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건란(趙建蘭)
약17살된 소녀의 유골에 35곳이나 상처가 나 있다. 그리고 사자의 사지의 뼈는 어긋나 있거나 빠져있지 않으면, 끊어져 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기괴한 상태를 이루고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녀를 죽인 흉기들 중 18개는 아직도 유골안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여전히 뼈속에 박혀 있어 빠지지도 않는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같은 참혹한 죽음은 국내외의 묘장자료에서 아주 보기드문 일이라고 한다. 잔혹한 징벌일까, 안면 공포의 제사일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잔인한 학살로 몰고 갔을까? 35곳의 상처는 또 누가 만든 것일까? 얼마전에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개최된 "반포유적지발견60주년 및 석흥방 선생 90세기념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이 수수께끼는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링커우촌(零口村)은 산시성 시안시 린통구(臨潼區) 동쪽에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나라 병마용에서 겨우 1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990년대, 린통-웨이난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산시성 고고연구원은 링커우촌에서 소규모의 고고발굴을 진행했다. 발굴면적은 470여평방미터로, 그중 회갱(灰坑)이 60개, 방지(房址)가 11개, 조갱(竈坑) 30개, 묘장 21곳(그중에 한묘와 전국묘가 포함되어 있다), 도요(陶窯) 1곳. 이번 발굴에서, 아주 보기드문 사전인골(事前人骨)이 발견되었고, M21이라는 일련번호를 붙였다. M21묘장의 형제는 장방형수혈식이다. 길이 160센티미터, 너비 60센티미터, 깊이 40센티미터이다. 묘갱은 불규칙하다, 가운데가 늘어나 있고, 크기는 시체보다 약간 큰 정도이다. "시신의 유골을 감정한 결과 우리는 이 것을 7300년 내지 7200년전의 연령은 15세 내지 17세인 여성유골로 확인했다." 이미 은퇴한 산시성 고고연구원 연구원이자, 당시 링커우고고대 대장인 저우춘마오(周春茂)의 말이다. "이전에 고고발굴에서 발견된 여성골격과 비교하면, 인체특징으로 볼 때, 그녀의 두개골은 동아시아 몽골인종에 비교적 가깝다."
만일 단순히 사전인(史前人)이라면 고고학자는 그녀가 뭐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산시는 문화재가 많은 성이므로, 수천년전의 인골을 발굴하는 것은 뭐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소녀의 유골은 보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출토시 촬영된 사진을 보면, 이 유골은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다만 두개골, 척추골, 늑골, 분강골에 모두 상처가 많이 남아 있었다. 4지의 뼈에도 여러 곳에 골절이 있고, 왼손의 뼈는 없었다. 유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골촉(骨鏃, 화살촉), 골차(骨叉, 동물뼈로 만든 것), 골계(骨筓, 비녀)드 여러개의 뼈를 갈아만든 흉기이다. 이들 골기(骨器)가 남긴 뼈의 손상은 35곳에 달했다. 그중 여러곳은 모두 치명상이다. 그외에, 죽은 자의 흉강과 분강내에서는 18개의 날카로운 골기가 발견되었다. 발견되었을 때, 어떤 골기는 여전히 이 여자아이의 뼈 속에 박혀있었다. 그중 4개의 골기는 음도에 삽입되어 있었다.
손상의 대소와 형상을 보고,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추단한다. 유골의 35곳의 손상중에 29개가 날카로운 흉기로 입은 상처이다. 모두 골차, 골촉, 골계등의 날카로운 무기로 입은 상처이다. 나머지 6곳은 각각 상하지의 골관절부위의 손상이다. 아마도 어떤 둔기로 입힌 상처인 것같다. 없어진 왼손 뼈는 아마도 칼에 잘린 것같다.
생산력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사전시기에, 도대체 어떤 모양의 무기이기에 이렇게 뚫고들어가는 힘이 강할 수 있었을까. 동물의 뼈로 갈아만든 날카로운 골기가 인체를 뚫고 들어가서 뼛속에 박힐 수 있을 정도였을까. "현장에 남겨진 골촉과 시신을 추가로 검사측정해본 결과, 초보적으로 사자의 손상은 화살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저우춘마오의 말이다.
만일 사자의 몸의 골손상이 모두 화살로 인한 것이라면 왜 그녀의 몸에 남은 골기는 3개의 서로 다른 형태일까. 어떤 것은 그저 뼈에 상흔만을 남기고, 어떤 것은 지금까지도 뽑을 수가 없을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고고전문가는 말한다. 신석기시대에는 아직 금속제련을 몰라서, 날카로운 골기제작은 쉽지가 않았고, 아주 진귀했다. 절대로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손에 든 골기를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설사 쏘아버린 화살촉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모조리 회수했다. 그것이 하나의 화살촉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유골내에 남은 골기는 무엇인가? 사자의 유골에서 뽑아내지 못한 4개의 골기중 3개는 골계이다. 골계를 발사하는 무기는 무엇인가? "이렇게 큰 관통력이 있는 무기는 일반적인 궁이 아니다. 개인의 투척력만으로는 뼈를 뚫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원시적인 노(弩)와 같은 무기일 것이다." 저우춘마오의 설명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노는 궁에서 발전한 무기이다. 주로 궁, 노비(弩臂) 및 노기(弩機)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발사되는 화살은 활과 비슷하지만, 활줄의 역량이 더욱 크기 때문에, 그리고 노비에는 노조(弩槽)가 있어서, 화살이 발사된 후 관통력에서나 정확도에서나 모두 화살보다 훨씬 뛰어나다.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고고팀은 발견했다. 기존의 활에 나뭇가지를 더하여, 이를 노비로 삼고, 다시 골기를 갈아서 노기를 만들면 이 몇 가지 재료만으로 가장 간단한 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만일 재료와 기술로 보면, 7000여년전의 사전인류도 해낼 수 있었다. 다만 신석기시대에 "노의 존재를 증명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현대인의 이해와 상상으로 이렇게 추론할 수밖에 없다: 만일 골계를 단지 장식품이라면 동시에 무기로 만들 수도 있었따. 그리고 사람의 몸에 이렇게 깊이 박히게 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노와 같은 강력한 무기로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저우춘마오의 말이다.
유골에 이렇게 많은 상흔이 있고, 또한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 있다. 이런 여러가지 현상을 보면, 이 소녀는 "여러명에 의하여, 아마도 근 백명에 의항 포위당하여 폭력을 당해 죽은 것이다." 저우춘마오는 말한다: "신체손상의 각도로 보면, 배후에서 찌른 골기의 상처는 없다. 이를 근거로 하면 죽은 여자아이는 생전에 큰 나무에 묶여있었던 것같다. 혹은 두려움에 뒤로 큰 돌덩이를 향하여 물러나다가 사살된 것이다." 7천여년전의 중국은 여전히 여성이 숭고한 지위를 누리던 모계씨족사회시기이다. 이런 특수한 연대에, 왜 이렇게 잔인한 수단으로 한 여성을 죽였을까?
제사로 죽었다면? 원시사회의 종교 혹은 제사활동은 살아있는 사람을 희생물로 삼는 것이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만일 그녀가 정말 제사로 죽었다면, 그 부근에서 당연히 한 씨족이 제사에 쓰는 고정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고고발굴에서 이런 곳은 찾지를 못했다. 저우춘마오는 말한다. 제사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그외에 고고발굴보고서를 보면 링커우 유적지에는 M21과 동일한 시기(링커우촌문화시기, 백가촌문화보다 늦고, 앙소문화보다 빠른 반포유형)의 인골은 모두 5구이다. 그녀가 정식으로 매정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몇 구의 시신은 아예 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를 보면, 그녀의 신분은 비교적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이 높았다면 제사에 쓰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학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 죽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노예사회 이전에, 부락전쟁에서 피살되는 것은 단지 남자포로이고, 통상적으로 죽인 후 먹어버린다. 여성은 부락전쟁의 약탈대상이다. 즉 전리품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족내혼제도는 이미 와해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족외혼제도는 형성되는 중이거나 형성되었다. 씨족구성원은 이미 점점 서로 다른 혈연결합으로 탄생하는 후대의 체질이 강건하고, 부락의 번성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절대로 여자포로를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만일 전쟁포로 1명을 죽이기 위하여, 하필 이렇게 많은 병력과 사람을 동원하고, 이렇게 많은 귀한 무기를 낭비할 필요가 있었을까?" 저우춘마오의 말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시골의 음도에 골기가 삽입된 것을 보고, 소녀가 무리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집단살륙당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족외혼 부락의 엄격한 족내 양성관계의 성금기를 어겼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원인때문인지, 지금까지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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