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의 후궁관리제도

중은우시 2014. 2. 10. 21:01

글: 문사열독(文史悅讀)

 

이런 말이 있다. 후궁분대삼천(後宮粉黛三千). 실제로, 역대후궁의 궁녀의 인원수는 이 숫자를 훨씬 뛰어넘었다. <수서>에 땨르면 수양제때 궁녀의 수는 십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가 건립된 후 초기에는 국력이 약하며, 인심을 다독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당고조 이연은 일부 궁녀를 궁에서 내보내는 조치를 취해서, 그녀들이 마음대로 시집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때 한꺼번에 궁녀 3천여명을 내보낸다. 당태종때에 후궁의 궁녀는 여전히 수만명이었다. 당현종때, 궁녀의 수량은 한 때 6만여명에 이른 적도 있다. 당나라때의 다른 시기에는 궁녀의 수량이 최소한 만명 이상이었다. 궁녀의 수가 이렇게 방대한데, 그녀들의 후궁에서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당나라는 아주 인간적인 왕조였다. 이 점은 여성을 대하는 문제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 혼인에서, 그녀들은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주도적으로 이혼을 제안할 수 있고, 심지어 협의이혼도 가능했다. 복장에서도 그녀들이 남자옷을 입고 싶으면 남자옷을 입었다. 가슴을 드러내고 싶으면 가슴을 드러냈다. 얼마를 드러낼 것인지도 자신이 정했다. 민간의 여자가 이러할진대, 궁안의 여자들에 대한 대우는 더욱 좋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당중종때, 황제의 비(妃)는 궁밖에 주택을 지어 단독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용돈이 필요하면 용돈을 주었다. 노비가 필요하면 노비를 주었다. 그리고 황궁내에서 매일 황제를 모실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나라의 후궁시침제도이다. 시간안배이건, 인원선택이건 모두 인간적인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대명궁은 규모가 아주 컸다. 명청시기의 자금성에 비하여 3배 크기이다. 장소가 넓으니, 그 안에 사는 사람도 자연히 많았다. 다른 왕조는 "후궁가려삼천(後宮佳麗三千)"이지만, 당나라는 깜짝 놀랄 수준의 후궁가려수만이었다. 이차럼 방대한 '낭자군'을 관리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통치자들은 품급제(品級制)를 실행했다. 모두 8급으로 나누는데, 관원에 대한 관리모델과 유사했다. 황후는 국모이고, 황제와 마찬가지로 유일무이했고 품급제도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비빈들의 등급은 아래와 같다:

 

정일품(正一品)은 부인(夫人)으로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의 넷이다; 정이품(正二品)은 구빈(九嬪)으로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총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의 아홉이다. 정삼품(正三品)은 첩여(婕妤)이고, 정사품(正四品)은 미인(美人)이며, 정오품(正五品)은 재인(才人)이다. 이 세 등급의 인원수는 모두 9명이다. 합쳐서 통칭 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라고 부른다. 정육품(正六品)은 보림(寶林)이고, 정칠품(正七品)은 어녀(御女)이고, 정팔품(正八品)은 채녀(彩女)이다. 이 3개 품급의 인원수는 모두 27명으로 합쳐서 팔십일어처(八十一御妻)라고 부른다.

 

품급이 다르면 각급의 궁비(宮妃)가 누리는 대우도 서로 다르다. 제1등의 부인은 황후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등급이다. 이는 재상급에 상당한다. 그녀들을 모시는 사람은 수시여관(隨侍女官), 궁녀, 침치부(針黹婦), 잡역(雜役)등등이 있다. 여기에 후궁의 취사를 책임지는 궁녀도 재상부의 인원보다 더 많다. 그외에 일부 업무는 궁녀들이 맡아서 할 수가 없어서, 태감들을 충당시켜서 후궁의 일을 본다. 그 기구는 다음과 같다:

 

액정국(掖庭局): 후궁의 부적(簿籍)을 관장한다. 해궁국(奚宮局): 후궁의 질병 및 사망의 처리를 관장한다. 내복국(內僕局): 이 기구는 재미있는 곳이다. 주로 후궁의 조명계통을 책임진다. 당시의 조명도구는 초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를 책임진다. 궁위국(宮闈局): 이곳은 가장 바쁜 곳이다. 대체로 오늘날의 비서실에 해당한다.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부채, 급사등등의 업무를 한다. 내궁국(內宮局): 오늘날의 재무부서와 유사하다. 창고와 출납을 책임진다.

 

이 5대국 이외에, 이들 미녀들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하여 황궁내에는 내시성(內侍省)을 별도로 둔다. 내시(장관) 4명, 내상시 6명, 내알자 감 6인, 내급사 8인, 알자 12인, 전인 18인, 사백 2인 및 사인 2인이 있다. 그들은 태감의 관리기구이다. 환관의 교육과 평가를 담당하고, 후비들에게 일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보장한다.

 

태감, 궁녀들은 후비를 보시고, 후비는 황제를 모신다. 그녀들이 모시는 시간은 밤에 집중된다. 사람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존비(尊卑)의 구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황제의 매달의 밤생활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 따라 안배한다: 매월의 앞 15일간은 달이 갈수록 둥글게 된다. 그러나 뒤의 15일간은 달이 점점 기울어진다. 그래서, 초하루부터 초십오일까지는 지위가 낮은 어처부터 최고인 황후까지 올라가고, 십육일부터 월말까지는 거꾸로 지위가 높은 황후에서 지위가 낮은 어처로 내려간다. 그중 황후는 가장 좋은 날을 차지한다. 15일, 16일에 황제를 이틀간 독점한다. 수량이 가장 많은 팔십일어처는 그저 매월 이십이일부터 삼십일까지의 구일동안 모신다. 매일 9명이 함께 황제를 하룻밤 모신다. 가련한 황제는 낮에는 정무로 바쁘다가, 밤에는 후궁들과 지내느라 바쁘다. 하룻밤에 9명의 후궁을 그것도 구일간 연속해서 자야 하니, 그 고통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알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당나라의 인간적인 점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라. 청나라때 황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패를 뒤집는다. 황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여자는 평생 하루도 만날 수 없다. 청나라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황궁에서 생과부로 독수공방했는지 모른다. 당나라때는 윤번제로 시침하는 제도를 취하여 황제의 선택권을 박탈해 버렸다. 그리하여 모든 여자들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황제 본인이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남녀평등의 사상은 여기서 어느 정도 체현되었다. 이러한 사상이 오랫동안 지배하였으므로,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