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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청시대 광동의 흑사회(黑社會)

by 중은우시 2013. 8. 5.

글: 이개주(李開周) 

 

명말청초, 광동사람 굴대균(屈大均)은 이런 말을 한다: "월중다도(粤中多盜)"

월중은 바로 광동을 가리킨다. 다도는 범죄단체가 많다는 말이다.

 

명청시기 "월중다도"했다. 그럼 어떤 범죄단체들이었는가? 명청빌기와 광동방지를 뒤져보면, 범죄분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산적(山賊)이다. 이들은 산림 속에서 산채를 짓고 모여살며, 상인들과 여행객의 재물을 강탈하고, 시시때때로 산을 내려와 주변의 주민들을 괴롭혔다. 산적은 영안(永安)이 가장 많았다. 영안은 지금의 하원시 자금현이다.

둘째는 수비(水匪)이다. 이들은 바다의 섬이나 강의 배에 숨어지내며, 관염(官鹽)을 빼앗고, 사상(私商)을 죽이며, 부두를 장악하고 향료(香料)를 밀수했다. 수비는 순덕(順德)이 가장 많았다.

이들 두 가지 유형의 범죄단체들은 적으면 수백면, 많으면 만명이 넘었고, 세력이 가장 컸을 때는 성을 공격해서 빼앗기도 하였으며 영남(嶺南)지방에서 칭패했다.

 

산적과 수비이외에 두 가지의 규모가 비교적 적고, 조직이 비교적 느슨하며, 유동성이 아주 강한 범죄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봉양방(鳳陽幇)"과 "풍인방(瘋人幇)"이다.

 

봉양방은 아주 큰 특색이 있다. 방회의 구성원이 모조리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조리 안휘 봉양에서 온 여자들이다. 어느해부터인지, 이들 여자들은 봉양의 고향에서 구걸하며 이쪽으로 왔다. 신회(新會) 일대에서 자신의 방회를 조직한다. 그녀들은 거지의 신분으로 자신을 감추며, 주,현을 넘어다니며 아동유괴,매매를 하여, 사회에 큰 위해를 끼친다.

 

풍인방도 특색이 있다. 그 방회구성원은 모조리 어떤 전염병을 앓는 환자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전염병을 앓았는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어찌되었건 이 방파는 훔치지도 강탈하지도 않고, 칼을 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몸의 병으로 사람들을 위협했다: "빨리 어르신에게 돈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집에서 움직이지 않겠다. 너희 온 집안사람들에게 병을 옮길 때까지." 아주 개성이 있었다.

 

이상의 4가지 범죄단체는 모두 상대적으로 고정된 조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영안일대의 산적은 규모가 비교적 컸고, 통상 10인으로 1 "전(錢)"을 구성하고, 매 10전으로 1 "냥(兩)"을 구성하며, 매 10냥으로 1 "근(斤)"을 구성하고, 매 10근으로 한 "도(都)"를 구성했도, 전, 냥, 근, 도, 도는 백은의 화폐단위이다. 우리가 현재 말하는 푼, 각, 원과 마찬가지이다. 산적들은 화폐단위로 조직의 명칭을 썼는데, 이는 군대의 반, 배, 연, 영, 단과 다르고 아주 창의적이었다.

 

<수호전>을 보자. 거기의 양산호한은 조직이 있다. 아래에는 자잘한 인물들이 있고, 위로는 여러 두령이 있으며, 가장 위에는 대채주(大寨主)가 있다. 여러 두령들은 서열이 있다. 명청시기의 광동산적도 이와 유사했다. 최하층은 "산자(散仔)"이고 수호전의 자잘한 인물에 해당하며, 산자의 위는 "로(老)"인데, 수호지의 여러 두령에 해당한다. 그 위에는 "노도(老都)"가 있는데, 수호전의 대채주에 해당한다. 여러 두령인 "노"들은 서열이 있어, 이로(二老), 삼로, 사로, 오로...이렇게 해서 십로에서 끝이 난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고정된 조직을 가지고 장기간 한가지 혹은 여러가지 불법활동에 종사하며 경제이익을 주요목표로 하는 범죄집단을 '흑사회'(조폭)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용어정의를 쓴다면 상술한 4가지 범죄단체는 기실 모두 흑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듣기 좋은 개념으로 말하자면 그들을 "흑사회성격을 지닌 범죄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흑사회도 좋고, 흑사회성격을 지닌 범죄조직도 좋다. 일반적으로 모두 그들 자신의 언어계통이 있다. 속칭 "흑화(黑話)"라는 것이다. 명청시기 영안일대의 산적은 강도를 "간마(赶馬)"라고 불렀다. 납치를 "타시(打柴)"라고 부르며, 도둑질은 "견백선(牽白線)"이라고 부르고, 관리나 관병은 "수(水)"라고 불렀다. 관리나 관병을 매수하는 것을 "매수(買水)"라고 불렀다.

 

만일 명말청초의 광동산길을 걸어간다면, 뒤에서 손에 도끼와 끈을 쥐고 문신을 한 사내가 와서 "나무러 간다(타시)"라고 한다면 너는 절대로 그가 진짜 나무를 하러 가낟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너를 납치하려고 하는 것이니 빨리 도망쳐야 한다.

 

산적은 납치를 하지만 수비도 납치를 한다. 봉양방과 풍인방도 '장사'가 잘 안되면 하는 김에 납치를 하곤 했다. 그들이 당신을 데려가면 먼저 한바탕 두들겨 팬다. 그후에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라는 서신을 쓰게 한다. 만일 돈이 요구한 때에 보내오면, 너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만일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너는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해외에 노비로 팔려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참혹하게 살이 발려져서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다.

 

명나라후기의 광동경내에 죽은 시신을 납치하는 조직이 나타난다. 즉,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시신을 가져가는 것이다. 어느 사장이 죽었고, 어느 묘원에 묻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바로 가서 파내어가지고 숨겨둔다. 그후에 그의 아들에게 말을 전한다. 얼마의 돈을 내라고. 고대인들은 충효를 중시했다. 부친의 시신을 누가 훔쳐가게 되면 어찌되었건 돈을 써서 찾아와야 한다. 그래서 죽은 자의 가족들은 집안이 망하게 되고, 시신을 납치해간 흑사회두목은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숭정연간에, 황양 선생이 있었다. 부모가 모두 죽었는데 ,그가 막 부모를 매장하자마자, 흑사회에서 시신을 훔쳐간다. 황선생은 낼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흑사회에 서신을 쓴다: 너희가 부모의 시신을 돌려주면, 그 대신 내가 너희에게 잡혀가겠다. 납치자들은 그것도 괜찮을 생각이라고 여겨, 시신을 돌려주고 황선생을 데려간다. 이런 일이 지금이라면 동화수준이다. 그게 누구의 시신이건 도둑질하려면 하라고 하고, 경찰에 신고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더구나 돈을 내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며, 산사람을 주고 바꿔오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오늘 날에는 흑사회에서 산 사람만 납치하지 죽은 사람은 납치하지 않게 된 것일 것이다.  

 

흑사회는 납치외에, 강도도 한다. 평민들은 약간만 반항하면 목숨을 빼앗아버린다. 명나라 만력년간에서 청나라 건륭연간까지, 광동의 게양, 하원, 동관, 해풍, 영안 등지에는 흑사회가 창궐했고, 자주 참혹한 멸문사건이 벌어지고, 가산을 모조리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일부 지방의 주민은 흑사회를 막기 위하여, 작은 마을을 합쳐 큰 마을로 만들고, 마을의 바깥에 높은 담장을 쌓기도 했다. 이를 "위(圍)"라고 부른다. 다만, 이런 것만으로는 가산과 생명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명나라 융경년간에만, 영안일대에는 근 80개의 "위"가 산적들에게 파괴되고, "위"안의 양식, 가축, 돈과 재물, 옷감등을 산적이 가져가고 십여만의 평민이 피살당했다.

 

강도이외에, 당시의 흑사회는 광산채굴, 부두운송, 향료무역에도 간여한다. 독점경영으로 이익을 취했다. 이뿐아니라, 그들은 향촌이 사무에도 관여했고, 무력으로 민사분쟁을 해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경제적 보수를 받았다. 예를 들어, 옹정5년, 순덕의 능(凌)씨성의 주민이 이웃주민과 건물부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는데, 반년동안 소송을 하며 적지 않은 돈을 썼지만, 관청에서는 합리적인 판결을 내려주지 않았다. 능씨성의 주민은 흑사회에서 나서달라고 부탁하고, 한밤중에 이웃집에 불을 질러, 이웃집이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렇게 하여 부지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흑사회는 명청시대의 광동에 큰 상처를 입힌다. 주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경제발전을 저해했다. 많은 정도로 지방정부의 위신도 떨어뜨렸다. 그래서 관방에서는 자주 단속활동을 벌인다. 당시 단속활동의 수단은 주로 무력소탕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좋지 못했다. 왜 그런가?

 

"관병을 보내어 소탕하려고 하면, 관병이 그들의 일당인 경우가 있고, 혹은 사병을 모집하여 소탕하려고 하면 모집된 사병이 바로 그 일당인 경우가 있었다." 흑사회는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단속활동을 벌일때마다 관병이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관병과 토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옹정9년 혜주에서 병력을 보내어 흑사회를 소탕하고자 하는데, "사병들이 그 기회를 틈타서 약탈을 했고, 주민을 도적이라고 하였다." 즉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백성들을 죽이고는 도적을 죽였다고 공을 보고한 것이다. 이들은 흑사회보다도 더 흑사회같았다.

 

그외에, 지방관들도 흑사회를 소탕하는데 힘을 쓰지 않았다. 이유는 세 가지 방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 흑사회는 매년 지방관에게 돈을 보낸다. 탐관들은 "매년 천금을 받고 그들을 놔두며 죄를 묻지 않았다.' 일부 하층간부들 예를 들어 "현의 영리, 향의 순간도 왕왕 그들의 돈을 받고 포용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일부 관리에 있어서, 흑사회소탕실적이 높을 수록, 현지의 치안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으로 되어, 오히려 승진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흑사회를 소탕하는 것보다 그들은 오히려 상하를 속여서 태평성대를 가장하는 편이 나았다. "내지에서 도(盜)로 신고하면 관청에서는 절(竊)로 바꾸는 경우가 많닸다," 즉, 흑사회에 의한 도적임에도 일반적인 도둑질로 만들어 사건을 종결해버리는 것이다.

 

셋째, 당시 광동의 대부분지역은 경제가 낙후되어, 백성들에게 돈이 없었다. 정부에서 세금을 거두기가 어려웟다. 납세자들이 세금을 착실하게 내게 하기 위하여, 정부는 흑사회의 역량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굴대균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목민관이라는 자들이 도적을 오히려 이익도구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