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위징: 6번이나 주군을 바꾼 특이한 충신인생

중은우시 2013. 11. 25. 19:18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위징을 얘기하면 일반사람들은 모두 당태종 이세민의 수하로 감히 범안직간(犯顔直諫)한 충신미여, 당태종의 거울이라고 알고 있다. 일반인이 그를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진실을 감히 얘기한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이 있다. 위징은 기실 일생동안 6번에 걸쳐 주군을 바꾼 특이한 충신이다.

 

위징의 자(字)는 현성(玄成)이며, 하북 거록 곡성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위장현(魏長賢)이며, 북제(北齊)의 둔류현령이었다. 왕조가 바뀌고 부친이 일찍 죽는 바람에, 위징의 집안는 이전의 명문대가에서 수나라때는 한미한 가문으로 된다. 위징은 비록 낙척이지만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위징은 글읽기를 좋아했고,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며, 특별히 종횡가의 설을 좋아한다. 소위 종횡가의 학설은 바로 종적, 횡적의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정면, 반면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종의 방법이자 책략이다. 이것은 이후 위징의 발전에 크게 유용하게 된다.

 

수나라말기 천하대란때 무양군승(武陽郡丞) 원보장(元寶藏)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위징이 인재인 것을 알고, 그에게 도관에서 나와 반란대오에 참가하도록 요청하여 문서업무를 맡긴다. 이때, 원보장과 와강채(瓦崗寨)의 이밀(李密)과 주고받은 서신은 대부분 위징이 초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보장이 이밀에게 귀순한 후, 위징은 다시 이밀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원수부 문학참군이 되어, 문서서류를 관장한다; 1년이후, 위징은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당에 귀순한 이밀을 따라 장안으로 가서, 당고조 이연에게 귀순한다; 당나라에 귀순한 후, 오랫동안 기용되지 못한다. 위징은 스스로 산동으로 안무(按撫)하러 가겠다고 자청하여, 비서승(秘書丞)의 관직을 받고, 하남 준현으로 가서 친구인 서세적(徐世勣, 나중의 李勣)을 설득하여 당나라에 귀순시킨다(당시 서세적은 여전히 이밀의 부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하왕 두건덕(竇建德)이 준현을 점령하고, 위징은 포로로 잡힌다. 그는 다시 두건덕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된다; 두건덕이 패배하여 생포된 후,위징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태자 이건성(李建成)이 그의 명성을 듣고 청해서 위징은 다시 이건성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된다. 그 동안, 위징은 태자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도록 건의하였다; 현무문사변후, 이세민은 위징을 불러 문책한다. 왜 우리 형제의 사이를 이간질했느냐고? 위징은 얼굴색도 바뀌지 않고 대답한다: 태자가 만일 당시에 제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의 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위쟁의 재주를 높이 샀다. 그래서 그를 첨사주부(詹事主簿),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는다. 위징은 이렇게 하여 여섯번째 주군인 당태종 이세민을 마침내 따르게 되었다.

 

위징의 초기 정치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계속하여 주군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좋은 여인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好女不嫁二夫, 忠臣不事二主)". 위징이 빈번하게 주군을 바꾼 것은 고대의 충신행렬중에서 보기 드문 것일 뿐아니라, 간신대오중에서도 비견할 만한 자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위징이 주인을 바꾼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피동적으로 바꾼 것이다. 즉, 원래의 '조직'이 파산하거나, 혹은 합병되어 그는 새로운 주군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자연도태의 법칙에 따라, 그는 마지막에 가장 강한 지도자인 이세민의 수하가 된다. 둘째는 매 주군들은 모두 그를 중시했다. 그리고 그는 매번 주군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했다. 두건덕의 수하로 있을 때, 둔전을 개척하는 정책을 건의했고, 이로 인하여 두건덕은 날개를 단 호랑이격이 된다; 태자 이건성의 수하로 있을 때, 여러번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건의했다; 이세민의 수하로 있을 때, 더더욱 열심히 일을 한다. 그리하여 신하들의 모범이 된다. 이런 점은 현대의 직장엘리트의 풍모이다.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열심히 일을 하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일단 다른 회사로 옮겨가면 감정적인 요소에 좌우되지 않고, 공사를 혼동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니, 위징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충신이다.

 

당연히, 위징의 이처럼 빈번한 주군교체는 고상한 인사들의 비난을 받는 일이 된다. 이연 부자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멸시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뜻은 개략, "젖만 주면 엄마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위징은 스스로 변호를 한다. 예를 들어, 두건덕에게 둔전을 헌책한 일에 대하여 위징은 이렇게 해명한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다. 대당천하는 사해에 미치고, 신이 둔전개간을 건의한 것으로 수익을 받은 것은 백성이다. 부유해진 것은 국가이다. 양군이 대진해도 백성은 무고하다. 전쟁때문에, 백성을 도탄에 버려둘 수 있겠는가? 성상은 백성의 삶을 중시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데, 비록 하왕(두건덕)의 군대가 이로 인하여 이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진정 이익을 얻은 것은 역시 일반 백성이다. 그래서, 신은 신이 두건덕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신은 두건덕을 통하여 백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보라. 이것이 바로 위징의 종횡가에서 말하는 민본사상이다. "백성은 중요하고, 군은 가볍다. 사직은 그 다음이다."를 가지고 자기변호를 했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주군에 충성하는 것만 알지, 백성을 위하는 것은 모르는" 충신과의 차이점이다.

 

위징은 일찌기, 이세민과 충신과 양신의 구별에 대하여 토론한 적이 있다. 그는 이세민에게 말한다: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이 되게 해주시고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세민이 묻는다. "충과 양은 무엇이 다른가?" 위징이 말한다: "양신은 직(稷), 설(契), 고도()이고; 충신은 용봉(龍逢), 비간(比干)이다. 양신은 살아서 좋은 명성을 얻고, 주군이 현호(顯號)를 주고, 자손대대로 전해지며, 복록이 무궁하고; 충신은 몸이 주살을 당하고, 군주는 악인으로 평가받으며, 집안과 나라가 모두 망한다. 그저 헛되이 그 명성만 얻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 차이가 아주 크다." 위징은 이렇게 종횡가의 특기를 가지고, 충신과 양신의 구분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일대명군이 되고 싶었던 당태종의 중용을 받는다. "황제가 그의 말을 들어주고, 상으로 비단 오백필을 내렸다."(<구당서>)

 

위징이 위징인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직(直), 즉 곧다는 것이다. 한번도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중국고대의 대신은 군왕에게 아뢸 때, 모두 함축(含蓄)적으로 하였다.아주 간단한 의견이나 견해도 아주 많은 수식을 다는 외에, 방고측격(傍鼓側擊)의 수법으로 제기했다. 논의하는 것이 무슨 수수께끼놀이하는 것같았다. 이런 방식은 왕왕 각급정부의 일처리효율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위징은 일생동안 우회적으로 빙글빙글 돌리지 않았고, 그가 건의할 때는 모두 직설적으로 얘기했으며, 명확히 의사를 전탈했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위징이 당태종에게 올린 <사소(四疏)>는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위징과 같이 감히 범안직간하는 충신은 이세민같이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들어주는 명군을 만났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정관6년(632년), 이세민은 단하궁에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장손무기가 조롱하며 말한다: "왕규, 위징은 옛날 태자 이건성의 심복이다. 우리와는 세불양립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우리와 같은 연회석에서 술을 마시게 될 줄은." 이세민이 말한다. "왕규, 위징은 전심전력으로 주공을 위하여 일을 했다.그래서 나는 그들의 충성심을 보고 쓴 것이다." 이어서 또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위징의 행동거지가 소만(疏慢)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로 그것이 더욱 아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내 귀에 들어온다." 위징이 감사하며 말한다: "폐하께서 신이 말을 하도록 하시니, 신은 우둔함을 다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페하께서 거절하도 받아들여주시지 않으면, 신이 어찌 감히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군명신직(君明臣直).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올바르다. 누군가 심지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위징이 만일 당태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백번도 넘게 죽었을 것이라고. 혹은 아예 위징이 나타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정관12년(638년) 삼월, 황손이 태어나면서, 당태종은 태자의 동궁에서 5품이상의 관리를 불러 연회를 베풀 때 이런 말을 한다: "정관이전에, 짐이 천하를 경영한 것은 (방)현령의 공이다. 정관이후 잘못을 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위징의 공이다." 그리고 친히 패도를 두 사람에게 내린다. 당태종은 위징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후로 이백여건을 간언했는데, 모두 짐의 뜻에 맞았다. 경이 충성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특이한 충신 위징의 진실한 모습이다.

 

정관17년(643년) 봄, 청빈하게 살아서 황제가 내린 재료를 가지고 막 집을 지은 위징은 당태종의 보살핌하에 병사한다. 향년 64세이다.

 

위징이 죽은 후, 당태종은 친히 조문하고, 탄식한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복을 바로 할 수 있다; 옛 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 짐은 항상 이 세 가지 거울을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막으려 했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를 잃은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과 특이한 충신 위징이라는 한 쌍의 군신은 가위 고금중외 '군명신직"의 빛나는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