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복녕객(福寧客)
역사상 가장 가련한 황제를 꼽으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중종 이현을 떠올릴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 가련한 남자 겸 황제는 먼저 보기드문 강한 모친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음란한 처가 있었고, 더더구나 그를 황제에 오르는데 걸림돌이라고 여기는 딸까지 있었다. 모친, 처, 딸, 남자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세 명의 여인이 모두 그에게는 냉혈, 악독, 잔인의 대명사이다. 결국 처와 딸이 힘을 합쳐서 그를 독살한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히 수수께끼이다. 진실한 역사는 어떠한 것일까?
당연히 신, 구 <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당중종 이현은 독살되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산기상시 마진객은 의술로, 광록소경 양균은 요리를 잘해서 자주 궁중을 드나들었고, 위후와 관게를 가진다. 이 일이 누설되면 주살될까봐 겁을 냈다; 안락공주는 위후가 임조(臨朝)하여 자신이 황태녀(皇太女)에 봉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로 공모하여, 병담(餠餤, 떡)에 독을 넣는다. 육월, 임오, 중종이 신룡전에서 붕어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위황후의 두 애인인 양균과 마진객은 황후와 사통한 사실이 누설될까봐 우려하였고, 위황후는 황제에 오르고 싶었고, 안락공주는 모친을 황제로 만들고 자신은 황태녀가 되고자 했다. 이 몇 세력은 당중종을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공모하고, 양균과 마진객이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서 한 명은 떡을 만들고 한명은 그 안에 독약을 넣는다. 몇 사람이 업무를 분담하여 향이 좋은 독이 든 떡을 만들어 낸다. 이 독이 든 떡을 어떻게 당중종에게 먹였을까? <자치통감>에는 아무런 말도 쓰여 있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드라마와 영화에서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었다.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상상은 당중종이 한 밤중에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을 때, 돌연 배가 고팠다. 뭔가를 먹고 싶었는데, 안락공주가 웃으면서 나타나고, 손에는 떡이 한 접시 들려 있었다. 부황이 배고프실까봐 야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당중종은 딸이 이처럼 다정하게 나오자 감동하여, 한번에 다 먹어 버린다. 그런데 다 먹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복통이 그치지 않고 칠공에 피가 흘러나오면서 목숨이 끊어진다. 대체적인 스토리는 <수호전>의 반금련이 무대랑을 독살하는 광경과 비슷하다.
이 주장의 합리성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자치통감>은 경룡4년의 오월, 즉 당중종이 사망하기 1달전의 일을 특별히 적어 놓는다: "오월, 정묘, 허주동병참군언사 연흠융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황후가 음란하고, 국정에 간여하며, 종족이 강성하다; 안락공주, 무연수, 종초객은 종사를 위험하게 할 일을 도모한다." 누군가 황후가 음란하고, 공주, 부마와 대신이 역모를 꾀한다고 상소문을 올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중종은 당연히 상소를 올린 염흥융을 불러서 물어봐야 했다. 만일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국가의 정치재난이므로 신중하게 대해야 했다; 만일 무고라면, 상소를 올린 자 본인은 만겁불복(萬劫不復)에 빠질 것이다. 당중종의 준엄한 질문에 연흠융은 원래의 주장을 고집하고 대의늠름하였다. 기실 당중종은 자신의 처와 딸에 대하여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연흠융이 대전을 나서자, 위후의 일당인 재상 종초객이 보낸 사람에게 대전의 앞에서 살해당한다. 대담하게 진실을 말하던 신하가 대전의 계단에 피를 뿌린 것이다. 당중종은 비록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처와 딸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한다. 위황후의 그녀의 일당은 그제서야 걱정하기 시작한다. 대책을 생각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대책을 마련했을까 그것은 바로 당중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위후와 안락공주는 권력을 쟁탈하고, 죄행을 숨기기 위하여, 한 명은 남편을 모살하고, 한명은 부친을 모살한 것이다. 정말 인륜은 바닥에 떨어졌고, 백번 죽어 마땅한 일이다. 다만, 우리도 알고 있다. 역사는 모두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을.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궁중투쟁의 패배자이다. 발언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정은 정말 그렇게 된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비록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권력에 대한 열망을 지닌 것은 다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때의 사망은 약간 돌연하다. 비록 모든 사서는 입을 모아서 당중종이 처와 딸에게 독살되었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래도 다르게 생각한다. 중종은 아마도 독살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런가?
당중종이 독살되었다는 내용을 <구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저 시간이 더욱 뒤인 <신당서>와 <자치통감>에서 사람들이 안락공주가 태의(太醫)와 공모하여 당중종을 독살한 것으로 의심하지만 확정인되지는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위후가 중종을 독살하는 것은 아주 멍청한 행위였다. 그녀가 권력을 조종하던 것을 보면 이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외에 위후는 이융기에게 피살된 후, 1품고명부인의 대우를 받으며 후장되었는데, 만일 그녀가 정말 흉수라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상을 종합하면, <신당서>와 <자치통감>의 위후가 당중종을 독살하였다는 기록은 엄근(嚴謹)하지 못했고, 역사를 날조한 혐의가 있다.
그 뜻은 위후가 종초객과 혼외정사를 즐기는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들을 침대로 불러들였다. 그녀와 함께 잠을 잔 남자들 중에는 산기상시(황세 시변의 시종) 마진객이 의술에 정통했고, 광록소경(음식담당관리) 양균은 요리의 고수이다.
위후는 마진객, 양균과 사통한 일이 드러나면 당중종이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황태녀가 되기를 갈망하는 안락공주와 상의한 후, 마진객과 양균으로 하여금 독이 든 떡을 만들게 한다. 그 후에 다시 안락공주가 당중종에게 먹여서, 당중종은 즉시 사망한다.
위후는 음란한 행위로 궁중을 어지럽혔는데, 당중종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어찌 위후가 갑자기 들통날 것을 겁냈단 말인가> 당중종이 살아 있을 때, 위후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시시때때로 위후모녀를 비호해 주었는데, 위후모녀가 왜 그를 독살한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당중종이 살아 있어야, 그의 명의로 위후모녀는 정정당당하게 안국상왕 이단, 태평공주등 반대세력을 억누를 수 있다. <구당서>에서 안락공주를 언급할 때 그녀가 황태녀에 오르고 싶어했다는 말만 적었지, 그녀가 부황을 독살했다고 적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면, 위후모녀가 마음이 급해져서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황제를 독살하였다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아마도 나중에 시류에 편승한 자가 만든 거짓말일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중종이 만일 독살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어찌 이렇게 돌연사하였을까? 왜 죽기 전에 아무런 징조도 없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이현의 가족유전병력을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모두 알다시피, 이당가족은 심뇌혈관의 유전병력을 지니고 있다. 당고조, 당태종, 장손황후, 당고종이 모두 "기질(氣疾)", "풍질(風疾)"같은 류의 병을 앓았다. 이것은 고대에 심뇌혈관류의 질병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당왕조의 황제들은 장수하지 못했다. 당태종은 52살까지 살았고, 당고종은 56살까지 살았다. 부친과 할아버지의 수명과 비교하면, 이현이 55세까지 산 것은 정상적이다. 그외에, 비록 어떤 심뇌혈관질병환자는 명백한 증세를 나타내고 발병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예전의 당고종같은 경우이다. 젊었을 때부터 병에 시달렸다. 다만, 어떤 심뇌혈관은 갑자기 발병하고, 사망률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류의 병은 오늘날에도 자주 의사들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하물며 1천여년전의 당나라임에야. 그래서 이현이 사전에 아무런 질병증세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돌연 급사하더라도, 심뇌혈관질병의 일반적인 규칙에 들어맞는다. 이렇게 보면, 사서에서 위후모녀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은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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