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중국에서 젓가락의 유래

중은우시 2013. 2. 4. 20:04

글: 고성연(高成鳶) 

 

18세기에야 비로소 영국여왕은 포크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 법을 익혔다. 그때 어떤 수도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주신 손가락은 어디에 쓸 것인가? 중국인도 밥을 먹을 때 손가락을 사용했었다. <예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할 때 땀이 나는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식사도구로 손가락을 대체하였는데 서방보다 수천년이 앞선다.

 

젓가락(子)의 옛 명칭은 "저(箸)"이다. 다롄(大連)에는 "중국저문화박물관"이 있고 규모가 제법 크다. 이 박물관에서는 얼마전에 타이완 고궁박물원의 초청으로 타이완에서 전람회를 연 바 있고, 학술계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화교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학자는 "젓가락문화권"이라는 용어도 만들었으며, "한자문화권"보다 더 넓다고 하였다. 과학자인 이정도(李政道)는 젓가락에는 심오한 철리(哲理)가 있고, 중국인들이 총명한 것은 젓가락과 관련이 있다고도 말했다.

 

본인은 다롄의 "저문화연구소"의 요청으로 연구할 때, 이미 출판된 젓가락에 대한 전문서적은 전혀 없었다. 왜 중국문화에는 오랜 옛날부터 젓가락이 있었을까? 그래서 자신의 "기아문화(飢餓文化)"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해보고자 시도해보았다.

 

중국의 선주민들은 일찌기 조밥(粟飯)을 먹었다. 유목민족이 구운고기를 손으로 잡고 뜯어먹던 것과는 달리, 쌀밥은 작은 공기에 덜어서 입으로 가져가서, 간단한 도구를 써서 "후루룩"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젓가락을 발명했을까? 고대에 확실히 밥을 긁어먹는 "비(匕)"가 있었다. 출토된 석기시대의 골비(骨匕)를 보면, 모양은 비수와 같으나, 칼이 무디다. 밥을 입에 퍼넣고, 고기를 바르는 두 가지 용도가 있다. 나중에는 죽을 먹는 "시(匙, 숟가락)"가 되어 '비'와 함께 쓰인다. 청나라때 책에서는 숟가락, 젓가락을 나란히 쓴다.

 

죽의 원래 뜻은 푹삶은 고기이다. 나중에 중국에서 육식이 부족해지자, 선주민들은 "낱알"을 먹는 것으로 바뀐다. 귀족만이 고기를 먹었다. 백성들은 고기탕에 마른 낱알을 넣어서 먹었다. 고기가 더 적으면 야채를 넣어서 죽으로 만들었다.

 

<한비자>에는 상주(商紂)가 이미 상아젓가락을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젓가락의 발명은 오래 되었고, 원래의 이름은 "목협(木夾)"이라고 불렀다. 추정해보면 갈라진 나무가지를 가지고 젓가락처럼 작은 먹을 거리를 집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개선되어 두 개의 작은 막대기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었을 것이다. 먼저 '비' '시'가 있었는데, 왜 다시 간단한 나뭇가지를 꺽어서 먹었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밥을 밀어넣고, 고기를 바르고, 죽을 퍼먹는 외에 음식과정에서 어떤 동작이 '비' '시'만으로 불편하게 느끼게 만들었을까? 이것은 젓가락이 탄생한 핵심이다.

 

연구자들이 고대문헌을 뒤적여보았고, 젓가락의 사용에 관하여는 단 한마디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기.곡례>에 나오는 말이다: "죽에 야채가 있으면 목협(木夾)을 사용하고, 야채가 없으면 목협을 쓰지 않는다." 주석에서 목협은 젓가락이라고 단언했다. 같은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기장(黎)을 먹을 때는 저(箸)를 쓰지 말라." 고인은 주석에서 젓가락을 써서 식사를 못하게 한 것은 음식이 식어서 손이 뜨겁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음식을 앞다투어 먹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 야채가 든 죽을 먹을 때만 젓가락 사용을 허용했을까? 역대이래로 아무도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지는 않았다.

 

본인은 중국의 노인공경문화를 연구하다가 음식사에 흥미가 일어나서 특수한 시각을 가졌다. 그래서 새로운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인공경문화는 노인을 응집의 핵심으로 하고, 예의는 좋은 음식은 노인에게 바쳐서 장수와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중 노인은 가급적 '고기'의 영양을 많이 섭취하도록 한다. 유가경전에서는 반복하여 70세노인은 "무육불포(無肉不飽, 고기가 없으면 배가 부르지 않다)"고 강조하고, 어린아이는 배고파도 돌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빈민의 야채죽에는 고기가 조금만 들어간다. 집안식구들이 같이 식사할 때, 당연히 건져내서 노인에게 먹게 한다. 그래서 젓가락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야채가 없는 죽 즉 순수한 고기로 된 경우에는 그냥 마시면 되고, 젓가락이 필요없다.

 

이런 해석은 중국의 요리가 먼저 가늘게 자르고, 칼솜씨를 중시하는 특징에서도 확인된다.

 

송나라때 문화의 중심은 물이 많은 남쪽으로 바뀐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주(住)"라는 말을 꺼린다. 그래서 "주"와 발음이 비슷한 "저"를 쓰지 않고, "쾌"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쾌자'라는 언어와 관련이 있다. 더 생각해보면 젓가락을 사용하여 집는 것은 '지시'라는 선행동작과 '집는다'는 후속동작으로 나뉘어진다. 그래서 문자학으로 보면 "저(箸)"는 "자(者)"(여기서는 지시대명사로, 당나라때 '자개(者個)'는 후에 '저개(這個, 이것)'로 바뀌었다), "착(着, 동사로 著와 같다)"과 서로 통한다.

 

저문화박물관의 유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위의 견해는 이미 <중국저문화사>에 수록되었고,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인정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