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민국사상계의 "동제"와 "서제"

중은우시 2013. 8. 4. 20:46

유계흥(劉繼興) 

 

민국의 사상계에 두 명의 기인(奇人)이 있다. 그들은 장태염(章太炎)과 추용(鄒容)이다. 장태염은 추용보다 17살이나 많다. 추용은 그를 항상 형장(兄長)으로 대했다. 장태염은 절강 사람이고, 추용은 사천 사람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동제"와 "서제"로 칭했고 자주 함께 국가대사를 논하고 혁명을 고취시켰다.

 

장태염의 광(狂)은 유명하다. 그가 청년시대에 <춘추좌씨독>을 쓴 후, 일찌기 아주 자부심을 갖고 말했다. 만일 유봉록(劉逢祿)이 이 책을 봤다면, 그저 기어서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유봉록은 장태염의 스승인 유월(兪)보다 한 배분이 높은 청나라때의 경학대사이다. 일찌기 <좌씨춘추고증>을 쓴 바 있다.

 

장태염은 그의 저작 <박강유위논혁명서>에서 강유위의 보황이론(保皇理論)을 반박했고, 민족민주혁명을 옹호했다. 그중 이런 말이 있다. "재첨(載湉)은 소추(小醜, 어릿광대, 소인)이며, 숙맥(菽麥)을 구분하지도 못한다." 이름을 부르면서 황제를 '소추'라고 칭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용의 <혁명군>과 장태염의 <박강유위논혁명서>는 거의 동시에 20세기의 중국대지에 출현했다. 두 글은 쌍벽휘영(雙璧輝映)이고, 중국근대혁명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장태염이 <혁명군>에 쓴 서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두 편의 글은 풍격이 서로 다르고, 효과도 서로 다르다. 장태염의 글은 고고(高古)하고, 문인묵객들이 높이 평가하는 글이고, 상층문화계에서 널리 전파되었고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추용의 글은 천현(淺顯)하고 글이 격렬하여 하층민중사회에서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당연히 계몽에 더욱 쉬웠고, 보통백성들이 반청투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혁명서>는 중국근대의 <인권선언>으로 칭해진다. 손중산은 그것을 "만주족을 배척하는데 가장 격렬한 글", "인심을 크게 움직일 수 있고, 언젠가 좋은 효과를 반드시 거둘" 작품이라고 높이 치켜세워주었다. 당시 <소보>의 주필인 장사쇠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군>은 "금일 국민교육의 한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추용이 "혁명군중마전졸(革命軍中馬前卒)"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대표작 <혁명군>을 썼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편장을 일찌기 장태염에게 훑어보게 했었다. 책이 완성된 후, 추용은 장태염에게 <혁명군>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장태염은 흔쾌히 승락한다. 이것이 바로 후에 상해 <소보>에 발표된 <서<혁명군>>이다. 여기서 <혁명군>은 사회를 뒤흔드는 우뢰소리와 같다고 크게 칭송한다.

 

이편의 <서.혁명군>이 출간되자, 그날의 <소보>는 1만부를 추가로 발행하였다.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오고, 직접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불러온다. 바로 "<소보>사건"이다.

 

청나라정부는 공황상태에 빠져 금방 상해조계당국과 결탁하여 <소보>를 페쇄시킨다. 그리고, 장태염, 추용을 체포하도록 명을 내린다.

 

관병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이미 소식을 들었다. <소보>의 발행인 진범(陳範)과 주편인 장사쇠등은 속속 도당쳤다. 장태염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혁명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한다. 나는 만청에 벌써 6번이나 조사받고 붙잡혔다. 이번은 일곱번째이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문사로 간다. 관병이 수색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서서 말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없네, 장병린을 잡겠다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는 스스로 찾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날, 그는 서신을 써서 상해조계의 선교사집에 숨어있던 추용에게 보내어, "대의상초(大義相招)"라고 하며 그에게 자수를 권한다. 추용도 피끓는 사나이였다. 서신을 받은 후 과연 자수하러 간다.

 

만청정부는 신흥출판업과 정기간행물의 글을 심하게 단속했다. <소보>사건이 발생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마찬가지로 신문에 글을 발표한 것을 이유로 하여 죄인이 된 심진(沈盡)도 청나라조정에 체포된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 재판을 받지도 않고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의 여론은 비등했고 청나라정부는 크게 비난을 받는다. 동시에 장태염과 추용의 재판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분위기하에서 진행된다.

 

이번 소송은 1년이 걸렸다. 청나라정부가 "반역"을 체포하여 죽이려는 마음이 극히 강하기는 했지만, 신문은 상해조계에서 발행되는 것이어서 소보사건은 외국인의 법정에서 공개재판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청나라정부, 조계영사, 그리고 혁명당인, 여러 정치역량이 힘겨루기를 한 결과였다. 1904년 5월, 재판이 끝난다: 추용은 감금 2년, 장태염은 감금 3년. 벌로 노동을 하게 하고, 기한만료후에 석방하며, 국외추방한다.

 

이 기간동안 장태염, 추용 두 사람은 여전히 호기가 대단했다. 법정을 강연장으로 만들었고, 당당하고 격앙한 목소리로 혁명이론을 선전하여, 그들의 명성이 널리 퍼진다.

 

옥중에서, 두 사람의 우의는 더욱 깊어진다. 장태염은 일찌기 인구에 회자되는 <옥중증추용>을 쓴다: "추용오소제(鄒容吾小弟), 피발하영주(被發下瀛洲), 쾌전도제변(快剪刀除辮), 건우육작후(乾牛肉作), 영웅일입옥(英雄一入獄), 천지역비추(天地亦悲秋), 임명수섬수(臨命須摻手), 건곤지양두(乾坤只兩頭)". 추용도 역시 <옥중답서수>라는 시를 써서 화답했다: "아형장매숙(我兄章枚叔), 우국심여분(憂國心如焚). 병세무지기(倂世無知己), 우생고불문(吾生苦不文). 일조윤지옥(一朝淪地獄), 하일소요분(何日掃妖), 작야몽화이(昨夜夢和爾), 동흥혁명군(同興革命軍)". 두 사람은 간담상조(肝膽相照)라 할 만하다.

 

추용은 곧 출옥할 때가 되었을 때 돌연 사망한다. 장태염은 매우 힘들어 한다. 신해혁명승리후, 손중산이 이끄는 중화민국 남경임시정부는 추용의 혁명업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에게 "대장군"의 계급을 사후에 추서한다. 살아 있을 때는 "마전졸"이었는데, 사후에는 "대장군"이 되었다. 이는 한 청년혁명가의 짧은 일생과 근대자산계급혁명사의 특수한 공훈을 생생하게 개록하고 있다.

 

추용의 죽음은 장태염에 있어서는 "나는 백인(伯仁)을 죽이지 않았는데, 백인은 나로 인해서 죽었다." 그는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추용에게 묘를 만들어주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의 집안에도 추용의 화상을 걸어놓았다. 초하루, 보름날에는 향을 올렸다. 한편으로는 죽은 친구에 대한 마음 깊이 우러나는 애도의 마음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히 심리적인 미안함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후에도 장태염은 여전히 광견(狂)했다. 원세개가 칭제하려 했을 때, 장태염은 1914년 초하루 추운 겨울날에, 북경 신화문 바깥에 있는 총통부의 문앞에서, 그는 면포를 입고 손에는 접는 부채를 들고, 원세개가 직접 내린 건국대훈장으로 부채장식을 삼았다. 그리고 원세개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만나기를 청했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만날 수 없자 화를 낸다. 접대실의 탁자와 의자 그리고 기물을 모조리 박살낸다. 그는 큰 소리로 원세개가 포장화심(包藏禍心), 독부오국(獨夫誤國)한다고 욕을 했다.

 

장태염이 총통부에서 소란을 부렸다는 소식은 경성에 널리 퍼진다. 나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 장태염의 광사(狂士) 풍격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나중에 그의 국학제자인 노신은 글에서 스승의 이 의거를 크게 칭송한다. 대훈장을 가지고 부채장식(扇墜)로 삼아, 총통부의 문을 가서 원세개가 포장화심한 사람이라고 욕을 했으니 세상에 다시 없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장태염은 원세개에 의하여 연금된다. 그 기간동안 부인에게 서신을 쓰는데, "내가 죽은 후, 중국문화도 역시 망할 것이다." 이 말의 미친 정도는 더 이상 갈 수 없을 정도라 할 것이다.

 

문화계와 혁명정계에서 명망이 있던 장태염에 대하여 원세개는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부하를 시켜 장태염을 마차에 태워서 요란하게 길을 열면서 거소까지 데려다 주게 한다. 당시 군정집법처장으로 있던 육건장은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중에 남방과 전투를 벌일 때, 장선생이 우리를 위하여 격문 하나만 써준다면 10만의 병사와 맞먹는 효과가 있을텐데, 우리가 어찌 그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년의 장태염은 서재에서 학문에 힘쓰고, 노신의 말에 따르면, '기리민중(旣離民衆), 점입퇴당(漸入頹唐)"하게 된다. 그러나 만년에 그는 중화대지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국학제자들을 배양해낸다. 그의 불행은 오히려 중화문화의 큰 행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