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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는 어떻게 죽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8. 5.

글: 악효림(岳曉林) 

 

소흥11년(1142년) 1월 27일, 설날 전날, 민족영웅 악비는 간신 진회(秦檜)의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으로 처결된다. 이에 대하여, <송사.권365.악비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세모(歲暮), 옥부성(獄不成), 회수서소지부옥(檜手書小紙付獄), 즉보비사(卽報飛死), 시년삼십구(時年三十九), 운기시(云棄市), 적가자(籍家貲), 사가영남(徙家嶺南), 막속우붕등종좌자육인(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그렇다면, 악비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가? 천여년이래 이것은 수수께끼였다. 지금까지는 모두 "타사(打死)", "늑사(勒死)"와 "독사(毒死)"등의 주장이 있다.

 

1. 맞아죽었다.

 

<설부> 권29 <조야유기>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의 죽음은 "기폐어옥야(其毙於獄也)....랍협이조(拉脅而殂)"(그는 감옥에서 죽었다....랍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랍협"은 바로 둔기로 근골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가벼우면 골절은 일어나나 죽지는 않고, 무거우면 늑골이 부르져 심장과 폐를 뚫고 들어가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랍협이조"는 바로 때려서 죽었다는 것이다. 고대문헌에서, 이것은 일종의 시신을 보전시키는 사형법이다. 일찌기 춘추전국시대에 실시한 바 있었다. 악비가 만일 "랍협"으로 죽었다면 그는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이는 천도만과(千刀萬剐)에 전혀 못지 않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2. 목졸려 죽다.

 

<설악전전(說岳全傳)>에서는 악비가 목졸려 죽었다. 천여년이래, 이것은 소설가의 말로 취급되었고, 근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2010년 3월, 하남성 장갈시에서 청나라때 묘가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는 악비가 "목졸려 죽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중 하나의 석비에 새겨진 것은 <악씨족보>였다. <악씨족보>비에는 첫구절이 이렇다. "오족원탕응민야(吾族原湯陰人也)"(우리 일족은 원래 탕음 사람이다). 곧이어 악비의 신세, 사적, 사인등에 관하여 소개한다. 그 위에는 조정에서 연속 12번의 '금패'를 보내어 악비에게 병력을 퇴각하게 하고, 악비는 남송의 도성 임안으로 가서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사인에 대하여는 그중에 이런 말이 있다: "십이월이십구일장왕늑사(十二月二十九日將王勒死)". 악비가 만일 목졸려 죽었다면, 그다지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독살당했다.

 

<삼조복맹회편> 권207 <악후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후는 중독되어 죽었고, 임안 채소밭 안에 묻었다(侯中毒而死, 葬於臨安菜園內)". 구체적으로 말해서, 악비가 죽은 후, 옥졸 외순(隗順)이 악비의 시신을 비밀리에 매장한다. 20년후 송효종이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키자, "외순의 아들이 관청에 보고한다. 그가 말한 것과 똑같이, 아무런 보물도 배장되어 있지 않았고, 시신의 색깔은 살아있는 듯했으며, 다시 염을 하여 예복을 입힐 수 있었다." "시신의 색깔이 살아있는 듯하다"는 것은 시신이 아직 모두 썩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악시가 만일 독살당했다면 죽었을 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죽었건, 악비는 당시에 시신을 온전히 남겼다. 이것은 조구가 악비의 처결을 승인하는 의지(懿旨)에 "사사(賜死)"하라고 두 글자를 명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악비의 시신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외순(생몰년 미상)의 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악비가 해를 입은 후, 외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비의 시신을 등에 매고 항주성을 빠져나온다. 전당문 바깥의 구곡총사 곁에 묻는다. 나중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악비가 차고 있던 옥대를 시신의 허리 아래에 묶어둔다. 그리고 묘의 앞에 두 그루의 길수(桔樹)를 심어놓는다. 죽기 전에, 그는 이 일을 아들에게 얘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한다: "언젠가 조정에서 악비의 시신을 구하려고 해도 구하지 못하면, 반드시 관직과 상을 걸 것이다. 너는 이렇게 말해라: 관 위에 납이 있고, 극사(棘寺, 대리사)의 늑자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매장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소흥32년(1153년), 악비가 해를 당한 후 21년이 지나서, 송효종 조신은 민의에 순응하기 위하여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그리고 500관백은으로 악비의 시신을 찾는다. 외순의 아들은 부친이 시신을 붇은 진상을 관청에 보고한다. 송효종은 특별히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악왕으로 추봉하며, 시호를 무목(武穆)이라 하며 서호 서하량으로 이장한다. 이것이 오늘날 항주 서호가에 있는 "송악악왕묘(宋岳鄂王墓)"이다.

 

악비가 해를 당하기 전에, 풍파정에 8자의 절필을 쓴다: "천일소소(天日昭昭), 천일소소(天日昭昭)" 그는 정충보국으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다.

외순은 영웅의 시신을 보호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