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탈라스전투: 중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잃은 결정적인 전투

중은우시 2013. 8. 5. 01:11

글: 정소봉(丁少鋒) 

 

 

 

일찌기 한나라때, 중국은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했다. 당나라중기에 이르러 서부의 여러 나라들은 당나라중앙정권에 복속한 곳이 많았고, 서부의 대국들은 당나라의 위세에 눌려 감히 동쪽으로 확장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탈라스전투는 이 국면을 타파하게 된다. 중국인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상실했고, 몽골군대가 석권할 때가 되어서야 다시 몽골인이 이곳의 패주지위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한인의 군대는 청나라이전까지 근 8백년동안 다시는 이 토지를 밟지 못하게 된다.

 

1. 전투의 원인

 

천보(天寶) 초년, 토번(吐藩)은 무력으로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케시미르의 키르키트)과 정략결혼을 맺는다. 소발률은 토번에서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있고, 서북 20여국이 모두 토번이 복속하고 있었으므로, 당나라에 대한 조공이 중단되게 된다. 당시의 사진절도사인 전인완(田仁琬)은 일찌기 3번이나 토벌에 나섰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고선지(高仙芝, 고구려유민)가 747년 당현종에 의하여 행영초토사(行營招討使)에 임명된다. 그는 보병,기병 1만을 이끌고 장거리원정을 떠난다. 고선지는 안서에서 출발하여, 백여일만에 연운보(連雲堡, 소발률 서북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의 사르하드)에 도착한다. 연운보는 지세가 험준하고, 만명의 토번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만 고선지의 지휘하에 당나라군대는 용맹하게 싸워서 반나절만에 이 성을 점령한다. 그후 고선지는 병력을 이끌고 계속 깊이 들어간다. 험준한 탄구령(坦駒嶺)을 넘어 아노월성(阿弩越城)으로 들어가서 소발률국을 평정하고, 소발률국왕 및 토번공주를 생포한다. 이 전투이후, 당나라군대는 서역에 위명을 떨친다.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에 발탁된다.

 

750년, 고선지는 다시 명을 받아 군대를 출격시켜 토번에 귀부한 거사국(車師國)을 격파하고, 그 국왕 발특몰(勃特沒)을 포로로 잡는다. 이 두 번의 어려운 원정의 성공으로 고선지는 서역에서 큰 명망을 얻는다. 이는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확장하는 최고봉이 된다. 이때, 중국은 이미 타림분지, 이리강유역과 이식쿨호수지구의 점유자가 되고 타쉬켄트의 종주국이 된다. 당나라는 파미르지구를 통제하고 토하라지역을 지배하고, 카불과 캐시미르의 보호자가 된다. 고선지는 대당의 중앙아시아 총독이 된다. 거의 동일한 시기에 아랍국내에 혁명이 일어난다. 750년 압바스왕조(깃발은 흑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흑의대식이라고 부른다)가 우마이야왕조(깃발은 흰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백의대식이라 부른다)를 대체했다. 초보적으로 토번과의 문제를 해결한 후, 고선지는 이 대식의 왕조교체, 하중반란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용하여, 대식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당왕조의 영향력을 파미르고원바깥까지 확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석국(石國)이라는 서역의 소국이 희생양이 된다.

 

750년, 당왕조의 통치자는 서역번국인 석국이 "무번신례(無番臣禮)"했다는 이유로, 당나라 안서절도사 고선지에게 병력을 이끌고 정벌하게 한다. 석국은 투항을 청하고, 고선지는 이를 받아들인다. 얼마후, 고선지는 약속을 어기고, 석국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도살을 한다. 남자는 잡아가고, 노인, 부녀와 아동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재물을 약탈하며 석국의 국왕을 포로로 잡는다. 751년 정월, 고선지는 입조하여 포로로 잡은 몇몇 국왕을 당현종에게 바친다. 그리고 혁혁한 전공으로 우우림대장군의 직위를 수여받는다. 그리고 석국국왕은 참수한다. 이때 고선지는 그의 생애에서 최고봉을 맞이한다. 요행히 도망쳐 목숨을 구한 석국의 왕자는 대식(아랍제국)의 압바스왕조(흑의대식)에 구원을 청한다. 대식의 원군은 당나라의 서역사진을 습격하고자 계획한다. 고선지는 선발제인(先發制人)으로 먼저 대식을 공격한다. 고선지는 대당연합군을 이끌고 원거리를 달려가서 7백여리를 들어간다. 나중에 탈라스에서 대식군대와 만난다.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수립하려면 반드시 아랍을 격패시켜야 했다. 아랍도 중앙아시아를 완전히 통제하려면 당나라의 도전을 물리쳐야만 했다.

 

2. 전투과정

 

751년 4월, 고선지는 군대를 이끌고 안서를 풀발하여 파미르고원을 넘고, 사막을 건너 3개월의 장거래행군끝에 7월경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성아래에 도착한다. 성안에는 이미 아랍군 수천명이 먼저 들어가서 방어하고 잇었다. 당나라군대는 탈라스성(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잔부르성 부근)을 포위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아랍의 사서인 <창세와 역사>에 따르면, 아랍인은 고선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바스라의 동방총독 아이부, 무스린은 즉시 명령을 내린다. 부장인 사이드 본 호우메이드가 수천이 넘는 부대를 이끌고 먼저 탈라스 성으로 들어가 지킨다. 방어를 강화하며 대군이 집결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아이부 무스린이 자신의 1만명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가서 대전을 준비하고, 지야드와 또 다른 장수인 압달 우드 하리드 본 이부라힘 주허리는 하중의 주둔군 1만명을 소집하여 신속히 탈라스로 보낸다. 고선지는 5일간 공성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아랍의 원군이 도착하여 배후에서 당군을 습격한다. 쌍방은 탈라스강의 양안에서 지금의 아오리 아타 부근에서 결전을 벌인다. 갈라록(葛邏祿)부의 고용병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킨다. 당나라군의 진영은 일시에 대란이 일어난다. 아랍연합군은 그 기회를 틈타 중기병으로 당나라군진영의 중심으로 돌격한다. 연일 전투에 지친 당군은 내외협공하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궤멸한다. 고선지는 밤을 틈타 단기로 도망친다. 이사업, 단수실은 흩어진 병력을 모아서 안서로 도망친다. 도중에 마침 중국연합군중 발한나(拔汗那)병도 이곳까지 도망쳐 있었다. 병마가 함께 모이다보니 길이 막혔다. 이사업은 아랍의 추격병이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여 동맹군에게 손을 쓴다. 몽둥이를 휘둘러 백여명의 원래 같은 대당연합군에 속한 발한나 군사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혈로를 뚫고, 잔여 당나라군사들은 통과할 수 있었다. 이전에 이사업은 고선지에게 병력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권한 적이 있는데, 단수실에 의하여 "적을 겁내서 도망치다니 용감하지 못하다. 자신은 도망치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다니 인자함도 없다."라고 욕먹은 바 있다.

 

잔병을 수습한 후, 고선지는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반격을 할 계획을 세운다. 이사업등이 말려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 나중에 고선지는 잔병을 이끌고 안서도 도망친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군대의 손실은 엄청났다. 2만명의 안서 정예부대가 거의 전멸한다. 전사한 자와 포로로 잡힌 자가 반반쯤 되었다. 겨우 천여명만이 생환한다. 아랍은 반란을 평정하는데 바쁘고, 중앙아시아을 지키는데 만족하여 더 이상 확장해오지는 않았다.

 

3. 전투의 결과

 

탈라스전투이후, 안서도호부의 정예병력은 거의 잃어버린다. 다만 성당시기의 회복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겨우 2년만에 안서절도사로 승진한 봉상청(封常淸)은 753년 토번의 통제를 받던 소발률(지금의 캐시미르 서북의 팔리티스탄)으로 진격하여 대파하고 항복을 받아낸 다음 귀환한다. 이는 안서도호부의 실력이 이미 대체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일 안사의 난이 아니었다면, 안서도호부는 아마도 다시 아랍인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고선지는 패퇴이후에도 여전히 당현종의 중용을 받는다.

 

755년 십일월, 안록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 고선지는 명을 받아 반군을 토벌하러 간다. 방어가 허술하고 병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동관을 지킨다. 이 고구려족의 명장은 자신의 탁월한 군사재능을 발휘하여 한 때 장안의 문호를 지켜낸다. 유감스럽게도, 얼마후 당현종은 참언을 듣고, 고선지를 죽이게 된다. 그후 당왕조는 점차 번진할거상태로 접어든다. 다시는 예전의 휘황함을 되찾지 못했다. 서역의 패권도 성당의 붕괴와 더불어 소실된다. 탈라스전투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부 무스린은 공고진주(功高震主)로 모살당한다. 수하대장인 지야드 이븐 살리도 처결당한다. 이로 인하여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다. 아랍은 난을 평정하느라 바빴고,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당왕조가 건립한 패권을 넘겨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중국쪽에서도 몇년후 안사의 난이 발발하여,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하게 되어 아랍과 중앙아시아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거을 포기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토번의 굴기는 아랍인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되고, 당왕조의 서부영토는 더 이상 잠식당하지 않게 된다.

 

서방학자인 르네 그루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제국내부의 그 내란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몇년만에, 그들은 아랍인의 수중에서 그들의 패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후 발발한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군은 이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만다. 바로 이 제국내부에서 8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강성한 재국의 거의 모든 재부를 소진하게 된다. 그 때부터 쇠락이 시작된다. 폐허에서 재건된 그 제국은 이미 옛날의 천가한(天可汗)제국이 아니었다. 792년 토번인이 제국의 타림분지상의 최후거점을 함락시킨다. 한인의 군대는 청나라이전까지 근 8백년간 이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