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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정치국 상임위원 7명의 부인들

by 중은우시 2013. 10. 7.

글: 양국선(楊國選)

 

1. 펑리위안(彭麗媛): 시진핑의 부인

 

중공총서기 시진핑의 처로서 펑리위안은 중국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유병한 가수이다. 대형축하행사현장에서 노래를 불렀고, 더구나 뉴욕 링컨아트센터에서 중국가극을 처음으로 공연했다. 과거 몇년간, 그녀의 지명도는 시진핑을 초과할 정도였다. 어떤 매체는 펑리위안의 스타신분은 공중의 매력을 끌고 있어, 역대이래 중공의 퍼스트 레이디들이 조용히 지내온 것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시진핑의 국제화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펑리위안은 산동 사람이다. 1962년 11월생이다. 일찌기 1980년대, 이 군대가수는 전국에 명성을 떨친다. 중공정치의 게임규칙에 따르면, 정치국 상임위원의 부인은 공식석상에 너무 자주 드러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2008년 연말, 펑리위안은 총정치부 가무단 당장으로 승진하여, 군대내 최대의 음악무용공연단체를 장악하게 된다. 2009년 11월, 펑리위안은 단장의 신분으로 방대한 진용의 총정가무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중국가곡 <목란시편>을 순회공연한다. 황태자 도쿠히토(德仁)도 친히 공연을 관람했다. 그녀는 2012년 5월에 다시 해방군예술학원 원장으로 승진한다.

 

그녀는 1987년 당시 샤먼 부시장으로 있던 시진핑과 결혼한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딸 시밍저(習明澤)이 있으며,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중이다. 사실상, 2007년에 시진핑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 서방의 많은 매체들은 이렇게 예언했다. 펑리위안은 이전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서방에 더욱 개방적이고 더욱 현대화된 중국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외부에서는 보편적으로 펑리위안이 어떠한 퍼스트 레이디의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중공의 개방태도의 리트머스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사람들에게 펑리위안은 낯선 이름이 아니다. 지명도가 아주 높은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인 펑리위안은 레코드를 내놓기도 했고, 외국으로 나가서 공연한 바도 있다. 이전의 중국지도자 부인들의 조용한 모습과는 대비됨, 서방의 퍼스트 레이디에 더욱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펑리위안은 가정을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일 나에게 사업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지 말고, 아이를 돌보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정은 여인의 배경이다. 조용한 항구이다. 나의 가정은 모든 일반 백성들가 마찬가지로 보통의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이다."

 

2. 청홍(程虹): 리커창의 부인

 

펑리위안에 비하여 국무원총리 리커창의 처인 청홍은 훨씬 조용하다. 청홍은 베이징 수도경제무역대학 외국어과에 재직중이다. 다만 연구만 하고 강의는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잡음을 피하기 위하여 학교내의 보직도 맡지 않는다. 그녀는 한번도 리커창과 함께 공개장소에 나타난 적이 없다.

 

청홍은 정저우(鄭州)의 한 간부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청진뤼(程金瑞)는 산동 거남(莒南) 사람이다. 일찌기 혁명에 참가해서 공청단 하남성위 부서기를 지냈다. 나중에 북경으로 가서 국무원부빈개발판공실 고문을 지냈다. 그는 부부장급(차관급)의 간부이다. 모친 류이칭(劉益淸)은 박애현 사람으로 신화사 기자를 지냈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청홍은 한 때 농촌으로 "삽대(揷隊)"를 갔다. 나중에 낙양해방군외국어학원에 입학한다. 졸업후 청화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한다. 정치를 최우선하던 미친 시대에 낭만적인 연애를 거치지 않고, 부친의 옛 전우인 공청단중앙서기를 지냈고 당시 중앙조직부 부부장이던 왕자오화(王照華)의 소개로, 북경대학 단위서기인 리커창을 만나 결혼을 한다. 딸을 하나 낳았는데,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현재 미국유학중이다.

 

청홍은 다른 중공의 고관부인들이 교제나 사업에 열중하는 것과는 달리 캠퍼스의 조용한 분위기를 좋하했고, 강의에 열정이 충만했다. 일찌기 2번이나 학교에서 선발하는 "나의 마음 속의 10명의 교수"에 선발된 바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고관부인들의 모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현재 청홍은 수도경무대학 학술위원회 위원이다. 학교측은 그녀를 과주임 심지어 더 높은 직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모두 청홍이 거절한다. 청홍은 번잡한 행정사무는 좋아하지 않았고, 재미없는 모임자리도 짏어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남편 덕으로 직위가 올랐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리커창이 중남해로 들어가 부총리가 된 후, 청홍은 기본적으로 강의는 하지 않고 그저 연구만 하고 있다.

 

청홍은 일찌기 미국브라운대학의 방문학자를 지냈고, 그녀가 쓴 책은 그녀의 키만큼 될 정도이다. 중국에서 미국자연문학연구에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미국자연문학의 대표작인 <Wake-Robin>(존 버로우스 작), <Outemost House>(헨리 베스톤 작)을 번역했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미국자연문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저작 <심귀황야(尋歸荒野)>를 썼다.

 

수도경무대학의 그녀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청홍, 1957년생, 문학박사. 수도경제무역대학 외국어과 영어교수, 학교학술위원회 위원, 두 번에 걸쳐 학생이 선발한 '나의 마음 속의 10대 교수'에 선발됨. 북경시대학우수청년골간교사, 수도경무대학우수강의교사레 선정되었고, 북경시대학우수교학성과2등상 및 북경시대학 제3기 철학사회과학중청년우수성과상을 획득함.

주요연구분야: 영어강의 및 연구, 자연문학과 생태비평.

 

3. 신슈썬(辛樹森): 장더장의 부인

 

장더장의 부인은 금융계의 고관인 신슈썬이다. 신슈썬은 1949년 7월생으로 산동성 해양(海陽) 사람이다. 1976년 8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고급경제사이며 정부특수보조금을 받고 있다. 중국건설은행 부행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신슈썬은 창춘야금건축학원을 공업및민용건축전공으로 졸업했다. 나중에 동북재경대학 국민경제학전공 석사학위를 받는다.

 

장더장과 신슈썬은 얜지(延吉)시에서 만났다. 당시 장더장은 연변대학 조선어학과 조선어전공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남아 일하고 있었다. 신슈썬은 건설은행 연길지행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의 결혼당시 조건은 아주 열악했다. 살던 곳은 1칸짜리 보통주택이다. 작은 방에 들어가면 바로 식탁이 있고, 손님들이 드나들려면 식탁 옆으로 지나가야 했다. 부부는 아주 조용히 지냈고,평소에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슈썬과 한 친구가 남편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나와 가정에 대한 깊은 감정을 마음 속에 묻어두고, 더 많은 마음과 힘을 사업에 열중하는데 쏟고 있다."

 

그녀는 1983년 중국건설은행 연길시분행 부행장, 연변주중심지행 부행장을 지낸다. 1986년 장더장은 길림 연변주위 부서기에서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민정부 부부장, 당조부서기가 된다. 신슈썬은 중국건설은행 인사부 기관인사처의 부처장으로 갔다가 나중에 처장, 인사부 부주임이 된다. 그리고 중국건설은행 사상정치판공실주임 겸 인사부 부주임, 중국건설은행 자금조달저축부 총경리, 소매업부무 총경리, 개인은행업무부 총경리를 지낸다.

 

2003년 2월 중국건설은행 기율검사위 부서기, 기율검사위 서기, 행당위 위원이 된다; 2004년 9월, 중국건설은행 총감찰, 기위서기, 당위위원 겸 기간당위서기, 중국건설은행 부행장을 지낸다. 제11기 전국정협위원도 지낸다. 장더장과 신슈썬 사이에는 아들 한 명이 있다.

 

4. 장즈카이(張志凱): 위정셩의 부인

 

위정셩의 부친 위치웨이(兪啓威)(일명 黃敬)은 중국공산당의 원로혁명가이다. 중공건국후 제1대 천진시위서기를 지낸다. 모친 판진(范瑾)은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 판원란(范文瀾)의 여동생이며, <북경릴보> 사장을 지냈다.

 

대단한 가족을 지닌 위정성의 부인인 장즈카이도 중공의 개국상장(開國上將)이며 전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을 지낸 장아이핑(張愛萍)의 막내딸이다. 장즈카이는 제10기 전국정협 전국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위정셩과의 사이에 아들 1명이 있다.

 

5. 리쑤팡(李素芳): 류윈산의 부인

 

류윈산은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약력이 비교적 간단하다. 그는 중공의 선전업무를 맡아왔다. 중국네티즌들이 "매체킬러"라고 부르는 그는 기밀유지에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것같다. 류윈산의 일가가 4명이며,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을 빼고는 처인 리쑤팡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도 알려져 있지 않다.

 

6. 야오밍싼(姚明珊): 왕치산의 부인

 

고급경제사이며, "북경의 이빨(京城名嘴)", "사나이(硬漢)"라는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 왕치산의 부인은 야오밍싼이다. 야오밍싼의 부친은 중공 13기 중앙정치국상임위원을 지낸 전 국무원 부총리 야오이린(姚依林)이다.

 

1969년, 왕치산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다수의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상산하향운동에 가입하여, 섬서성 연안 풍장공사에 삽대되어 노동을 한다; 2년후, 섬서성 박물관에 들어간다; 1973년, 공농병학원의 신분으로 서북대학 역사학과에 추천을 받아 들어가 공부한다. 왕치산은 연안 지청삽대노동시기에, 같이 북경에서 온 지청인 야오밍싼과 연애를 하고 나중에 부부로 맺어진다. 야오밍싼은 현재 이미 은퇴했다.

 

왕치산은 대학졸업후 중국사회과학원에 분배되고, 근대사연구소 민국사실의 청년학자가 된다. 1982년, 야오이린이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 되고, 중앙서기처에 들어가며, 국무원 부총리가 된다. 나중에 중공정치국 상임위원이 된다. 이와 동시에, 앙치산은 중공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옮겨서 일한다. 이같은 파견근무로 인하여 왕치산은 정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말을 잘하는 왕치산은 야오밍산의 마음을 얻은 후, 자신의 재주에 태자당 색채를 더하여 그후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야오이린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야오밍싼, 야오밍돤으로 야오밍돤의 남편은 멍쉐농(孟學農)이다. 왕치산은 멍쉐농의 뒤를 이어 북경시장이 된다. 이는 중국정계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러나, 북경시시장에서 물러난 멍쉐농은 왕치산처럼 운이 따르지 않았다.

 

멍쉐농은 중국에서 가장 운나쁜 관리라고 불린다. 1949년 8월에 산동성 펑라이에서 태어난 그는 1969년 3월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고, 1972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2003년 1월 북경시위 부서기, 시장이 된 멍쉐농은 SARS풍파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4월 20일 북경시위부서기, 북경시장에서 물러난다. 한참후인 2008년 1월에 멍쉐농은 재기하여 산시성위부서기, 성장이 된다. 그런데 2008년 9월, 다시 산시성 샹펀현에서 "9.8"광산붕괴사고가 나서 다시 산서성위부서기, 선서성장의 직위를 물러난다.

 

7. 캉제(康潔): 장까오리의 부인

 

장까오리는 석유계통 출신으로 특수한 배경은 없다. 관직이 오를 때에도 그의 부인은 조용했고 드러난 적이 없다.

 

2012년 양회(중국인대,정협회의)의 천진대표단 기자회견에서, 천진서위 서기인 장까오리는 18대에 정치국 상임위원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19대에 내가 무엇을 한다는 말은 모두 소문이다. 나 자신은 힘들게 자란 사람이다. 나의 책임은 분수를 지켜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장까오리는 푸젠 진장 출신이다. 소문에 따르면, 장까오리는 집안이 빈곤하여, 소학교때는 매일 도시락에 고구마를 싸가서 먹었다고 한다. 진장시 교성중학에 들어갈 때 맨발로 가서 신청했다고 한다. 그후 샤먼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졸업후 광동 마오밍화공공장의 운반공이 된다. 힘들게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장까오리는 윗사람들이 잘 보아서 관운은 계속 좋았다. 그의 부인 캉제는 장까오리가 대학을 마치고 마오밍에 분배되었을 때의 동료라고 한다. 장가오리와 캉제와의 사이에는 아들이 1명 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부대에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부연대장급의 직위를 가진 간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