 사회, 정치에서의 지위를 제고하도록 건의했다. 그녀는 중국최초의 여권운동가중 하나이다.

 

그러나, 710년의 권력투쟁에서, 나이 겨우 47세인 상관완아는 피살된다. 이 기간에 그녀는 역사상 악명이 자자한 무삼사(무측천의 조카로 무조의 조량왕)와 사통하였고, 당나라 최고미남이라던 최식과도 간통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풍류적이고 음탕하다고 얘기되어 지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당시 임치왕(즉 나중의 당현종 이융기)이 거병한 후 먼저 당중종의 황후 위씨를 죽이고, 곧이어 여러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상관완아까지 죽여버린다.

 

개원초년, 이미 등극한 당현종은 상관완아의 소용신분을 회복시켜주고, '혜문(惠文)'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녀의 시작품을 수집한다. 문집 20권으로 만들고 장열이 서문을 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문집은 이미 실전되었고,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전당시>에 수록된 상관완아의 시작 32수뿐이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문예작품이 상관완아를 그리는 것은 긍정적으로 찬미하는 것이 위주이다. 다만 역사상 진실한 그녀는 그렇게 완벽하고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복잡하고 잔혹한 궁중투쟁과정에서 생존을 위하여, 그녀는 부득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가 무삼사와 사통한 것은 음란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