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결빙(孟潔氷)
영국인들은 마살라치킨카레를 전통적인 영국대표요리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쿵파오치킨(宮寶鷄丁, 꿍바오지딩)을 좋아한다. 프랑스인들은 전통적인 프랑스식 꼬꼬뱅(Coq au Vin)을 숭상하고, 미국인들은 치킨수프를 맛있다고 여긴다. 닭고기는 우리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식품이 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식재료는 다원문화의 한계를 넘어서서, 세계 각지의 주방으로 퍼졌다. 그러므로, 저명한 성공학의 대가인 잭 캔필드가 자신의 베스트셀러의 책제목을 찾을 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닭고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일까?
문화와 기원
2004년, 중국과학자는 국제적 유전학자들과 공동으로 완벽한 닭의 유전자지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하여 닭의 60%의 유전자는 인류와 같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리고 인류와 3.1억년전에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는 것도 밝혀낸다. 세계에서 최초로 유전자배열이 완성된 가축으로서 닭의 유전자지도는 인류의 진화에 아주 중요한 연구가치를 제공했다.
현대DNA연구에 따르면, 야생들닭(gallus gallus, 적색야계라고도 부름)이 닭의 직계조상이다. 야생들닭은 처음에 중국남부와 인도북부에 분포되어 있었고, 인류의 수천년 문화교류, 상업무역 및 이주정복을 거쳐, 순화된 집닭이 아시아의 밀림에서 세계각지로 퍼져나간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집닭은 북으로 가서 한반도를 통하여 일본에까지 전해진다. 인더스강 계곡은 집닭이 서쪽으로 확산된 시작점이다. 4000여년전, 하라파문명의 도시와 중동은 무역왕래가 빈번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출토문물과 닭뼈화석을 보면, 집닭은 고대인도 서해안의 항구 로탈(Lothal)에서 아랍반도로 갔고, 육로를 통하여 페르시아를 거쳐 그리스, 시리아 및 바빌로니아로 전해진다.
지중해연안에서 고고학자들은 기원전800년을 전후한 닭뼈화석을 발굴한다. 인도에서 집닭을 도입한 후, 닭고기는 로마인이 자주 먹는 음식이 된다. 닭고기를 즐겨먹던 로마인은 각양각색의 요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달걀말이와 속을 채운 닭구이가 있다. 호화사치스러운 음식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로마의 농민들은 살찌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어떤 사람은 와인에 절인 호밀빵을 닭에게 먹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허브, 보리와 도마뱀의 지방을 섞어서 사료로 삼기도 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기원전1세기, 고대로마의 종교학교의 사제는 풍성한 만찬을 준비했는데, 식탁에는 밀가루를 발라서 기름에 튀긴 닭이 주요리였다고 한다.
기원전161년, 사회의 도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사람들이 지나치게 사치를 추구하는데 대하여, 로마공화국은 법령을 반포하여, 사람들이 매끼니당 먹는 닭의 수량을 제한한다. 매 식탁에 최대 1마리의 닭을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사료를 많이 먹여서 기른 닭이 아니어야 했다. 얼마후 로마의 요리사들은 발견하게 된다. 거세한 수탉은 살이 잘 붙는다. 그래서 거세한 수탉이 나타나게 된다.
런던대학 고고학교수인 케빈 맥다나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 "닭의 머리는 철기시대로 되돌아갔다" 그는 추측한다. 로마시기에 사람들은 닭은 기르기 위하여 완비된 설비의 대형 양계장이 있었다고. 나중에는 점차 소실된다. 닭의 유럽에서의 지위는 날로 떨어져 점차, 거위와 꿩과 같은 가금류로 대체되고 만다.
중세에 들어, 유럽인의 음식은 여전히 빵등 곡물류음식이 위주였다. 동물단백질의 중요자원인 닭고기, 돼지고기와 유제품은 가격이 비쌌다. 주로 부자들이나 즐겼다. 영국작가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에 따르면, 가난한 농민들이 통상 먹는 것은 검은 빵이고 우연히 달걀 한 두개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단백질식품이 아주 결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업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유럽인들의 음식구조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갈수록 많은 가축과 달걀류가 식탁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식용이 가장 보편화된 가금류이 닭고기는 다시 한번 상류사회의 맛있는 음식으로 되고, 성대하고 호화로운 연회에 나타난다. 당시 유럽의 음식문화는 입맛이 온화한 닭고기는 쉽게 소화된다고 여겼다. 살찌고 부드러운 거세한 수탉고기는 사치품으로 여겨서 부자들이나 살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의 저작 <데카메론>에서 거세한 닭은 부자상인들이 손님을 대접할 때의 주요 요리였다. 그리고 병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영단묘약이었다. 그리고 농장주가 친구들에게 감사의 답례를 할 때 귀중한 선물이었다.
16세기의 프랑스에서 국왕 앙리4세는 사보이 공작과 얘기를 하면서, 이런 명언을 남긴다: "나는 모든 농부가 주말마다 최소한 닭고기탕을 한 그릇씩 먹기를 바란다." 식탁에 닭고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인민의 생활수준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앙리4세의 통치후기, 프랑스군주정체는 공고화되고, 경제도 점차 회복된다. 프랑스인들은 주일에 닭을 먹는 전통이 형성된다. 그 후, 삶은 닭은 프랑스가정의 주일저녁식사나 명절의 주요리가 된다. 프랑스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닭을 길러낸다: 풀레 데 브레스(Poulet de Bresse). 이 닭은 프랑스 동부의 브레스지방에서 나오는데, 신선하고 부드럽고 품질이 좋다. 그래서 음식의 기적이라고 불리운다. 비록 가격은 비싸지만, 여전히 고급요리사와 미식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규모 양계
16세기, 투계(鬪鷄)는 영국에서 급속히 발전한다. 국왕 헨리8세는 화이트홀 궁에서 투계를 거행한다. 그리하여 이 게임이 영국을 풍미하는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된다. 1849년, 영국이 빅토리아여왕은 황실법령을 반포하여, 투계활동을 금지한다. 투계붐이 지나간 후, 양계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취미생활이 된다. 1849년, 잉글랜드 중부에서 버밍햄박람회가 개최된다. 중국에서 간 교지계(交趾鷄)가 인기를 끈다. 이렇게 품질이 뛰어난 닭은 체형이 컸고, 전신이 털로 덮여 있었다. 영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사람들의 가금에 대한 열기가 고조된다.
19세기 후반, 이 가금붐은 대서양을 넘어가서 미국의 동해안을 석권한다. 양계는 미국인들의 사이에서 날로 인기있는 취미가 된다. 1873년, 미국가금협회는 표준을 제정한다. 농민들이 선택적으로 순종닭을 선택적으로 기를 수 있게 도와준다. 1880년, 미국의 인구센서스때 처음으로 닭의 수량을 통계낸다. 당시 전미국에 1.02억마리의 닭이 있었다. 1890년에는 2.58억마리로 급속히 늘어난다. 1891년, 코넬대학은 처음으로 가금사육과정을 제공하는 농업대학을 둔다. 양계는 가정농장의 부업에서 대교모산업화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초반, 닭은 미국인의 음식습관과 경제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와 돼지가 기계화도살장을 표지로 하는 산업화시대에 들어선 후, 닭은 여전히 소규모 양계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항생제와 비타민을 첨가한 사료가 나타나서 이 업종에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25만마리의 닭을 기르는 대형농장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농업분야에서 비타민D는 닭고기가격에 영향을 주는 중요요소가 된다. 과학자들은 발견했다. 비타민D가 결핍되면 신진대사의 장애가 오고 구루병에 걸린다는 것을. 닭도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태양을 쐬면 스스로 비티민D를 합성해낼 수 있고, 골격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야외에서 닭을 기르는 것은 날시와 질병등 불확정적인 요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닭사료에 어간유(魚肝油)를 넣고, 대형닭장을 지어, 온도, 사료 및 조명을 통제하여 달걀의 무게를 늘이게 된다.
1928년 대통령선거기간동안, 공화당 후보자인 후버는 경선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만일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인들은 영원히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고, "모든 집의 냄비에는 닭이 있게 될 것이다" 후버 대통령은 당연히 이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다. 곧이은 대공황으로 수백만의 소규모농장이 문을 닫고, 경제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1933년 4월, 미국국회는 <농업저당법안>을 통과시킨다. 가급양식농가에 대하여 단기대출금을 주어 농민들이 닭고기와 달걀의 생산을 촉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닭과 달걀의 생산량이 많이 늘어난다. 어떤 농민은 현대화된 달걀농장을 전문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달걀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다. 베티 맥도날드의 회고록인 <달걀과 나> 및 같은 영칭의 영화에서는 이런 미묘한 경제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이를 보면 모든 예술창작은 생활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기간동안,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부족하여, 닭고기는 단백질을 공급할 필요에 따라 날로 증가한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식용으로 삼는 주요 고기류가 된다. 전후 미국의 양계업은 북에서 남으로 이전한다. 남부는 조건이 좋고, 기후도 온화하고 적절하다. 곡물운송도 편리하다. 그리하여 닭고기 가격은 더욱 싸지게 된다. 곡물을 높은 효율로 단백질화 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의 닭의 생산은 원가가 더욱 싸지게 된다. 살아있는 닭의 1파운드에 겨우 2파운드의 사료가 필요할 뿐이다. 이는 1945년의 절반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1파운드의 소고기를 생산하는데는 7파운드의 사료가 필요하고, 1파운드의 돼지고기를 생산하는데는 3파운드의 사료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유전학과 자동화를 통하여 양계의 이윤을 제고시켰다. 현재 가장 선진적인 닭장은 두 개의 축구장크기만큼 크다. 1시간마다 자동으로 사료와 물을 보내고, 닭장의 아랫쪽은 약간 기울어져 있어, 생산된 달걀은 콘베이어벨트로 계속 나온다. 자동으로 씻고, 등급을 나누고 포장된다. 오늘날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닭고기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은 거대한 변화이다. 이는 주로 과학기술과 시장이 서로 다른 시대에 취득한 놀라운 진보이다.
신선하고 맛있는 닭고기는 전세계에서 환영받고 있다. 사람들이 요리솜씨를 뽐내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닭고니는 세계각지에 여러가지 서로 다른 요리법이 있다. 많은 특색을 지닌 요리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전통적인 청돈계탕(淸燉鷄湯), 일본식의 조소계육(照燒鷄肉), 페스토를 뿌린 닭고기스파게티가 있다. 닭고기를 요쿠르트와 향료에 담근 후, 막대기에 꽂아서 구운 다음 카레즙을 뿌리면 바로 전통적인 영국요리 마살라카레치킨이 된다.
지금, 닭은 지구상의 수량이 인류를 훨씬 넘어섰다. 거의 인류의 3배이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닭은 우리를 위하여 문화, 종교와 미식을 제공하는 서사시의 전설을 이루었다 맛있는 달걀말이, 닭고기튀김, 닭고기찜등의 요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를 위하여 재미있는 문제의 답안도 제공한다. 진화사기 기하여, 과학자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초식공룡은 일반적으로 마미초와 고사리류(蕨類)의 식물을 먹었다. 그들의 고기는 가금육과 유사하고, 소갈비나 돼지갈비와는 다르다. 그 맛은 오히려 조류에 유사할 것이다. 매 혹은 닭.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자연역사박물관에 가서 부모에게 "공룡고기는 무슨 맛입니까?"라고 물으면, 가장들은 이제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닭고기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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