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서주왕릉(西周王陵)은 왜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13. 11. 10. 11:28

글: 유준용(劉俊勇)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묘장의 변화는 사회분층과 문명서광의 출현을 반영한다; 상나라의 묘장은 선명한 계급제도를 보여준다. 왜 지금까지 서주왕릉으로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을까? 서주의 묘장은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 예제는 어떻게 발전하고 완비되었을까?

 

주왕릉은 불봉불수(不封不樹)하여, 찾는데 곤란하고 이견이 많다.

 

상나라때의 왕릉은 이미 하남 안양 은허의 서북강으로 확정되었다. 서주왕릉은 어디에 있을까? <주역>,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의 왕릉은 불봉불수했다. 즉, 땅위에 아무런 명백한 흔적도 없고, 나무도 심지 않았다. 이것은 고고학자들에게 여러가지 곤란을 가져온다. 청나라 건륭연간에, 당시 섬서순무로 있던 필원(畢沅)은 고증을 통하여 주원(周原, 지금의 섬서성 보계 부풍현 및 기산현의 접경지역의 북부)에서 전해져 오는 주문왕 희창, 주무왕 희발, 주성왕 희송, 주강왕 희쇠 및 부근의 주목왕 희만, 주선왕 희정 그리고 주공단, 태공망, 노공백금등의 묘에 대하여 하나하나 비석을 세우고 비기(碑記)를 남겼다.  그러나 후인들은 고증에 대하여 이견이 많다.

 

해방후, 고고부서에서는 여러번 탐사하고 시굴한다. 주원 경내에서 발견된 대량의 서주묘장은 대부분이 중소형 장방형 수혈묘이다. 주왕조의 중요한 정치중심이자 종묘소재지인 주원에는 왕릉이 있어야 한다. 다만 여러해동안 고고학적 발굴을 해도 중대한 발견을 얻어내지 못했다.

 

2004년 2월, 관련부서는 주원유적지에 대한 일제조사를 실시한다. 이때 주공묘 풍경구에서 양주시기 최고등급의 대형묘장군을 발견한다. 국가문물국의 비준을 받아, 섬서성 고고연구소와 북경대학 고고문박학원이 공동으로 고고발굴단을 조직하여, 주공묘지구에 대한 대규모 조사, 찬탐(鑽探)을 실시하여 모두 9개의 4조묘도대묘(四條墓道大墓), 4개의 3조묘도대묘(三條墓道大墓)를 발굴한다. 그리고 차마갱(車馬坑) 13곳도 발견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9개의 4조묘도대묘와 4개의 3조묘도대묘는 주나라때의 왕릉일 것으로 판정했다. 왜냐하면 주왕(周王)만이 이렇게 많은 묘도를 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은 서주 13명의 왕이거나 주공단 및 그 자손일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전문가는 이 4조묘도를 지닌 묘장의 규모는 보편적으로 작아서,왕릉일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의견이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서주왕릉을 찾는데 극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살아서는 종족이 모여서 살고, 죽은 후에도 종족이 모여서 묻혔다.

 

현재 이미 발굴된 서주묘장제도는 기본적으로 상나라를 승계했다. 대묘이외에 절대다수의 묘는 장방형의 묘실이고, 묘도는 없다. 그 규모는 묘주인의 신분이 다름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다.

 

족장제(族葬制)는 서주제후국 묘장의 중요한 특징이다. 서주는 종법제도를 실시하여 종족관계를 강화한다. 사람들은 생전에 종족이 모여살았을 뿐아니라, 죽은 후에도 종족이 모여서 함께 묻혔따. 이렇게 하여 족장묘지제도가 성립된다. 즉 "공묘(公墓)"와 "방묘(방묘(邦墓)"이다.

 

소위 "공묘"는 천자 및 그와 같은 성을 가진 종족의 묘지이다. 즉, "왕의 묘역"이다. 소위 "방묘"는 나라의 서민묘지이다. 하남 준현 신촌 위국묘지는 '공묘'에 속한다. 그것은 8개의 대형묘를 주체로 하여, 중,소형묘 및 차마갱이 그 안에 산재되어 있다. 그리고 묘역은 현상을 타파하지 않았다. 이 대형묘는 위국후(衛國侯) 및 그 부인의 묘장이다. 주위의 중,소형묘는 위국국군의 종족구성원의 묘장이다. 이곳의 묘지 묘장은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묘의배열은 존비귀천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제후국 공실의 "공묘"이다.

 

섬서 장안 풍서 장가파 묘지는 현재 이미 756개의 서주묘장이 발굴된 것으로 공표되었다. 이들 묘장의 사이에는 거의 상호 관계를 타파하는 것이 없다. 즉, 그것은 동일시기에 이들 수량이 많은 소형묘장은 사전에 계획을 하여 배치된 것이다. 4개의 대묘를 중심으로 분포된 묘장은 정숙(井叔)가족묘이다. 여러 서로다른 세대의 정숙묘이다. 규모가 가장 큰 그 묘장은 아마도 제1대 정숙의 묘장일 것이다. 정숙이라는 사람은 서주의 청동기명문에 나타난다. 그중의 한 정숙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물정(曶鼎)"등 청동기 명문을 보면 주의왕 시대의 중신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발굴현황을 보면, 장가파 묘지에 매장된 것은 서주일대에 풍호에 거주한 정숙가족 및 그 이후 약간의 가족의 묘장이다. 즉 "방묘"이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주나라때의 관곽(棺椁)제도는 엄격한 등급이 있었다. 소위 "천자의 관곽은 칠중(七重), 제후는 오중, 대부는 삼중, 사는 재중(再重)". 전문가는 고고학적 발견과 결합하여 "천자관곽칠중"은 "삼곽사관(三椁四棺)"이고, "제후오중"은 "이곽삼관"이며, "대부삼중"은 "일곽이관"이고, "사재중"은 "일곽일관"이다. 고고학적 발굴로 문헌기재가 대체로 믿을만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주나라때 예제에 관한 규정은 천자는 구정(九鼎)을 쓰고, 제후는 칠정을 쓰며, 대부는 오정, 사는 삼정 혹은 일정을 쓴다. 동주에 이르러, 천자, 제후는 구정을, 경은 칠정을, 대부는 오정을, 사는 삼정 혹은 일정을 썼다. 궤(簋)는 정과 세트로 사용되었다. 이와 상응하게, 천자는 "구정팔궤"를 쓰고, 제후는 "칠정육궤", 대부는 "오정사궤", 사는 "삼정이궤"를 썼다. 하남 삼문협 상촌열에서 발굴된 괵국(虢國)태자묘는 주나라때의 묘이다. 배장된 것은 칠정이다. 괵국국군계묘에 배장된 것은 칠정육궤이다. 그 신분과 들어맞는다.

 

서주의 예제는 발전과정에 있었다. 서조초기에 이들 제도는 완비되지 않았었다. 최근 발굴된 호북 수주 엽가산 111호 대묘에서는 청동기가 합계 19정 12궤 출토된다. 이 대묘는 서주시기의 증후묘(曾侯墓)일 것이다. 주례의 규정에 따르면, 이 묘에는 칠정육궤만 넣어야 한다. 그러나 이 증후가 죽었을 때, 정을 넣는 제도가 최종적으로 형성되기 전이다. 그래서 초창기에 속한다. 서주중기에 이르러 예의제도는 확립되고, 춘추에서 전국초기에 이런 제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