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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수박을 먹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예방육(倪方六) 

 

난징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요 며칠은 더워죽겠다(熱死了)". 날씨가 더우니, 수박(西瓜)이 잘 팔린다. 수박을 먹는 일은 현대인들에게 별 것이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고대에 수박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元)나라때만 하더라도, 수박은 귀족들이 즐기는 여름 더위해소용 먹거리였다. 매년 6월이 되면, 전국각지에서 원나라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황궁에 진상하는 과일이 속속 올라왔고, 그 중에 수박도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최초로 수박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고고학적으로 이미 발견되었다.

 

중국고인들이 가장 먼저 '수박을 먹는' 장면은 내몽고 요나라때의 묘장벽화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장의 발견은 아주 의외였다. 1995년 가을, 오한기(敖漢旗) 사가자진(四家子鎭) 염장자촌(閆杖子村)의 농민이 땅을 파다가 놀랍게도 3개의 고대묘장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오한기박물관은 보고를 받은 후 즉시 상급기관에 보고했으며, 상급기관의 동의를 받아 발굴작업을 했으며, 많은 진귀한 문화재를 발굴해낸다.

 

가장 놀라운 것은 1호묘장 묘실의 동쪽벽에 그려진 3개의 "수박"이었다. 이것은 예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

 

"수박"은 묘주인의 "연음도(宴飮圖)"에 나타난다. 전체 "연음도"는 너비 132센티미터, 높이 135센티미터이고 장면은 아주 풍성하다. 화면에 4명의 남자가 있는데, 그중 묘주인은 몸을 반쯤 틀어서 오른 쪽을 보고 검은색 의자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고, 오른 팔은 의자 등받이 위쪽에 걸치고, 왼쪽팔은 왼쪽 무릎을 누르고 있다; 몸에는 붉은 색의 소매가 좁은 장포를 입고 있고, 허리띠를 매고, 발에는 붉은색의 신발로 작은 받침대를 밟고 있다. 머리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있고, 벽화의 머리부분은 약간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눈썹과 긴수염은 볼 수가 있다....오른쪽의 두 명의 시종은 모두 목부분이 둥글고, 소매는 좁은 장포를 입고 있다. 전자는 복두를 하고 있으며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서 두 손으로 해당반(海棠盤)을 들고 공손하게 바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후자는 전모(氈帽)를 쓰고 두 손을 큰 방반(方盤)을 들고 있으며 안에는 먹을 거리를 넣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묘주인의 앞에 놓은 흑색방탁(方卓)위에 두 그릇의 과일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대나무로 역은 낮은 그릇안에 석류, 복숭아, 대추등 과일을 담아두었고; 다른 하나는 흑색의 원반내에 3개의 수박을 담아두었다.

 

 

이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거란귀족(묘주인)의 생활방식은 아주 대단했다는 것이다. 식용과일도 풍성했다. 이런 상황은 <요사>에 기록된 거란황실, 귀족이 과일을 많이 먹었다는 것과 부합한다. 오늘날에도 정식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는 과일후시이 올라오는데, 놀랄 정도로 닮았다.

 

고증에 따르면, 이 묘는 요성종 야율융서 태평6,7년(1026년,1027년)에 만들어졌다. 즉, 이 3개의 수박은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의 것이다. 중국고대회회에서 발견된 최초의 3개의 "수박"인 셈이다.

 

수박은 일찌기 귀족들의 여름소비품이었다. 그렇다면, 일반백성들은 언제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을까? 이것을 알아보는데는 홍호(洪皓)라는 남송관원에게 감사해야 한다.

 

홍호는 송휘종 정화5년(1115년)에 진사가 되고, 영해주부, 수주동록을 지낸 바 있다. 건염3년(1129년), 송고종 조구의 인정과 신임을 받아 홍호는 명을 받들어 예부상서의 신분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송과 금의 화평을 추진했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를 모셔오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금나라에 15년간이나 억류되어 지내게 된다. 소흥13년(1143년)이 되어서야 풀려나서 남송으로 되돌아온다.

 

돌아올 때, 홍호는 금나라사람들이 뿌리는 수박씨를 가져온다. 그는 가장 먼저 황실공급용 밭에 뿌린다. 이때부터 강남에 수박을 심게 된다. 이 일은 홍호가 쓴 억류기간동안의 견문록 <송막기문>에 나타나 있다: "내가 가지고 돌아와서 지금 금포(禁圃, 황실 채마밭) 향유(鄕囿, 일반마을밭)에 모두 있다"

 

홍호의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수박 모양, 껍질색깔이 지금과 큰 차이없다는 것이다.: "수박의 모양은 타원형이며, 색깔은 아주 파란 색이며, 시간이 지나면 노란색으로 된다. 그 속은 참외와 같고, 맛이 달고 아삭하다. 가운데 즙이 있고, 아주 차갑다."

 

이후, 수박에 대한 이야기는 남송문인들의 글에서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범성대의 <서과원>에는 "년래처처식서과(年來處處食西瓜)"라는 말이 있고, 왕원량의 <통주도중>이라는 시에도 "서과황처등여직(西瓜黃處藤如織)"이라는 구절이 있고, 방회의 <추대열상칠리탄>이라는 시에는 "서과족해갈(西瓜足解渴)", 동사고의 <중복>이라는 시에는 "취습서과벽(醉拾西瓜擘)..."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들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박은 남송에서 이미 '귀족소비품'이 되었고, 당시 일반 백성들도 수박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나라문인들 중 가장 수박을 잘먹고, 수박을 먹는 이치를 얘기한 사람으로 소동파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소동파는 "서과련(西瓜聯)'을 지었다고 한다: 상련은 "좌남조북흘서과(坐南朝北齕西瓜), 피향동솔(皮向東甩)"(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앉아 수박을 먹으면서 껍질은 동쪽으로 버린다) 하련은: "자상이하독좌전(自上而下讀左傳), 서왕우번(書往右翻)"(위에서 아래로 좌전을 읽은데 책을 오른쪽으로 넘긴다). (* 이 대련은 동서남북, 상하좌우를 모두 썼다)

 

확실히 이 이야기는 후대인들의 부회이다. 소동파는 소식이고 북송의 문학가이다. 수박은 소동파가 죽은 후 4,5십년후에 홍호가 남송으로 가져온 것이다. 소동파의 생전에 북송경내에는 수박을 심었다는 기록이 없다. 설사 수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요,금 지역에서 '수입'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희귀한 과일이었다. 소동파같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자주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서과련"은 소동파의 걸작이 아니고, 명나라때 천재인 해진(解縉)의 작품이다.

 

홍호가 소흥25년(1155년) 사망할 때, 수박은 이미 대강남북의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호북성 은시시 경내에서는 남송 함순6년(1270년)에 새겨서 세운 "서과비(西瓜碑)"가 있다. 비문을 보면, 당시 수박은 이미 4가지 우량품종이 있었다: "몽두선아과(蒙頭蟬兒瓜)", "단서과(團西瓜)", "세자과(細子瓜, 御西瓜)", "회회과(回回瓜)". 앞의 3종은 이 비를 세울 때 이미 심은지 80여년이 되었고, '회회과'는 북방에서 도입한 것으로 심은지 30년이 되었다.

 

기실, 중국인이 언제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는가에 대하여, 사학가와 농학가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 '수박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주요 견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산과(國産瓜)'학파로, 수박은 중국의 원생물종이지, 아프리카원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입과'학파로, 수박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이고 중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산과 학파는 중국고대전설과 고문헌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나의 신화전설이 있는데, 수박은 신농씨가 '상백초(嘗百草)'할 때 발견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희과(稀瓜)"인데, 와전되어 '서과(西瓜)"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경.유풍>의 <칠월>에 "칠월식과(七月食瓜), 팔월단호(八月斷壺)"라는 말이 있다. 다만, "희과"와 "칠월식과"에서 말하는 "과(瓜)"가 현대의 수박일까?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1959년, "국산과"의 견해는 중요한 증거를 발견한다. 절강성 항주 수전반촌 신석기시대유적지에서 원시 "서과자(西瓜籽, 수박씨)"를 발견한 것이다. 신농씨의 "희과"전설은 마침내 사실로 변한 것같다. 중국이 수박의 원산지라는 것을 증명하였을 뿐아니라, 중국에서 수박이 재배된 역사를 4천년전으로 끌어올렸다.

 

그후, "서과자"는 한묘에서도 발견된다. 1976년, 광서 귀현 나박만(지금의 귀항시 귀성진 경내)의 서한묘에서 수박씨가 발견된다; 1980년 강소 양주 서교 간강호장 5호한묘의 수장칠사에서 다시 수박씨가 발견된다; 강소 고우소가구 동한묘에서도 수박씨가 발견된다....

 

이들 고고학적 발견에 중국농학계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다만 이들 "고고학적 발견"은 그후 하나하나 믿기 어렵다고 증명되었다. 항주 신석기시대의 '수박씨'는 감정을 거쳐 호로(葫蘆) 혹은 그 변종 호과(瓠瓜, 박)의 씨로 밝혀진다; 광서와 강소에서 발견된 수박씨는 실제로는 분피동과(粉皮冬瓜)의 씨였다.

 

사실의 앞에, '수입과'학파가 우세를 점한다. 중국의 수박은 '외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다'라는 설이 다시 국내 학계의 공인을 받게 된다.

 

만일 수박의 원산지가 아프리카라면, 언제 중국에 도입되었을까? '수입과'의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중에도 서로 이견이 있다. '한나라설' '남북조설'과 '오대설'등이 있다.

 

그중 '오대설(五代說)'이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고, 주류견해이다. 근거는 역사기록이다. 구양수가 편찬한 <신오대사. 사이부록 제이>를 보면 처음으로 '서과(西瓜)'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신오대사>의 사료출처는 호교(胡嶠)의 <함로기(陷虜記)>에 나오는 말이다. 호교는 오대 후진 화양(지금의 안휘 적계현 화양진) 사람이다. 거란 회동10년(947년), 그는 선무군절도사 소한의 장서기로 거란에 들어간다. 소한은 모반으로 고발되어 피살당하고, 호교도 연루되어 거란에 7년간 억류된다. 후주 광순3년(953년)에 비로소 석방되어 중원으로 돌아온다. <함로기>는 그가 거란에 7년간 붙잡혀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다. "평천에 들어가니 초목이 많고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거란이 회흘을 무너뜨리고 이 씨를 얻었다고 한다. 소똥을 덮은 시렁(棚)에 심는다. 크기는 중국동과와 같고, 맛이 달다."

 

여기까지 보았으면, 아마도 중국인들이 언제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는지 알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