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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헌지(王獻之): 공주에게 강제로 장가들면서 비참해진 인생

중은우시 2013. 11. 10. 01:45

글: 자의표표(紫衣飄飄) 

 

 

 

왕헌지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막내아들이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로 세상에 이름을 날랐으며, 부친과 나란이 유명해서 후인들은 그들 둘을 "이왕(二王)"이라고 부른다.

 

그는 재능이 넘치고, 시원스러웠으며, 풍류가 있고 잘생겨 당시 최고의 남자였다. 그리고 의표도 당당하고 기풍과 꾸미는 것도 중시하였으며, 세가자제의 정치한 생활태도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신안공주(新安公主)가 몰래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신안공주 사마도복(司馬道福)은 진나라 간문제(簡文帝)의 딸로, 그녀는 왕헌지를 사랑하게 된지 오래되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이미 항온(恒溫)의 아들 항제(恒濟)에게 시집을 갔고, 나중에 항제는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병권을 빼앗긴다. 신안공주는 이를 기화로 그와 이혼해버린다.

 

여전히 젊고 미모인 공주는 마침내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얻었다.

 

원래, 이것은 원래 아름다운 인연이다. 단지 왕헌지도 이미 희도무(郗道茂)와 결혼하였고, 두 사람의 애정은 아주 깊었다. 희도무는 명문세가의 여인이고, 왕희지는 희씨집안의 동상쾌서(東床快婿)였다.

 

희도무는 단정하고 재능을 갖추었으며, 생활의 정취를 지닌 여자였고, 왕헌지의 사촌누나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으며, 청매죽마(죽마고우)였다. 어른이 된 후, 집안사람들은 그들을 위하여 혼사를 치른다. 왕헌지는 관직에 나가는데 큰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부친은 대량의 산림, 전답, 장원을 소유하고 있어, 생활은 풍족했다. 이런 현처를 얻은 후, 더욱 명리에 담백하게 된다. 그저 산수를 다니면서 청정한 생활을 보내고자 했고, 서예의 조예를 닦는데 힘썼다.

 

신안공주가 보기에, 희도무는 비록 정식으로 왕헌지의 부인이 되었지만, 왕헌지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단지 딸을 하나 낳았을 뿐인데, 요절했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버려질 수 있다. 신안공주는 자신이 금지옥엽의 존귀한 신분으로 그와 결혼하게 되면 왕헌지가 아주 좋아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녀는 황태후에게 간절하게 사정한다.

 

동진황실도 왕헌지의 인품과 명망을 좋게 보고 있었다. 황태후가 나서서 효무제로 하여금 조서를 내려 왕헌지를 부마로 삼도록 만든다.

 

확실히 신안공주는 왕헌지의 처 희도무에 대한 애정을 저평가한 것이다.

 

그날을 조용한 날이었다. 왕헌지에게 처를 버리고 새로 공주와 결혼하라는 성지가 내려오자, 왕씨집안의 평정은 깨지고 만다. 두 부부는 애정이 깊었고, 서로 깊이 사랑했다. 일찌기 "집자지수(執子之手), 여자해로(與子偕老)"를 약속했고, 금생에 생이별할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따. 그러나 이번에 그들을 갈라놓으려는 것은 황권이다. 항거할 수 없는 황권이다.

 

왕헌지는 묵묵히 처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바라보았고, 혼자서 서재로 들어간다. 이 날을 불면의 밤이었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다음 날 아침 왕헌지가 서재를 나섰는데, 이미 절름발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처를 떠나고 싶지 않았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애초(艾草)로 두 발을 불태워서 평생 장애자가 된다.

 

남편을 끌어안고, 희도무는 빗물처럼 눈물을 흘린다. 남편의 고통을 그녀도 똑같이 느꼈고, 그녀는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평소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리지 않던 남편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으면, 이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스스로 절름발이가 된단 말인가.

 

애화(艾火)로 자신의 발을 태우면서도 그의 마음은 평정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남길 수 있다면, 이런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축하며 말했다: "울지 마라.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현재 장애자가 되었다. 어찌 부마가 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왕헌지도 신안공주의 그에 대한 애정을 저평가했다. 그녀는 가볍게 말한다.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가 병신이 되었더라도 시집을 가겠다고.

 

왕헌지는 철저히 절망한다.

 

희도무는 손에 짐을 하나 끌면서 집을 나선다. 그리고 가볍게 말한다: "헌지. 나는 간다. 더 이상 자신을 해치지 말라."

 

"안된다" 이제부터 생활에서 그녀가 없어진다면 살아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함께 공주를 만나자. 그녀는 왜 우리를 억지로 갈라놓으려 한단 말인가. 설사 목숨을 금전에서 잃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희도무는 그를 제지한다. "그러지 말라. 헌지.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생사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때문에 황상의 화를 돋구면, 전체 가족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처럼 애정을 중시하는 사람에 있어서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책임, 너무나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

 

그녀는 배를 타고 떠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강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그의 친정은 이미 흩어져서 할 수 없이 숙부의 집으로 간다. 왕헌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슬픔에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 비록 생이별이지만 죽는 것이나 같았다. 그녀는 이미 부친도 없고, 딸도 없다. 이제 그녀는 남편마저 없다. 이후 혼자서 남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희도무는 이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하게 죽는다. 이 소식을 듣고, 왕헌지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것같았다. 상심하여 평생동안 괴로워한다.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 비극을 만든 것은 바로 현재 그의 처인 사람이다. 즉 신안공주이다. 그는 그녀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다.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신안공주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손에 넣은 혼인이지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 대하여 아무런 애정도 없었다. 겉으로는 공경하였지만, 한기(寒氣)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쨌든 그가 사랑하고 숭배하는 사람이다. 그의 처로서 매일 그를 볼 수만 있어도 그녀는 만족했다.

 

나중에 왕헌지는 소첩 도엽(桃葉)을 맞이한다. 하루종일 그녀와 함께 어울렸다. 마치 세상사람들이 몰라줄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자주 시와 사를 짓고 같이 노래부르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널리 드러냈다.

 

도엽이 외출할 때면, 왕헌지가 항상 직접 나룻터까지 배웅했고, 시를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현재 남경에는 "고도엽도(古桃葉渡)"라는 석비가 있는데, 그들의 애정에 대한 천고의 목격증인이다.

 

도엽부도엽(桃葉復桃葉), 도수연도근(桃樹連桃根), 상련양락사(相憐兩樂事), 독사아은근(獨使我殷勤)

도엽부도엽(桃葉復桃葉), 도강부용즙(渡江不用楫), 단도무소고(但渡無所苦), 아자영접여(我自迎接汝)

 

도엽도 시를 지어 화답했다. 이때부터 달콤하게 그를 "단선랑(團扇郞)"이라고 불렀다.

 

신안공주는 잘 알았다. 이것은 그의 소리없는 반항이다. 그녀의 마음도 씁쓸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녀 자신이 조성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혼자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교만한 공주도 깊은 애정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한 마디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친정으로 가서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부군을 보호했고, 그가 결혼후에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왕헌지는 관직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른다. 그녀는 언젠가 남편이 인정해줄 것이라고, 그의 마음을 진정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도엽은 총명하고 다재다능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희도무의 그림자였다. 더더구나 왕헌지가 세상사람들에게 분노와 불만을 표시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왕헌지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희도무 뿐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몇 개의 서첩중에는 모두 왕헌지가 전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련첩(思戀帖)>: 사련(思戀), 무왕부지(無往不至). 성고(省告), 대지비색(對之悲塞)! 미지하일부득봉견(未知何日復得奉見). 하이유차심(何以喩此心)! 유원진진중리(惟願盡珍重理). 지차신반(遲此信反), 부지동정(復知動靜). (<순화각첩>을 보라)

 

<자성전면첩(姉性纏綿帖)>: 자성전면(姉性纏綿), 촉사수당불가(觸事殊當不可). 헌지방당장수이(獻之方當長愁耳). (<순화각첩>)

 

<봉대첩(奉對帖)>: 수봉대적년(雖奉對積年), 가이위진일지환(可以爲盡日之歡), 상고부진촉류지창(常苦不盡觸類之暢). 방욕여자극당년지족(方慾餘姉極當年之足), 이지해로(以之偕老), 기위괴별지차(豈謂乖別至此). 제회창색실심(諸懷悵塞實深), 당부하유일석견자야(當復何由日夕見姉耶)? 부앙비열(俯仰悲咽), 실무기무기(實無已無已), 유당절기이(唯當絶氣耳). (<순화각첩>)

 

우리가 헤어진지 이렇게 여러 해가 되었다. 되돌아 보면, 내가 이번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우리가 힘께했던 때이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 올 줄은.

네가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은 내 마음을 차지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네가 떠난지 오래될수록, 나는 더욱 너를 그리워하는데서 스스로 헤어날 수 없다. 설마 이 고통은 죽어야만 끝난단 말닌가.

이번 생애는 이미 끝이 났다. 되돌릴 수가 없다.

 

왕헌지가 41살이 되는 해에 신안공주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낳는다. 이름을 신애(神愛)라고 한다. 희도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은 그를 결국 쓰러뜨린다. 2년후 왕헌지는 사망한다.

 

이 걸출한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만인의 중앙에 처했고, 많은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바로 그의 뛰어남 때문에, 반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게 된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왕헌지가 임종할 때, 법술을 하던 도사가 그의 평생 가장 유감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는 말한다: "다른 일은 없고, 오로지 희도무와 이혼한 것이 기억난다."

 

신안공주의 마음은 그때 돌연 명확히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일생을 바쳐서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는 것을. 임종때, 그는 여전히 이미 죽은지 여러해가 지난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당초에 이럴 줄 알았다면 결국은 패배할 애정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에 집착하여,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도 고통이다.

얻지 못했다면 기실 더욱 고통이 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