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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의 진실한 모습은?

by 중은우시 2013. 8. 15.

글: 대련일보

 

2억위안을 투자하고, 가장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말하는 대형역사드라마 <정충악비(精忠岳飛)>가 4대 위성TV에서 인기리에 첫방영된 후, 시청율은 아주 높았다. 대형스타들의 출연, 뛰어난 제작이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와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바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송말기, 남송초기의 그 역사시기에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예술적 가공을 제거하고 마면, 악비라는 천년간 칭송받는 영웅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는 저명한 송사전문가이자 대련대학 인문학부 특별초빙교수이자 박사지도교수인 왕샨쥔(王善軍) 선생을 인터뷰하여,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자 했다.

 

용모: 수염이 난 멋진 미남이 아니었다.

 

"현재 많은 문학예술작품에서 그리고 심지어 화상에서까지도 악비는 진실한 악비의 모습과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게 그려지고 있다." 왕샨쥔의 말이다. "그 당시 비록 사진은 없었지만, 화상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왕샨쥔이 언급한 화상은 남송 유송년(劉松年)의 <중흥사장도권(中興四將圖券)>이다.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쳐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유송년의 원작이 아니라, 일종의 모본(摹本)이라고 밝혀졌다. 비록 화상의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악비의 용모상의 특징을 말해준다. 청나라때 인물인 완원(阮元)의 <석거수필>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악비의 얼굴은 크고 각이 졌다. 이마가 넓고 눈썹이 성글었다. 눈은 둥들고 코는 뾰족했다. 입의 아래쪽으로 턱이 아주 길며, 수염이 없었다." 왕샨쥔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다: "황샤오밍(黃曉明, 정충악비에서 악비를 연기한 배우)는 미목이 청수한데, 거기다가 수염까지 덧붙였다. 조금도 닯지가 않은 모습인 것이다."

 

악비의 키에 관하여, 왕샨쥔의 스승인 왕쩡위(王曾瑜)선생은 악비의 키를 170센티미터로 추정했다. 근거는 이러하다. 악비는 당시의 광예군(廣銳軍)의 기병(騎兵)으로 편입되었는데, 규정에 따르면, 광예군은 송나라때 척촌(尺寸)으로 오척오촌(五尺五寸)이다. 송나라때 1척은 약 31센티미터이니, 만일 악비의 신장이 광예군에 적합하여 뽑혔다면 약 170센티미터쯤 될 것이다.

 

혼인: 한번의 실패로 '만능부인'을 얻다.

 

"이왜(李娃)는 악비의 첫번째 부인이 아니다" 왕샨쥔의 말이다. 악비가 16살이 되던 해, 악화(岳和)는 손자를 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악비를 위하여 유(劉)씨성의 여자와 결혼하게 한다. 악운(岳雲)과 악뢰(岳雷)는 모두 유씨 소생이다. 20세때, 악비는 가정이 빈한하여 강을 건너가 군대로 들어간다. 유씨가 남아서 자신의 모친을 돌보게 한다. <삼조북맹회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한세충(韓世忠)이 사람을 보내어 악비에게 그의 본처가 자신의 수하인 한 병사에게 시집가 있는데, 악비에게 그녀를 데려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악비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세충은 이 일을 황상에게 고한다. 악비는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당초 강을 건널 때 처를 집안에 남겨서 노모를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그녀는 두번이나 개가했다. 나는 그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한스럽게 생각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어 그녀에게 오백관의 돈을 주었고, 그녀가 집에서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처를 버렸다는 유언비어가 돌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올린다."

 

이왜의 자는 효아(孝娥)이다. 건영2,3년에 악비에게 시집간다. 그녀는 악비보다 2살이 많았고, 시집올 때 이미 28,9세였다. "연령상으로 보면, 이왜는 분명 개가한 것이다." 왕샨쥔의 추측이다. 악비의 손자인 악가(岳珂)가 편찬한 <악국금타졸편. 진국부인이씨유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고모를 모시는데 예절과 법도가 있었고, 군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선신(先臣, 악비)가 출군하면, 반드시 여러 장군들의 집으로 가서 그들의 처자를 다독여 주었고, 은혜로 그들과 관계를 맺어 환심을 샀다. 의흥에 있을 때, 선신이 자주 그녀를 군영으로 불렀다. 부하가 모반을 꾀하는 것을 이씨가 알게 되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모여있을 때 말을 해서 모반자를 붙잡아 참할 수 있었다. 군대가 일시에 숙연해졌다." 그녀는 현명하면서도 집안일을 잘 처리했고, 장병들의 가족까지 잘 보살폈다. 그리고 반란의 위기에서도 기지와 결단을 발휘하였다. 이를 보면, 이왜는 보통여인들이 갖추기 어려운 건괵(巾帼)영웅의 기운을 갖고 있었다.

 

자자(刺字): 악모자자(岳母刺字)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

 

"악모자자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고 한번만 그런 것도 아니다." 왕샨쥔의 말이다. 송나라때 병사를 모집하는 것을 "초자(招刺)"라고 불렀다. 병사의 얼굴, 팔, 손등등에 글자를 문신으로 새긴다. 이를 통하여 군인번호와 군인신분을 표명하는 것이다. 목적은 병사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고, 도망가더라도 쉽게 추적하여 체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자자는 치욕스러운 표기이다. 죄인, 노비와 일부 관청의 장인들만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 군인이 되는 것은 송나라때 비천한 직업이었다. 사람이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군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악비는 부득이 살기가 어려워 군에 들어간 것이다. "행오천예(行伍賤隸)"로 전락한 것이다. 그는 얼굴에 그런 치욕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무예로 "효용사(效用士)"(상급군인)가 되고자 했다. 그래도 역시 손등에 글을 새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악모자자의 이야기에 관하여 원,명시기에는 관련기록이 없다. 악비가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4글자를 새겼다는 원시기록은 <송사> 권380 <하주전(何鑄傳)> 및 권356 <악비전>이다. 즉 악비를 심문할 때: "악비는 웃옷을 걷어 등을 보여주었다. 등에는 '진충보국' 네 글자가 크게 피부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청나라 강희53년(1714년)의 초본 <여시관전기>에서 악비자자의 이야기가 출현한다. 청나라초기 전채의 <설악전전> 제22회 "자정충악모훈자(刺精忠岳母訓子)"에서 악모자자의 이야기를 써놓았다. 이렇게 하여 악모자자의 이야기가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악비가 등애 새겼다는 글자는 "정충보국(精忠報國)"으로 와전된다. 아마도 송고종이 악비의 금기(錦旗)에 써주었다는 "정충악비(精忠岳飛)"의 영향일 것이다." 왕샨쥔이 보충해서 설명한 말이다.

 

악비의 등에 새겨진 "진충보국" 네 글자는 비록 악비의 모친이 쓴 것이라는 확증은 없지만, 악비의 모친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송사>의 유안세전과 추호전에 따르면, "두 사람이 언관을 그만두고 모두 모친에게 이를 아뢰었다. 모친은 모두 진충보국하라고 격려해주었다." 이를 보면, 진충보국은 당시 현량한 모친들이 자식에게 가르칠때 자주 나오던 말이었던 것이다.

 

품격: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고도(高度)

 

"남송초기의 장군들은 대부분 빈한한 출신이었다. 공명을 얻은 후에 재물을 많이 긁어모으고, 주색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악비는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는 시종 국가이익을 최고가치로 두었다." 왕샨쥔의 말이다.

 

악비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방무희첩(傍無姬妾)" 역시 명장인 오개(吳玠)는 부하가 이런 상황을 얘기하는 말을 듣고는, 이천관의 돈을 들여 한 관료집안출신의 여자를 구한 다음 금은보화를 같이 얹어서 불원천리 그에게 보낸다. 그러나 악비는 그 여자를 빈 방에 앉게 하고는 병풍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악비는 말한다: "우리 집은 아래 위로 모두 거친 베옷을 입고, 먹는 것도 형편없는 면이다. 네가 같이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면 남고, 그렇지 않을 것같으면 떠나라." 그는 병풍 뒤의 여자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는 소리를 듣고는, 얼굴도 한번 쳐다보지 않고 "명주국색(名珠國色)"을 돌려보낸다. 악비가 이렇게 교묘하게 거절하여, 오개에게 득죄(得罪)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오개는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된다.

 

악비는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주 집안의 물건을 팔아서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구매하곤 했다. 그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문관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관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태평할 것이다." 송고종은 그에게 저택을 지어서 준다. 악비는 한나라때 명장 곽거병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적을 아직 모두 없애지 못했는데, 어찌 집안을 이루겠습니까?" 악비가 죽은 후, 진회가 사람을 보내어 가산을 몰수한다. 강주의 전답, 건물외에, 집안에는 금, 옥, 서대(犀帶) 몇 개가 나왔을 뿐이고, 자질구레한 갑옷(瑣鎧), 투구(兜鍪), 남만동노(南蠻銅弩), 강철 칼(鑌刀), 궁, 검, 안장과 고삐(鞍轡)등이 나왔고, 돈이 일백여관, 서적이 수천권 나온다. 그리고 군용 마포, 사견이 삼천여필, 속, 맥이 오천여곡이 나온다. 악비가 두번이나 절도사를 지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집안에 재산이 남아있지 않은 편이었다.

 

악비는 자식을 엄하게 키웠다. 그는 일찌기 12살된 악운에게 100대의 군곤(軍棍)을 벌로 친 적이 있다. 그것은 훈련중에 사고로 넘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악운의 군공을 상부에 보고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아들들을 도와서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악비는 군대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악가군의 구호는 "얼어죽어도 집을 허물지 않고(땔감으로 쓰기 위해), 굶어죽어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부하들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병사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잤다. 그리고 그가 받은 하사품은 모조리 아래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악비가 일생동안 생각한 것은 실지를 광복하는 것이다.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가 우충(愚忠)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2도금패로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윗사람의 말이면 그대로 따르는 우충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아쉽게도 그는 열정이 넘쳤지만, 독재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