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자금성(紫禁城)은 누가 설계했는가?

중은우시 2011. 12. 30. 03:50

글: 호항(胡恒)

 

[요약] 괴상(蒯祥)이 자금성의 설계자라는 설은 여러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일찌기 고궁박물원 고건축부 고급엔지니어로 있던 우탁운(于倬雲) 선생은 나이가 젊은 괴상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궁전의 건축은 이미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설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진정한 설계자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채신(蔡信)인 것이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 성궐구중문(城闕九重門), 부도황거장(不睹皇居壯), 안지천하존(安知天下尊)"

나라의 영토가 수천리에 이르는 나라의 황제가 사는 궁궐은 구중궁궐이어야 한다.

황제가 사는 곳이 장엄한 것을 보지 않으면, 어찌 황제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당나라때 낙빈왕의 이 시는 세상사람들의 제왕궁전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을 드러낸다. 명청 양대에 걸쳐 황궁이었던, 자금성은 수백년동안 위엄과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박물원으로 바뀐 후에야 비로소 세상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자금성은 북경의 중축선(中軸線) 상에 놓여 있고, 북경성을 동,서의 두 부분으로 가르고 있다. 성벽내의 면적은 약 72만평방미터이고, 현존하는 건축면적은 약 15만평방미터이다. 명청 양대의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 거주했다. 수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국가대사가 이 곳에서 결정되고, 일대의 중국인들의 운명을 바꾸었던가. 자금성의 문헌과 실물은 아주 풍부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건축설계자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당시에, 공장(工匠)의 지위는 낮았으므로, 건축시에 수백만명이 참가했음에도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402년, 북방을 지키고 있던 연왕 주체(후의 영락제)는 온갖 심계를 써서, 자신의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천하를 빼앗고, 대명왕조의 제3대황제에 오른다. 전해지는 바로는 주체의 군대가 도성 응천부(지금의 남경시)를 함락시킬 때, 건문제가 불바다 속에서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주체는 이것으로 마음의 병을 얻었고, 건문제가 어디에선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걱정했다.

 

주체는 등극한지 얼마되지 않아, 건문제의 복수를 꾀하던 어사대부 경청(景淸)이 조당에서 암살을 꾀하여, 하마터면 주체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후 그는 자주 악몽을 꾸었고, 게다가 남경의 다습한 기후를 견디기 힘들어했고,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근거지 북경으로 가고 싶어했다.

 

4년후, 구복(丘福)을 위시한 대신들은 북경에 새로운 궁전을 지을 것을 건의한다. 주체는 아주 기뻐하면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동의힌다. 거대한 공사가 서막을 연 것이다.

 

주체는 먼저 인원을 보내어, 전국각지에서 귀한 목재와 석재를 구하도록 하고, 다시 북경으로 운송하도록 한다. 준비작업에만 11년이 소요되었다.

 

진귀한 남복(楠木)은 숭산준령에 많이 자라고 있었다. 백성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를 벌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나중에 "입산일천, 출산오백(入山一千, 出山五百, 산에 들어간 사람은 천명이고, 산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오백이다)"이라는 말로 벌채를 위하여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나타냈다. 궁전을 지을 때 쓸 석재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현재 보화전(保和殿)의 뒤에 있는 그 최대크기의 단계석(丹階石)은 북경서남부의 방산(房山)에서 캐낸 것이다. 사서에 는 그 돌을 운송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수만명의 노동자가 도로의 양쪽에 매 1리마다 우물 하나를 파고, 한겨울에 기온이 낮아졌을 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도로에 뿌려서 얼음길(氷道)를 만든다. 그후 28일의 시간을 들여, 궁안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그외에 소주에서는 황가건축에 사용되는 벽돌(金塼)을 보냈고,  산동성 임청에서도 북경으로 공전(貢塼)을 보낸다. 이들 각지의 재료는 대부분 대운하를 통하여 배로 운반했다. 그러므로, "선유대운하, 재유북경성(先有大運河, 再有北京城, 먼저 대운하가 있고, 나중에 북경성이 있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재료가 준비되자, 영락15년(1417년) 주체는 남방에서 대량의 장인들을 불러모아서, 대거 토목사업을 벌여 궁성을 만든다.

 

자금성은 엄격하게 종법예제에 따라 설계, 계획된 것이다. 앞의 3대 대전(大殿)은 외조(外朝)이고,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뒤의 궁전군은 내정(內廷)으로 후궁비빈이 거주하고, 황제가 가정생활을 하는 곳이다. "좌조(左祖, 왼쪽에는 태묘), 우사(右社, 오른쪽에는 사직단)" 및 전통의 음양오행학설이 자금성 건축에 활용된다. 중국고대의 성상학(星象學)에 따르면, 자미원(紫微垣,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천제(天帝)가 거주하는 것이다. 하늘과 인간은 대응하므로, 황제가 거주하는 궁전을 자금성이라 부른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도대체 누가 설계했을까?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학설에 따르면, 자금성의 설계자는 명나라때의 걸출한 장인 괴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홍무30년(1398년)에 태어났고, 성화17년(1481년)에 사망했으며, 소주 오현(지금의 강소성 오현) 향산 사람이다.

 

당시 북경으로 온 장인들 중이서 향산방(香山幇)이 있었다. 모두 오현 향산 사람이거나 그들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목공에 능했고, 그 중에는 뛰어난 니수장(泥水匠), 칠장(漆匠), 석장(石匠), 퇴회장(堆灰匠), 조소장(雕塑匠), 채회장(彩繪匠)도 있었다. 괴상은 향산방 장인들의 우두머리였다.

 

민간에는 그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황궁을 만들 때, 버마국에서 명나라에 커다란 나무를 하나 바쳤다. 주체는 명을 내려 그것으로 대전의 문함(門檻)으로 쓰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한 목장이 실수를 하여 길이가 1척여 짧아지게 되었다.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급히 괴상에게 보고한다. 괴상은 이를 보고, 그 목장에게 다시 1척을 더 자르라고 시킨다. 모두 깜짝 놀란다. 그 후, 괴상은 문함의 양쪽 끝에 두 개의 용머리(龍頭)를 조각한다. 그리고 다시 끝에는 구슬을 박았고, 다시 혁신을 하여, 문함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황제는 이를 보고 아주 기뻐하며, 크게 치하한다. 이것이 속칭 금강퇴(金剛腿)이다.

 

괴상은 아주 총명했다. 궁전누각을 지으면서, 그는 개략 계산한 후, 설계도를 그려냈다. 시공이 끝난 후에 보면 건축과 그의 도면은 한치도 없었다. 괴상의 건축조예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방았다. 황제는 매번 '괴노반(蒯魯班, 노반은 고대의 유명한 목수)'이라고 불렀다.

 

1420년, 고궁이 완공된다. 겨우 9개월이 지난 후에 벼락을 밪아 불이 나서 3대전이 모조리 불타버린다. 여기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전을 다 지은 후 주체는 자만심에 넘쳤다. 그리하여 점을 치는 관리를 불러서, 개략 점을 치게 한다. 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년 4월초팔일에 궁전에서 화재가 발생할 것입니다." 주체는 대노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해의 바로 그날, 날씨가 급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고, 삼대전이 정말 벼락을 맞아 불에 타게 되었다. 정통(1436년-1449년) 사이에, 조정은 다시 건축한다. 이번에 책임진 사람도 여전히 괴상이다.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명대 궁성도에 승천문(지금의 천안문)의 아래에 그려진 인물이 바로 괴상이라고 전해진다.

 

괴상은 나중에 공부좌시랑까지 오른다. 공부(工部)라는 돈이 많이 도는 아문에서도 낮은 관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겸손하고 소박했다. 만년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있었지만, 매번 사람들이 그에게 건축에 관하여 물어볼 때면, 그는 아주 열심히 가르쳐 주곤 했다. 과거 북경에는 괴시랑후통이라는 곳이 있었다. 바로 괴상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괴상의 후인은 대부분 그의 기술을 이어받아, 청나라말기까지 "강남의 목공은 뛰어는 장인이 많은데, 모두 향산출신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역사의 물결은 드넓어서, 적지 않은 비밀이 파묻힌다. 괴상이 자금성설계자라는 설은 의문이 드는 점이 많다. 일찌기 고궁박물원 고건축부 고급엔지니어닌 우탁운 선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젊은 괴상이 북경에 들어왔을 때, 궁전의 건축은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설계할 수는 없었다. 진정한 설계자는 이름도 보잘 것없는 채신이었다. 고궁박물원 고건축부의 연구원 이섭평은 의문을 품고 있다. 1417년 자금성을 처음 지을 때, 괴상의 나이는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전체 공사를 설계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같지가 않다. 괴상의 공헌은 주로 정통연간의 재건공사때일 것이다.

 

우탁운이 언급한 채신이라는 사람은 남직예 무진(지금의 강소성 상주시 무진) 사람이다. 그의 생년월일은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민건에는 자금성설계에 참여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당시 주체는 궁전을 만드는 임무를 공부상서 송례(宋禮)에게 맡겼다. 황궁을 지으려면 먼저 도면이 필요하다. 송례는 먼저 채신을 찾아가서 설계하게 만든다. 채신은 재주가 있었다. 금방 설계를 마친다. 송례는 설계도를 보더니 아주 만족한다. 황성은 원나라때보다는 약간 남으로 이전한다. 큰 궁전은 중축선을 따른다. 좌조우사는 아주 반듯하게 만든다. 그리고 흙을 쌓아서 경산을 만든다. 이처럼 사각형의 안정적인 건축물은 대명이 영원무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송례는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스스로 실지조사를 한다. 그리고 이 설계는 창의력이 풍부할 뿐아니라, 일하기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보고한다. 주체도 설계는 몰랐다. 그저 신황궁에는 구중궁궐, 9999칸반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밖에 몰라서 그 설계에 만족한다. 전설에 따르면 하늘의 궁전이 1만칸이기 때문에 황궁은 최소한 반칸이라도 적어야 해서 9999칸에 반칸이 더 들어가는 것으로 하였다. 이는 황권의 위엄을 나타내고 인간제왕의 겸허함도 같이 나타낸다. 그리하여 채신의 설계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973년, 전문가들은 통계를 내본 바 있다. 그랬더니 자금성에는 실제로 8707칸의 방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전문가는 자금성의 설계자가 양청(楊靑)이라고 본다. 그가 남긴 자료는 더욱 적다. 그가 와공(瓦工)이라는 것만 안다. 그의 양청이라는 이름도 주체가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상의 몇 가지 의견을 종합하면, 자금성을 처음 지을 때 양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괴상이 서울로 들어온 후, 그는 젊고 건장했으므로 남경궁전의 설계와 건조업무에 참여하였을 것이고. 계산과 회사에 능하므로, 주요한 설계와 건축업무는 그가 완성하게 된다. 그의 지위와 역할은 이로 인하여 더욱 두드러진다.

 

이섭평 연구원에 따르면, 궁전의 건조는 조정관리가 어쨌든 관여한다. 괴상이든 채신, 양청이건 실제로는 나무, 돌, 그림등 구체적인 분야를 책임졌을 뿐이다.

 

자금성은 중국고대궁전예술의 집대성이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궁전건축군중 하나이다. 많은 장인, 백성들이 이를 위하여 희생이 컸다. 심지어 많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희생시켜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서 자금성은 수백년전 건축가들의 집단보고연출이었다. 중화민족의 집단적 지혜가 체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