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무후(陽武侯)
악비가 민족독립정신의 상징이 된 후, 그의 비정상적 사망은 사람들이 천년간 가슴아파한 사건이 되었다. 민간의 이야기와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죽어마땅한 진회(秦檜)와 그의 부인 왕씨(王氏)는 개인적인 사욕과 매국노의 근성으로 원래 직도황룡하여 금나라를 철저히 무너뜨릴 수 있는 악비를 해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죄명으로 내놓은 것은 "막수유(莫須有)"이다. 즉 아마도 있을 수도 있고 아마도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속에 숨은 뜻은 살인에 이유가 필요한가? 이에 기하여, 진회부부 두 사람과 그의 당 만후설(萬侯卨)은 천년간 서호의 가에 꿇어앉아 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당연히, 나중의 연구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악비가 피살될 때, 이미 남송의 국방부 차관격인 장군이었고, 수중에 상당히 강력한 병마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만일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면 사람들이 진회같은 인물에게 그런 재주가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를 범죄분자로 확정하려면 그의 사건동기와 시간등 기본적인 요소이외에 범행능력도 아주 중요하다. 송고종의 믿는 심복인 진회는 악비라는 수준의 대장을 참살한데 대한 모든 책임을 부담할만한 능력이 있었다.
일부학자들은 사료를 깊이 연구해 들어간 후 악비는 실제로 송고종 조구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 주장은 비교적 믿을 만하다. 황제가 대장을 죽이는 것은 고금이래로 항상 있었고, 이상할 것도 없다. 대장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무제는 몇몇 승상까지도 죽였다. 모든 것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 황제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너무 일을 잘하면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아서 피살당할 수 있고, 일을 못하면 다른 사람의 조롱을 받고 아마도 피살될 수 있다. 이것은 고금이래의 관례이다.
모두 생각한다. 악비는 황제의 후계자문제에 의견을 얘기했고, 그의 의견은 비교적 극단적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이 아주 충성스럽기 때문에 황제의 집안일까지도 자신의 일로 여겼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송고종에 있어서, 이전에 강북에서 강남으로 도망쳐 왔을 때, 두 대장의 쿠데타를 맞았고(苗劉兵變), 그 쿠데타는 너무나 돌연하였고, 내용 자체가 황제의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어서, 극도의 공포와 놀람으로 자식을 낳을 능력마저도 없어지고 말았다(이것은 확률이 높은 사건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너무나 안타깝다). 소오종은 이전에 사내아이를 하나 두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도망치는 와중에 놀라서 죽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송고종의 시대에 조구에게 후계자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은 조금만 말을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악비가 이런 금기를 범한 것때문에 그가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숙명에 처한 것이라고 본다. 악비는 그에게 불리한 생존환경도 있었다. 악비는 사람됨이 고오하여 여러 동료들에게 미움을 샀다. 심지어 그에게 비교적 잘 대해준 한세충등등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황제에게도 시시때때로 어린아이같이 성깔을 부렸다. 두번이나 황제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는 여산으로 가서 은거한 적이 있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들을 역사사료에서 찾아내는 것은 악비의 죽음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최소한, 현재는 모두 알고 있다. 휘종흠종 두 황제를 모셔오겠다는 구호는 조구가 스스로 내놓은 것이므로 악비는 단지 집행을 했을 뿐이다. 송나라는 효행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중시했으므로, 조구가 악비를 죽인 것은 악비가 직도황룡하여 이성회조(二聖回朝)하겠다고 하는 것이 조구의 현재 지위를 흔들기때문이 아니다.
악비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아마도 그는 대국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송의 당시 역량은 금나라병력을 회하지구에서 몰아내는 수준이었다. 악비는 악주(지금의 우한시)를 지키고 있었고, 그가 통제하는 지역은 바로 삼국시대이 형주지구(지금의 후베이지구와 안휘 동부지구)이다. 이곳은 남송이 금나라병사들이 도강하는 것을 막아내는 핵심지역이다. 악비의 수하에는 10만 정예병이 있었다. 그런데, 자주 생사를 돌보지 않고 개봉부근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전투에는 돈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비바람에 흔들리며 겨우겨우 버텨가는 남송조정이 그렇게 돈을 쓸만한 능력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당시 남송의 경제상황을 보면, 더 생각할 것도 없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국가를 성립시키고 금나라병사의 남하를 막아내는 것만해도, 이미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악비는 말을 듣지 않았고, 계속 진격만을 고집했다. 그래서 조구이 12도금패로 악비를 불러들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을 통하여 조구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악형, 나는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소'라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흉악한 금나라가 강회지구를 넘어서, 송나라를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금나라 올술은 한번 시도해본 바 있다. 힘을 축적해서 장강을 넘어서 조구를 고립시키고자 한 바 있다. 그러나 조구는 바다로 도망쳤고, 바다에서 몇 달간 잠못이루는 밤을 보냈다. 아쉽게도 금나라군대는 모두 오리이다. 바다를 맞이하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그저 탄식만 했다. 원래 강남에 장기간 주둔하고자 하였지만, 이 말젖을 먹고 자란 형제들에게는 실로 강남의 풍토는 그들에게 맞지 않았다. 남방의 저항조직들도 계속 활동했고, 견딜 수 없게 된 금나라군대는 결국 강남에서 철수한다. 그 결과 철수하는 과정에서 송나라군대는 금나라의 뒤를 쫗아서 몇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예를 들어 황천탕수전).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키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해버린다.
전체 전투는 이미 대치단계에 접어들었다. 누구도 즉시 이 대치국면을 타파할 수 없었다. 이때, 남송에 있어서 가장 좋은 전략은 의화(議和)이다. 역량을 집중하고, 경제구조를 조정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 실질을 돌보지 않은 북벌은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악비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전재(全才)가아니다. 그는 경제건설이 이때 남송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맹장들의 주먹을 휘두르며 금나라를 부서뜨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금나라는 이를 반겼다. 악비가 쳐들어오기를 기대한 것이다. 악비의 군대가 여러번 황하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군대가 황하가에서 악가군을 포위공격했을 때, 악가군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죽어라 몇 번을 버텨내면서, 금나라군대의 주력군을 격파했고, 전군을 호북까지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싸우는 것은 남송에게 있어서 재난이다. 남송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악가군이 중원으로 출격하기 전에 남송이 통제한 지역에서 여러번 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중 파양호지구의 종상, 양요가 일으킨 민란은 아주 컸다. 송나라에서 장수를 파견했지만 이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악비가 친히 나서서야 이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그럴듯한 악가군으로 재편한다. 만일 전쟁의 리듬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면, 강남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안팎으로 내통하여 북방의 금군이 남하하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것이다. 800년후에 백만군대가 대감을 남하하는 장면이 그때 이미 벌어졌을 수 있다. 만일 남송의 백성들이 금나라의 해방군을 환영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모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당연히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각 대군구의 사령관들이 행정을 관장하고 군사를 관장하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돈없는 사람은 힘을 보태고 조정은 중간에서 알선하여 사람들이 중원을 해방시키도록 할 것이다. 말로는 아주 좋다. 그러나 조정은 그렇게 감히 하지 못한다. 오대십국때, 군벌국면의 선례가 있다. 일단 이들이 군사와 행정을 장악하면, 반드시 군벌할거가 일어난다. 모두 알고 있다. 송태조가 규정한 법도하에서는 주로 그런 상황을 막고자 하였다. 송나라는 어떤 식으로 하든 상관없지만 그렇게는 못한다. 그러한 금기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남송조정은 아무리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더라도 각대군구에 양초와 재물은 보내주었다.(조정이 뒤에서 받쳐주었기 때문에 악가군은 얼어죽더라도 백성의 집을 허물지 않고, 굶어죽더라도 약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악비를 죽일 때, 익비는 실제로 이미 군대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세충, 유광세, 장준등 장군은 알아서 은퇴했고,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악비는 이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직접 나서서 북방을 해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여론을 버티지 못한다. 악비는 주전파의 기치를 내걸고 죽어라 북벌을 주장했고, 금나라와 너죽고 나살기식으로 싸우자는 여론을 해소하기 힘들었다. 남송은 전쟁을 하면서 말라죽는 위험을 직면해야 했다. 악비를 죽이는 것이 조구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그 깃발을 뽑아낼 수 있고, 착실하게 내부건설에 주력한다는 국책을 밀고 나갈 수 있게 된다. 나중에 조구의 후임자인 송효종이 북벌할 때 이미 태상황이 된 조구는 지지했다. 그러나 이때 조구, 진회의 악명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다시 뭐라고 해도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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