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를 망하게 한 닭 한 마리.

중은우시 2013. 12. 21. 20:33

글: 황일농(黃一農)

 

 

 

명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대포를 만들었다.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은 화약을 발명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폭죽을 만들었다." 사실상, 중국은 명말청초때, 서학동점(西學東漸)의 영향으로,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중국장인의 탁월한 혁신정신이 결합하여 일찌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대포를 만들었다. 다만, 이 짧은 휘황은 청나라 중후기에 점차 쇠락한다.

 

명나라말기 중국인은 잠수장비도 없이 서방의 침몰한 선박에서 대포를 건져올린다.

만력47년(1619년), 명군은 사르후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참패한다. 이때 서학에 정통한 서광계(徐光啓)는 조정의 중용을 받았고, 그는 적극적으로 서양선교사에게 화포에 관한 지식을 학습한다.

 

후금대군의 주요무력은 기병과 보병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명나라는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 "홍이대포(紅夷大砲)". 이 명칭의 유래는 이 대포는 네덜란드인이 중국동남연해일대를 침범할 때 대량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홍이대포의 설계는 명나라가 이전에 사용하던 "대장군포(大將軍砲)"보다 많이 발전되었다. 대장군포의 외형은 큰 철관(鐵管)과 같았고, 포신에 쇠로 된 테(鐵箍)를 더해서 가슴이 다치는 것을 막았다. 홍이대포의 앞부분 관벽은 비교적 얇고, 뒤쪽의 관벽은 비교적 두껍다. 그래서 폭발시의 충격력을 견딜 수 있다. 포의 곁에는 두 개의 '철이(鐵耳)'가 있어 포신각도를 조정할 수 있었고, 준성(準星)과 포문(砲門)이 있어 사격을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명나라 천계6년(1626년), 원숭환은 "영원대첩"을 거둔다. 홍이대포의 공이 적지 않았다. 영원성에는 11문의 홍이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누르하치대군 11만명을 격패시킨다. 그리고 누르하치 본인에게도 상처를 입혔고, 결국 우울하게 죽는다.

중국의 홍이대포는 어디에서 왔는가? 가장 먼저 동남연해의 유럽상선에 있던 대포를 건져 내왔었다.

 

만력48년(1620년) 구월, 네덜란드 해선이 광동 곡강의 근해에서 침몰한다. 지방당국은 사람을 보내 바다에서 건져올렸다. 그 당시에는 잠수장비도 없었던 시대이다. 사람들이 건져내는 방식은 상당히 교묘했다. 그들은 먼저 한 척의 큰 배에 모래와 돌을 가득 채운 다음 물 속으로 깊이 잠기게 했다. 그 후에 잠수해 들어가서 쇠줄을 대포의 철이에 걸었다. 그후 모래와 돌을 바다에 버렸다. 배의 부력으로 대포와 침몰선을 분리시키고 권상기(호이스트)로 감아올렸다. 3개월간의 노력을 거쳐, 중,소총 이외에 대총 36문을 건져 올린다. 그중 24문을 북경으로 운송하였다. 다음 해, 다시 또 다른 두 척의 침몰선에서 많은 대포를 건져 올린다.

 

이들 침몰선의 "대총(大銃)"중에서 일부는 영원성의 성벽에 설치되었고, 후금의 팔기철기군을 격패시킨다.

선진적인 홍이대포는 모조리 건져올린 것이 아니다. 천계4년(1624년) 중국남방은 이미 홍이대포를 주조하기 시작한다. 호문 백사순검 하유(何儒)는 14문을 주조한다. 그중 몇 개는 영원성으로 가져간다. 이렇게 신속하게 양산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주철기술이 우수했던 때문이다.

 

지금 요녕성박물관에 보관된 "정료대장군(定遼大將軍)" 대포는 오삼계가 숭정15년(1642년) 자금을 내어 주조한 것이다. 전체 길이는 약 380센티미터이고, 내부직경은 10센티미터이다. 아마도 중국대륙에 현존하는 홍이대포중 가장 긴 것일 것이다.

계속 모방해서 만드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장인들은 대포주조기술을 개선한다. 철심동체주조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교묘하게 구리의 용융점(1083도)이 철의 용융점(1538도)보다 낮다는 물리적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철태가 냉각한 후에 니형주조법 혹은 실랍법으로 형틀을 만든다. 그리고 구리를 부어 벽을 만든다. 이전의 철포나 동포와 비교하면 이런 신형화기는 관벽이 얇을 뿐아니라, 무게도 가볍고, 비용도 적게 든다. 그리고 비교적 오래 쓸 수 있다.

북경 팔달령 중국장성박물관에는 숭정원년(1628년)에 만든 전장골당홍이화포 1문이 있다. 포구에서 보면 관벽이 철심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준성, 조문(照門)과 철이도 있다.

 

홍타이시(청태종)는 화포로 큰 피해를 입은 후, 한족 장인을 모으기 시작한다. 결국 명군이 수준을 뛰어넘는 대포를 만들어낸다. 북경수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숭덕8년(1643년)에 주조한 "신위대장군"은 무게가 3600근이고 내부직경이 14센티미터, 전체 길이가 263센티미터에 달한다.

현재 일반 야금주조사의 교과서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미국장교 Thomas J Rodman이 남북전쟁때 발명한 일종의 대포주조의 새로운 방법은 가운데를 비우는 모형을 채용하여, 그 가운데 냉각수를 넣고, 쇠로 만든 포관이 안에서 밖으로 응고하게 한다. 이렇게 주조한 대포는 더욱 크고, 내구도가 이전의 5배 내지 10배에 달한다. 철심동체의 주조법은 비록 두 가지 금속을 사용하지만, 원리는 Rodman의 방법의 원형이다. 단지 명왕조의 "정료대장군"은 Rodman보다 200년 앞섰을 뿐이다.

 

비록 명군이 홍이화포를 모방제작하는 것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조작방법은 당시 많은 명군 포수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6세기이래, 서방과학자는 이미 수학지식을 이용하여 간단하고 실용적인 측정기기를 많이 발명했다. 이것은 중국이 경험에 의존하여 화포를 발사하는 전통방식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이글 공구는 조준기술을 강화시키는 '포규(砲規)'를 만든다. 이것은 가장 최초의 계량자이다. 그것은 화포발사에 필요한 복잡한 수학과 물리지식을 간단한 표준자에 그려서, 사격목표에 대하여 정확한 거리측량과 각도정위를 진행한다. 그외에 '총척(銃尺)"도 있다. 이것은 포수가 신속하게 서로 다른 재질의 포탄과 서로 다른 구경의 포신에 장전해야할 화학량을 계산하도록 도와준다.

 

예수회 선교사는 이들 선진기술을 중국에 수입했고, 서광계가 가장 먼저 배운다. 그의 학생인 손원화(孫元化)는 숭정3년(1630년) 등래순무(鄧萊巡撫)의 직을 받는다. 그는 왕징(王徵), 장도(張燾)등 기독교신자인 관리 혹은 장수들을 기용하여 대량의 서양화기를 장비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군관 테이세리아 코레아를 우두머리로 하는 고문단을 채용한다. 총규, 총척 및 구도의(矩度儀)의 사용 및 탄약장전기술은 모두 손원화의 군대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훈련내용이었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명나라군대에서 부족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손원화의 부대는 서양식훈련을 받고 서방무기를 채용한 중국군대가 되었다.

 

닭 한 마리가 바꾼 명나라 운명

 

원래는 중시받아야할 이 정예부대가 마지막에는 한 마리 닭때문에 집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는 직접 명청군사역량의 차이를 불러온다.

숭정4년(1631년) 팔월, 홍타이시는 청나라병사를 이끌고 대릉하성(지금의 요녕성 금현)으로 진격한다. 손원화는 급히 부하 공유덕(孔有德)에게 명을 내려 팔백의 기병으로 전선에 증원가도록 명령한다.

이 부대는 비록 명을 받아 북상하였지만, 도중에 관청으로부터 물자조달을 받지 못했다. 오교(吳橋)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가 몰아치고 백성들은 모두 병사들을 겁내어, 속속 문을 닫고 시장을 걷었다. 한 사병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현지의 명문거족 왕상춘(王象春)의 닭 한 마리를 훔친다. 상대방은 공유덕에게 이 사병을 "천전유가(穿箭遊街)"하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군대의 불만을 산다. 그리하여 공유덕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오교병변을 일으킨다.

 

다음 해, 경중명(耿仲明)의 협조하에, 공유덕은 무리를 이끌고 등주(登州)를 점령한다. 테이세이라 코레아 및 그의 포르투갈 포수는 3명이 겨우 살아남는 외에 모조리 전사한다. 순무인 손원화는 반군에서 풀어주었지만, 결국 조정에서 참수한다. 서광계가 여러해동안 경영한 사업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그는 우울하게 세상을 뜬다.

숭정6년(1633년) 공유덕, 경중명의 두 사람은 후금에 투항한다. 홍타이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다. 홍타이시는 심양에서 친히 그들을 환영한다. 공유덕의 귀순은 후금으로 하여금 대량의 정교한 서양화기를 얻게 햇을 뿐아니라, 탄약제조의 모든 기술 그리고 조준지식과 도구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기보경,기병에 이를 적용한 후, 당시에 천하무적의 강병으로 성장한다.

 

청나라때의 화포기술은 고보자봉(固步自封)하여 점차 쇠락한다.

 

16세기말까지, 명나마람에 중국에 들어온 화포기술은 아직 서양과 같은 수준이었다. 다만 청나라정권은 강희22년(1683년) 전국을 안정시킨 후, 군사위협이 사라지자, 정부측은 화포를 점점 덜 중시하게 된다.

강희54년(1715년), 산서총병 김국정(金國正)은 글을 올려 신형 자모포 22문을 만들어 각 군영에 보내어 훈련할 수 있게 하겠다고 건의한다. 그러나 황제는 지방관이 임의로 새로운 대포를 연구제조하는 것을 엄금한다. 옹정연간, 청나라조정은 아직 성경(지금의 심양), 길림과 흑룡강 및 각 성에 있던 자모포를 모조리 북경으로 거둬온다.

화기지식기술의 전승과 단열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난다. 가경4년(1799년), 조정은 160문의 명나라 "신추포"를 개조하고 "득승포"라고 이름을 고친다. 시험발사후 그 사정거리가 옛날 화포만 못해졌음을 발견한다.

 

아편전쟁때, 영국군은 "유산탄(榴散彈, Shrapnel Shell)"이라는 구형공심폭탄을 사용한다. 이 탄의 안에는 작은 탄과 화약을 채운다. 그리고 포탄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화약을 폭발시킨다. 내부에 들어있는 작은 탄이 흩어지게 하여, 살상력이 아주 크다. 그러나 당시 실심원탄을 쓰던 중국군대는 '깜짝 놀라서 신기해 하지만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랐다." 얼마후, 임칙서는 비록 유산탄을 모방하여 만드는데 성공하지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찌기 강희29년(1690년)에 만든 "위원장군포"에는 개념이 비슷한 포탄이 배치된다. 아쉽게도 위원장군포와 그 포판은 계속 무기고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도광,함풍황제의 교체기에, 중국군대는 명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방열강의 견선리포의 도전에 직면하여 전혀 견디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