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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는 태감의 정치간여로 망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홍촉(洪燭)

 

태감에 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위충현(魏忠賢), 이연영(李蓮英)같은 반면인물을 생각할 것이다. 자금성은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악명을 널리 떨치고 있다.

 

기실 태감 자신도 불행하다. 봉건시대의 희생품이다. 제왕들의 음암(陰暗)한 심리가 태감의 생리상 결함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기형의 남자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궁정의 필요를 만족시켜주기 위함이다. 도모안연(道貌岸然)의 황제가 바로 인성을 말살시킨 진정한 흉수이다. 어떤 환관은 총애를 받으면 바로 소인득세하여 자만한다; 기실 그들이 오르는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여전히 황제의 이목이고 가노이다. 대다수의 태감은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의 공포를 진정 느낀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반드시 피육의 고통을 겪는데, 그리고 심하면 목숨도 가볍게 잃을 수 있다.

 

서태후는 비록 이연영을 총애했지만, 그녀는 태감을 곤장쳐서 죽이도록 명령한 바도 있다. 그 수도 아주 많다. 그녀의 눈에 태감의 생명은 그의 발아래 있는 개미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다.

 

명,청 양대에 태감의 수량과 영향은 한,당에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명나라에는 태감이 1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궁녀가 9천명이나 된다. 자금성은 하나의 소도시 인구만큼 된 것이다. 이들이 모두 황제 1사람을 모시기 위해 이처럼 거대한 인력을 움직인 것이다. 바꾸어 말 하면 한 남자가 황제가 되면 1만명 남자의 남자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황제는 충분히 이기적이다.

 

청왕조는 전왕조의 교훈을 받아들여, 환관세력에 대하여 압제한다. 더 이상 어느 태감이 병권을 쥐는 일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태감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가경제때, 태감의 수량이 약간 많았다가, 그 후에 점차 감소한다. 대체호 2천명가량을 유지한다(원명원, 승평서등의 곳을 포함하여).

 

만청에 이르러, 궁내 및 바깥의 각처에 있는 태감은 다 합쳐서 단지 1500여명가량이었다. 태감은 줄어들어도,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매년 입궁해서 잡역을 담당하는 "쑤라(蘇拉)"가 근 만인/차에 이른다. 임시고용자를 둔 것이다. 이것은 현명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태감도 힘든 일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지키거나, 타경(打更)하거나, 밥을 하거나 청소를 했다.

 

북경의 사묘는 명청양조에 가장 흥성했다. 특히 명나라때, 일부 태감은 이런 '공익사업'에 참여한다. 속속 자금을 내서 사묘를 건설하거나 재건했다.

 

예를 들어, 안정문내의 자륭사는 어마감태감 고훈, 장진등이 돈을 내어 지었다. 그리고 만력황제의 제사(題辭)를 청해서 얻었다; 위공촌의 대혜사는 정덕8년(1513년) 사례감태감 장웅이 만들었고, 16미터에 달하는 구리로 만든 천수천안관음보살입상을 모셨다; 좌안문 밖의 홍선사는 정덕연간에 위(韋)씨성의 태감이 돈을 내어 지어서, 교외의 별장으로 삼았다; 그래서 속칭 '위공사(韋公寺)"라고 불렀다. 그는 설마 사묘도 부동산으로 생각해서 투자한 것인가?

 

그리고, 구 고루대가(鼓樓大街)의 광제사는 성화원년(1465년) 신궁태감 유가림이 주택을 철거하고 사들여 만든 것이다; 경서의 숭화사는 태감 오공량이 돈을 내어 만든 것이다 역시 황제게 글을 쓴 간판이 있다; 법해사는 5조를 모신 노태감 이동이 영종 정통4년(1439년) 돈을 내어 만든 것이다. 영종황제가 '토목보의 변'을 당하게 만들고 오이라트의 기병에게 포로로 잡히게 만들었던 환관 왕진도 후원자중 하나였다(청동불종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향산 벽운사이다. 원래 정덕연간 어마감캐감 우경이 돈을 내어 확장한 것이다. 그리고 절의 뒤에는 묘지를 남겨둔다. 사후에 자신이 묻힐 장소로 삼은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권신 위충현도 이 풍수길지를 마음에 두어서, 빼앗아가 묘지로 삼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규모와 사치정도가 황릉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그가 신패명렬(身敗名裂)하면서, 이 계획도 파탄난다. 그는 단지 벽운사에 미완성품만 남겨둔다.

 

위에서 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명나라때 태감은 돈이 많았다. 다음으로, 이 일부 '먼저 부유해진' 태감은 '희망소학'같은 것에 돈을 내어 지은 적은 없다. 그저 사묘를 짓는데만 열중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 마음 속의 '희망공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영욕관념, 생사관념과 관련이 있을까? 당연히 이것은 그저 필자 개인의 추측일 뿐이다.

 

명나라 황제는 태감을 중용했다. 영락연간에 설립한 황가특무기구 동창은 환관에게 넘겨주어 장악하게 하고서, 황상은 마음을 놓는다. 성화13년(1477년)에는 다시 규모가 더욱 큰 서창을 만든다. 그리고 대태감 왕직이 직접 통제한다. 태감은 특무의 우두머리가 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명조삼대해(明朝三大害)"는 창(廠), 위(衛, 금의위) 및 환관이다. 명무종 정덕초기, 환관 유근은 조정을 통제하고, 동창,서창을 이용하여 문무대신을 감시하여 경성일대는 백색공포에 시달린다.

 

몇 년 후, 동창 서창은 위충현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위충현 본인은 요리사이다. 명희종에게 밥을 지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다. 나중에 명희종의 유모 객씨와 좋아지낸다. 그리하여 청운직상(靑雲直上)하여, 권세가 날로 강해졌다. '구천세'로 자처한다.

 

그의 권력은 어느 정도로 컸을까? 예를 들어보면 천계3년(1623년)에만, 그는 성지를 거짓으로 만들어 선시(選侍) 조씨(趙氏), 장유비(張裕妃), 풍귀인(馮貴人)등 여러 비빔을 죽인다. 심지어 장황후에 대하여깢 몰래 독수를 펼친다.

 

그는 심지어 원나라때 만든 향산 벽운사를 묘지로 정하고 대거 토목공사를 벌인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한 대신이 이 전조태감이 생전에 벌여놓은 건축규모에 경탄한다. 그리하여 강희제에게 보고한다: "신이 향산 벽운사를 지나는데, 위충현이 지은 분묘를 보았습니다; 비석이 우뚝 솟아있고, 묘도가 깊고 넓었습니다. 옹중이 조관을 쓰고 둘글게 늘어서 있고, 양과 호랑이가 낙타 말들과 어울려 있습니다. 제작규모가 마치 능침과 같았습니다."

 

호화정도는 제왕릉과 비견할 정도였다. 이를 보면 위충현이 권력을 좌지우지할 때 얼마나 지위가 혁혁했을지 알 수 있다. 그저 위충현은 자신이 파놓은 호화로운 분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음 황제인 숭정제가 즉위하자, 즉시 그를 조정에서 축출한다. 그는 유배가는 도중에 목을 매어 자살한다. 죽은 후에는 오마분시된다. 그리고 효수시중(梟首示衆)된다. 자신에게 존귀한 능원을 남겨놓았던 사람이 완전한 시신조차 남길 수 없게 된다.

 

건륭황제는 향산에서 성감사에 간다. 연도에 명나라태감의 묘가 수도없이 많은 것을 보고는 탄식한다: "서산의 아래에 명나라때의 환관들 묘가 아주 많다. 전횡이 이에 이르렀으니 국사가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나중에 서태후가 환관 이연영을 총애할 것이라는 것을 아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불가일세이던 많은 태감들의 묘는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유독 경서 마석구(磨石口)의 전의묘(田義墓)는 북경 현존의 소량 태감묘중 가장 완벽한 하나이다. 필자는 일찌기 한 사학자를 따라 가본 바 있다. 묘원의 입구에는 2개의 화표(華表)가 서 있다. 신도의 양측에는 문무대신의 석상이 있다. 비금주수(飛禽走獸)를 조각한 한백옥 영성문을 지나면 황색유리기와의 비정(모두 3개)이 있다. 비정내에는 만력황제가 전의에게 써준 도칙유(道勅諭)와 이부상서 심일관(沈一貫)이 쓴 묘비명이 있다.

 

나는 그 사학자에게 전의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만력황제게 총애했던 충군애국의 좋은 태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천지간에 인심은 무형의 저울이다. 만사와 만물을 각각 보응을 받는다.

 

청나라때의 대태감 안덕해는 서태후의 총애를 받아 한 때 권력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마찬가지로 선종하지는 못한다. 그는 서태후의 총애를 믿고 공친왕에게도 득죄(得罪)한다. 공친왕은 산동순무 정보정에게 밀명을 내려 '위제출궁(違制出宮)'의 죄명으로 그의 관할구역내를 순행하던 '안공공'을 그 자리에서 처결해버린다. 선참후주(先斬後奏). 서태후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후임자인 이연영은 총명했다. 서태후와 광서제의 사이에서 양면파로 양쪽 모두에 잘 보인다. 대통관이 될 때까지 계속 그러했다. 그는 원래 소두방(梳頭房) 태감이다. 서태후에게 머리모양을 설계해주어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는 자금성의 대관가가 된다. 이치대로라면, 태감의 최고관직은 4품 '궁전감독영시(宮殿監督領侍)'이다. 이연영은 파격적으로 2품대총관으로 발탁된다. 이는 선제들의 법도를 깨트린 것이다. 이를 보면 서태후가 그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사료에 이런 기재가 있다: "광서 이십년 정월 초하루, 상교황단(上交黃單), 봉주필(奉朱筆), 저수궁삼품화령총관(儲秀宮三品花翎總管) 이연영(李蓮英), 상가이품정대(償加二品頂戴)"

 

이연영은 효과를 보면 그칠 줄 아는(見好就收) 이치를 잘 알았다. 나이가 많아지자, 서태후에게 사직을 청한다. 궁을 나서서 노년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서태후는 그를 만류하기 어려운 것을 보자, 중남해의 화방(花房)을 그의 별장으로 준다. 기실 이때 이연영은 이미 적지 않은 검은 돈을 챙겨놓았다. 그래서 시정의 부자로 여유있게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전날, 그는 돌연 집안에서 사망한다. 사후의 욕을 먹는 것에 대하여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연영은 태감중 가장 교활한 인물이다. 이 자금성내으 늙은 여우이다.

 

1924년, 마지막 어린 황제 애신각라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난다. 나무가 쓰러지자 원숭이들은 흩어진다. 태감들도 민간으로 흘러들어간다. 각자 자신의 살길을 찾는다. 황제까지 무너졌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을 것인가(皮之不存, 毛存焉附)?" 이때부터, 태감은 중국에서 사라진다.

 

고궁을 참관하면 각 궁문의 부근에 줄줄이 늘어선 작은 집들이 황제의 기세가 넘쳐나는 삼대전을 받쳐주고 있다. 가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 작은 집은 태감들이 살던 곳입니다. 아, 태감들의 집단기숙사가 원래 이런 모양이었다. 필자는 걸어가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에는 광선이 너무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곰팡내가 날 뿐이다. 봉건시대의 썩은 냄새이다. 필자는 기침을 한다.

 

1861년 함품제가 병사한 후, 서태후는 조정을 48년이나 장악한다. 수렴청정이라는 명목의 태후는 실제로 이미 대권을 독점한 여황이다. 비록 중국역사상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 여황은 무측천 한 명이지만, 서태후가 집권한 기간은 무측천과 비슷하다. 다만 비양발호의 정도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이금왕(李金旺), 손일영(孫一影)이 공저한 <여와 - 융유>라는 책을 보면, 서태후는 권력욕이 아주 강한 여인이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자신의 권위와 존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친골육, 황친국척을 불문하고, 일률적으로 순아자창(順我者昌), 역아자망(逆我者亡)으로 절대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예허나라씨 자희는 잔인했고, 의심이 많았고, 희노가 무상했으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감, 노비를 함부로 죽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서태후의 곁에서 당번을 서면 모두 마음을 졸여야 했다. 화가 돌연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그의 심복태감이라 하더라고 모두 표면적으로 비궁굴슬(卑躬屈膝), 명령은 무조건 따르고, 시키는대로 했으며, 자신의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태감총관 이연영은 서태후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다만, 서태후가 죽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이연영을 찾았을 때, 이연영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불야를 아주 존경한다. 영원히 태후의 음용소모(音容笑貌)를 기억하고 싶다. 태후의 마지막 고통스런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며 찾아가는 것을 거절한다. 서태후가 죽자, 이연영은 대량의 금은보화를 훔쳐서 도망친다.

 

그 시대에 상인이 장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계에 배경이 있어야 한다. 고관대작이 뒤를 받쳐주어야 했다. 전통점포 서림상(瑞琳祥)은 대권을 장악한 청궁총관대감 이연영에게 의탁한다. 이연영이 서태후에게 의탁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자 생존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난세에 생존하려면, 발전하려면, 그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마침 이연영 대총관은 궁궐 밖에서 '자류지(自留地)'를 개척하고자 했었으므로, 서로 의기투합하였다.

 

1890년, 이연영은 통크게 백은십여만냥을 서림상의 장부에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대주주가 된다. 그저 앉아서 이익을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는 자주 주인의 신분으로 자처해서 점포를 시찰하곤 했다.

 

"점포의 아래 위 사람들은 시간이 오래 흐르자 이연영을 더 이상 총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직접 '장궤(掌櫃)"라고 불렀다. 이연영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연영은 궁중에서 총관대감의 권세로 뇌물을 받고 직접 관직을 주지는 않았다. 서림상을 통하여 우연히 관직을 팔았다. 예를 들어 후보경관 제서경은 서림상과 교분이 있었다. 하루는 찾아가서 점포에 들어간 후 뒷방으로 들어가니 이연영이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제서경은 황공스러워 고수의 예로 참배했다. 사후에 맹장궤에게 원망하며 말했다: "총관이 있으면 왜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손발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지 않느냐. 맹장궤가 웃으며 답했다: '너는 꿈에도 관직을 갖고 싶어했다. 내가 대신 말해주면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연영은 서림상의 부탁을 받자 제서경에게 호북성 한양부지부의 관직을 준다."

 

이를 보면 서림상은 이연영의 궁밖의 사무실이다. 이렇게 차천폐일(遮天蔽日)의 보호산이 있으므로, 서림상은 업계내에서 자연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닐 수 있었다. 다행히 서림상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는 전통 비단점으로 남을 수 있었다. 가짜나 열악한 상품은 팔지를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