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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돈황학(敦煌學)이란?

by 중은우시 2015. 12. 14.

글: 자주군(煮酒君)

 

많은 사람들은 여추우(余秋雨)의 문화고려(文化苦旅)를 읽어보았을 것이므로, <도사탑(道士塔)>에 대하여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래서 왕도사(王道士)에 대하여는 불만이 클 것이고, 그는 민족의 패류(敗類)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문학창작과 역사진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실이 과연 그러할까? 왕도사가 돈황 고문서(古卷)를 팔아버린 배후에는 어떤 가슴아픈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일까?

 

왕도사라는 사람은?

 

왕도사는 호북 마성(麻城) 사람으로 본명은 왕원록(王圓錄)이다. 일명 원록(元錄), 혹은 원록(圓祿)이라고도 한다. 집안이 가난해서, 먹고 살기 위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청나라 광서 초기, 숙주(肅州) 순방영(巡防營)에 병사가 된다. 도교를 신봉해서 나중에 군을 떠난다. 계를 받아 도사가 되고 도호를 법진(法眞)이라 하고, 멀리 신강까지 간다. 약 광서23년(1897년) 돈황막고굴에 이른다. 동굴 남쪽구간의 북쪽에서 모래와 돌을 정리하고 향불을 피우고 보시를 받는다. 그리고 사방으로 포교를 다닌다. 약간 재산을 모아서 막고굴 제16굴 동쪽에 태청궁 도관을 짓는다. 지금의 "하사(下寺)"이다.

 

왕도사는 돈황의 가난한 선비 양모를 고용하여 겨울,봄에 도경을 필사하여 필사본을 판매하고, 여름,가을에는 산에 향불을 올리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왕도사는 양모에게 제16굴 복도에 탁자를 놓고 향객을 맞이하고 초장(醮章)을 대신 써주고 보시를 받으며 장부에 기록하게 했다. 여추우는 <문화고려>에서 왕원록이 돈황 막고굴의 문화재를 심하게 파괴했다고 하였면서, 그것을 가슴아파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자료인용에 큰 문제가 있다. 왕원록을 묘사할 때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크다. 이 글은 장경동을 왕원록 혼자서 발견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왕원록의 조수인 양모였다. 광서26년(일설에는 25년) 초여름, 양모는 동굴 보도에서 몸을 돌려 북벽에 담뱃대를 두드렸다. 빈 동굴에서 울리는 메아리가 들리는 것같아서 비실(秘室)이 있을 것같아 왕원록에게 말한다.

 

그래서, 그 해 5월 25일 한밤중에 벽을 부수고 살펴본다. 과연 방이 있었고, 사권(寫卷), 인본(印本), 화번(畵幡), 동불(銅佛)등이 쌓여 있었다.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돈황 막고굴인 것이다. 일부 사권, 불화등을 꺼내어 숙주병비도대 정동과 현의 관리와 선비들에게 나누어준다. 이것이 장경동 문물이 외부에 유출되기 시작하하는 것이다.

 

벌떼처럼 몰려드는 고고탐험대

 

마크 오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 중국문헌에서는 司代諾, 司坦囊등이라 함)은 원래 헝가리 사람으로 유태인이다. 1904년 영국국적을 취득한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 예술사가, 언어학자, 지리학자 겸 탐험가로, 국제돈황학의 개산비조중 한 명이다. 그는 오늘날 영국과 인도에서 소장하고 있는 돈황문화재 및 중앙아시아문화재의 주요 수집자이다. 또한 가장 먼저 연구하고 공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많은 저작은 지금까지도 돈황 투루판학연구자의 책상에서 필독서이기도 하다. 일찌기 1900-1901, 1906-1908, 1913-1916, 1930-1931년에 저명한 4차에 걸친 중앙아시아 고찰을 한다. 고찰의 중점은 중국신강과 감숙이고, 발견한 돈황투루판문화재 및 중앙아시아 문화재는 지금도 국제 돈황학연구의 중요자료이다.

 

스타인은 오스트리라 빈대학, 독일의 라이프찌히대학, 튀빙겐대학에서 동방학을 전공한다. 그의 스승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튀빙겐대학의 인도유럽어 및 종교사 교수이자 산스크리트필사본연구의 최대권위자인 Rudolph von Roth와 빈대학 인도철학 및 문화재학교수인 Ceorg Buhler이다. 스타인은 그들을 따라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운다. 동시에 스타인은 더 많은 동방을 소개하는 서적을 접한다. 몇년간의 공부로 그는 <마르코폴로여행기>와 <대당서역기>의 영향을 바다, 동방으로 간다. 자신의 탐험과 고고로 책에 기록된 역사지리를 찾고 인증한다. 그리하여 역사에 매몰되어 있던 돈황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재현하려 했다. 이는 그의 실제적인 인생목표가 된다.

 

1899년 10월, 스타인은 캘커타 서부의 비하르에 도착하여 첫번째 탐험관광을 한다. 이번 탐험관광은 그의 신강탐험의 예행연습이었다. 그는 먼저 마갈타 성지로 가서 현장대사의 족적을 추적한다. 파라스나트 산록을 따라 전진해서, 곳곳의 불교유적지를 고찰한다. 그는 <대당서역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몇 곳의 이미 잊쳐진 옛 도로를 찾아내고, 나중에 자이에서 캘커타로 돌아온다.

 

정관19년(645년), 현장은 인도로 가서 경전을 자기고 돌아온다. 이때 돈황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간다. "안사의 난"이후, 돈황은 토번의 손에 들어간다. 전체 송왕조때 돈황은 서하(西夏)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원왕조에 이르러, 돈황은 다시 중앙정부의 관할로 귀속되고, 마르코 폴로는 바로 돈황을 거쳐 중원각지를 여행했다. 토번, 서하와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모두 불교를 숭상했고, 막고굴은 이 수백년간 비록 더 이상 전성기를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발전은 했다. 명왕조가 건립된 후, 주원장은 송국공 풍승을 파견하여 하서를 평정하고, 가욕관을 만든다. 가욕관의 지리적위치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돈황은 이미 명왕조가 나라경계선 밖으로 버려버린 것이다. 명왕조가 물러난 후, 이 지역은 점점 투루판이 점열하게 되고, 투루판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했다. 막고굴의 처지가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이슬람교의 대거 침입으로, 일찌기 천불지국(千佛之國)이라 불리던 안서(安西)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를 대체한 것은 이슬람화된 신강이다. 막고굴이 황무지로 변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왕도사가 도착했을 때, 많은 동굴의 입구는 이미 무너졌고, 동굴의 아래쪽은 이미 황사에 매몰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함과 퇴락함뿐이었다. 막고굴이라는 옛날의 총아는 이제 이미 버려진 것이다. 왕도사는 이렇게 막고굴을 주재했다. 그는 속여서 빼앗은 것도 아니고, 강제로 약탈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우연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왕도사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 이곳은 이미 성지가 아니라 그저 버려진 곳이었다.

 

당연히 왕도사는 막고굴의 회생에 공헌을 했다. 생각해보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 도사가 아무런 정부의 재정지원없이, 매일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녀 시주를 받고, 그것을 한푼두푼 모아서 막고굴을 수복하는데 썼다. 모래를 정리하는데만도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경건한 일인가. 장경동을 발견한 후, 왕도사는 완전히 막고굴을 수선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았고, 스타인은 거액의 수선비를 주기로 약속한 후 그가 장경동을 고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그에게 준 불경에는 모조리 감찰과 검사를 했고, 자기가 알아보지 못하는 산스크리트어와 토화라문자등의 고문서는 스타인에게 팔아버린다. 스타인이 한문 서적도 같이 가져가려 하자 왕도사는 이를 전력을 다해 막아낸다.

 

스타인은 왕도사를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현장을 아주 숭배하며, 현장법사의 하늘에 있는 영혼이 나에게 이 경서를 가지고 불국인 인도로 돌아가게 암시했다고. 왕도사는 그의 말을 믿었다. <서역고고도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모든 심혈을 이미 무너져버린 사찰을 수복공사에 쏟았다. 그는 이 대전을 휘황하게 복원하고 싶었다. 그는 모든 돈을 모조리 절을 수리하는데 썼고 개인적으로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왕도사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두 광주리를 싣고 숙주도대 정동에게 보낸다. 그러나 정동은 거기에 쓰인 글씨가 자신이 쓴 것만도 못하게 여긴다. 다행히 진사출신의 신임 돈황현령 왕종한(汪宗瀚)이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즉시 감숙학대이자 금석학자인 섭창치(葉昌熾)에게 보고한다. 섭창치는 이 보물의 가치를 알았다. 그래서 이를 난주로 옮겨서 보관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산해보니 운반비만 육천냥 은자가 들었다. 게다가 길도 멀고 도적이 출몰했다. 만일 잘못되면 돈도 잃고 경전도 잃는 것이었다. 그러면 탄핵을 당해서 관직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섭창치는 조정에 글을 올린다. 그러나 당시의 청나라조정은 땅을 조차해주고 배상금을 물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돈도 되지 않는 자잘한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돈황현령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만다. 현령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다. 조정이 자신에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는데, 운반비를 현에서 내지 않으면 어디서 거둔단 말인가. 백성들에게 거두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했다가 민란이라도 나면 조정에서는 죄를 물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왕도사에게 명령을 내려, 그대로 봉존(封存)하도록 한다.

 

이렇게 앞뒤를 재는 관리들과 비교되는 것은 우리가 '문화재사기꾼', '강도'이라고 욕하는 스타인, 펠리오등 외국의 고고학자들이다. 확실히 그들은 중화민족에 미안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그들은 광명정대한 학자로 대우해줄 수는 없다. 다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그들의 정신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문화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정신. 그들과 비교하면 중국의 학자들은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왕도사를 얘기할 때 우리는 그가 돈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가 돈을 좋아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잠시 얘기하지 않기로 하고, 아마도 그도 그들의 그런 정신에 감동받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상들에게 미안한 말을 한마디 하자면, 당시 이들 외국인들이야말로 돈황 막고굴 장경동의 진정한 지음(知音)이었다. 그리고 관련자료의 기재를 보면, 서방인들이 중국에서 문화재를 가져갈 때, 현지관청에서 발급해준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갈 때는 관리의 보호를 받았다. 왕원록이 그들을 거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왕도사는 스타인 일행이 석양속으로 멀어지며, 사막에 깊은 수레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는 것은 왕도사의 마음을 짓이겼고, 중국인의 마음을 짓이겼다. 왕도사는 자신이 죄인이 된 것을 알아 마음 속으로 고통이 컸다. 그는 민중의 질책을 두려워햇고, 관청의 책임추궁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알아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대청제국에는 문화재법도 없고, 문화재조례도 없었으며, 당시의 조야는 모두 이를 그저 하나의 거래로 보았다.

 

여추우는 입만 열면 서쪽으로 가는 수레를 멈추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들 수레는 동쪽으로 향했다. 스타인은 이들 문화재의 가치를 알았고, 몰래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다당하게 세관을 거쳐 문화재를 반출한다. 반출전에는 북경의 육국반점에서 공개 전시회도 열었다. 많은 고관대작, 군정요인들도 소식을 듣고 와서 참관한다.

 

감숙인민출판사가 1997년에 출판한 <아름다운 돈황>에서는 왕원록의 생애와 사적을 소개했다. 그를 "막고굴을 30여년간 힘들게 지켰고, 필생의 정력을 원래 그에게 속하지 않은 이 성지를 지키는데 쏟았다"라고 적었다.

 

돈황학 - 중국에 독특한 학술

 

막고굴 장경각을 들어서면 돌맹이에 진인각이 통실질수하며 외친 "돈황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학술의 상심의 역사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외국인들은 그 동굴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는데,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당시모두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웃기는 일은 펠리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돈황문화재영인본등을 나진옥(羅振玉)등 에게 보낸다. 조치를 취하여 남은 문헌을 보존하라고 말한다. 청나라정부는 그제서야 전보를 보내어 난주에 주재하는 섬감총독에게 막고굴의 경권문서를 조사하여 모조리 북경으로 보내라고 한다. 정리 운송하는 과정에서 돈황문물은 다시 한번 약탈된다. 연도의 관리들은 거의 모두 조금씩 빼냈다. 심한 경우는 북경에 도착해서 운동을 책임진 신강순무 하언승이 아들로 하여금 그 경권문서를 자기 집으로 가져가게 해서 많은 정품을 자기가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를 채우기 위해서 비교적 긴 책은 둘로 나눴다. 이렇게 하여 5만권의 문화재는 일부분이 외국인에 의해 국외로 운송된 것을 제외하고 일부분은 운반도중에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경사도서관에 들어간 것은 겨우 8천여권만 남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타인, 펠리오등이 가져간 돈황문화재는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는 많은 국가로 하여금 돈황학연구기관을 설립하게 하고, 연구원들이 계속 이어지게 했다. 특히 일본은 돈황학을 문학연구에서 전체 사회역사연구로 확대한다. 법제사, 종교사, 경제사, 민족사등에서 모두 상당한 성과를 낸다.

 

일본인은 심지어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돈황은 중국에 있지만, 돈황학은 일본에 있다. 일본의 전 수상 타케시타 노보루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일본인들이 실크로드, 돈황, 장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감격하는 것은 이 문화가 지금도 강력하게 일본인의 마음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왕도사가 생명으로 지켜낸 한문고권은 그 미친듯한 10년동안 대부분 훼손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