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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대당왕조 관료사회 몰락의 역사적 교훈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정관(貞觀)연간에 웅재대략(雄才大略)의 당태종 이세민은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등 명신의 보좌를 받아 정간(精幹), 염결(廉潔), 고효(高效)의 정부시스템을 만들었다. 정간초기의 기구 간소화를 통하여, 경관(京官)은 원래의 2천여명에서 643명으로 감소시켰다. 동시에 주현(州縣)의 설치가 늘어나서 백성은 적고, 관리는 많은 상황이 조성되어, 지방행정기구도 "대거 줄였다" 그리고 많은 주,현을 병합한다. 이번의 정부인력감축과 기구축소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정부관리의 업무효율을 끌어올렸을 뿐아니라, 백성의 경제부담도 대거 감소시켰다. '정관지치'의 양호한 정치, 경제 및 행정적 기초를 쌓았다.  이와 동시에, 초당의 관료사회는 정기(正氣)가 성행하고 관리들도 대부분 청렴했다. 위징이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상사(賞賜)를 이재민을 구휼하는데 썼기 때문이다; 중서령(中書令) 잠문본(岑文本)은 집안이 청빈하여 사는 집이 작으면서도 습기가 차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사업을 하나 하라고 말하자, 그는 나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고 겨우 글이나 쓰면서 이렇게 높은 관지에 올랐는데, 이것만 해도 나는 걱정되는데, 내가 무슨 다른 사업을 할 마음까지 가지겠느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인 대단한 미남 온언박(溫彦博) 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산을 챙기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집안에는 그럴 듯한 조문할 장소도 제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여러가지를 보면, 모두 정관시기의 관료사회의 정치는 확실히 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다수의 관리들의 도덕과 행위는 확실히 양호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당나라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관리들은 결당영사(結黨營私)하기 시작하며, 유명한 "붕당지쟁(朋黨之爭)"이 나타나고, 관료사회의 부패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시에 나타난 환관전권과 번진할거의 폐해까지 더해져서, 여러가지 폐정이 중압하에, 일찌기 대당성세는 쇠락하여, 날로 형편없어지며, 최종적으로 왕조의 큰 건물이 비바람속에 흔들리다가 무너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찌기 정간(精簡)되었던 정부기관은 언제 이렇게 늘어나서 엉망이 되었던가? 일찌기 효율이 높고 일을 잘 하던 정부관리가 어찌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효율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찌기 청정염결(淸正廉潔)했던 관료사회의 기풍이 어떻게 이렇게 부패오탁(腐敗汚濁)하게 변했을까? 일찌기 휘황하던 태평성세가 어찌 이렇게 쇠락하여 멸망하게 되었을까? 이 모든 것은 후세에 침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이것은 역시 과거제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과거제도는 수(隋)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수나라는 겨우 30여년간 존재했지만, 업적이 적은 것은 아니다. 당나라는 이 관료선발제도를 승계하고 점차 완비해가서,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인재선발제도로 자리잡았다. 과거를 통하여 인재를 선발했으며 이는 문벌의 한계를 타파한 것이다. 사회하층의 학자들에게는 신분상승의 도로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위진(魏晋)이전의 문벌제도보다 훨씬 진보한 방식이다. 그러나, 과거를 통한 관료선발에도 문제는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많은 선비들이 과거제도를 통하여 계속하여 선발되어, 그들의 인원수가 갈수록 늘어났는데, 정부가 그들에게 '취업'기회를 어덯게 제공해야할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그들 모두에게 관직을 주려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관직을 만들어 낼 것인가? 만일 그들 모두에게 관직을 주지 않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안배'할 것인가?

 

당태종 이세민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국학(國學)"을 만들어, 교육과 문화사업을 대거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비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전민족의 사상 도덕적 소질과 문화교육 수준을 제고하였다. 심지어 "덕화사방(德化四方)"할 수 있었고, 외국에 '문화수출'도 할 수 있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관5년(632년)이후, 당태종은 "여러번 국학에 가서, 학사(學舍) 1200칸을 늘이고, 국학,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은 모두 생원의 정원을 늘였고, 서(書), 산(算)에 각 박사(博士)를 두어, 모두 3260명이 되었다. 둔영비기(屯營飛騎)에도 박사를 보내어 경전을 가르켰다. 고려(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의 여러 나라에서도 자제를 보내어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했다. 국학에는 팔천여명이 있는데 그 흥성함이 고금에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세민의 이 방법은 아주 대단한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생원의 정원을 늘였고," "각각 박사를 두었다" 이렇게 하여 선비의 '취업'비율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둔영비기에도 박사를 보내어 경전을 가르쳤다." 지식인들이 경전을 교육시켜, 군대의 문화소질을 제고시킨다; 동시에, '국학내에 팔천여명'이 되어 고금에 없던 문화의 성세를 이룬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팔천명중에 고려(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에서 보내와 공부하는 선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태종의 이 방법이 '국제적인 효과'가 좋았을 뿐아니라, '정관지치'의 양호한 문화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당태종의 후인들이 이 사고방식을 계속해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고종이 황위를 이어받으면서, 정책과 교육이 점차 쇠락해간다....무측천이 칭제(稱制)하고 권력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서, 관직과 작위를 아끼지 않고, 당시의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남발한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더 이상 경학에 뜻을 두지 않게 되고, 이십년간, 학교는 졸지에 피폐해지고 만다." 즉, 당고종 이치가 황위를 승계한 후, 문화교육사업이 점점 더 중시되지 않게 되었고, 무측천이 황제에 오른 후에는, 그녀가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써서 관직과 작위로 선비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생원들은 더 이상 경전을 학습하려 하지 않아, 학술분위기와 학술존엄이 모두 망가지게 된다. 이십년간, 관료사회에서 독립하여 존재했던 문화교육사업은 중단되게 된다.

 

비록 문화교육사업은 중단되었지만, 과거시험은 여전히 진행했다. 선비들이 계속 나타나고 그들의 취업길은 단지 하나만 남게 된다: 관료사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사회에서 '취업'을 받아줄 수 있는 능력은 원래 그다지 강하지 않다. 현재는 더욱 붐벼서 들어가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무측천이 자신의 세력을 심고 장손무기, 저수량등 노신들에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기구를 별도로 설립하여 심복들을 심어둔다. 새로운 기구가 탄생하고, 구기구도 여전히 존재하니 기구가 중첩되고, 쓸모없는 관료직위가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효율이 저하된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중첩된 기구과 과다한 쓸모없는 인원이 대량의 국가재산을 소모할 뿐아니라, 관리간의 파벌투쟁을 쉽게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투쟁에서, 그들은 결당영사하여 정치이상과 도덕규범은 서로 편을 짜고 몰아내는 가운데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부패와 사치의 기풍이 날로 흥성한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관료사회의 기풍이 어찌 나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 두려운 일은, 바로 관료기구가 날로 팽창하는 것이다. 정부의 쓸모없는 인원이 날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관료사회의 기풍이 날로 부패하는 상황하에서, 관리들의 급여는 '지마개화절절고(芝麻開花節節高)"였다. 어떤 사람은 계산을 해봤다. 당나라초기의 급여제를 보면 관1품의 월봉은 30민이다. 직전녹미(職田祿米)는 천곡(千斛)에 불과햇다; 개원연간에 이르러, 관료의 봉록은 당나라초기의 몇 배가 된다. 천보연간에는 다시 개원의 몇 배가 된다; 이어서, "대력때는 천보의 몇 배가 되고, 건중은 다시 대력의 몇 배가 된다"; 대력연간의 관1품의 월봉은 이미 9천민이 된다. 당나라초기의 300배에 이른 것이다. 이때는 당나라초기에서 겨우 150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후 관리들의 급여는 계속 증가하여,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그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고, 결국 깃발을 들고 일어서게 된다.

 

당덕종(唐德宗)때의 대신 심기제(沈旣濟)는 일찌기 관료사회의 폐해를 "사태(四太)"라고 통박했다: "관료가 되는 문이 너무 크고, 명문세가를 너무 우대하고, 봉록과 이익이 너무 두텁고, 감독과 책임은 너무 약하다." 심기제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다만, 이렇게 세상의 기풍이 날로 하락하는 와중에, 누가 역이충언(逆耳忠言,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들으려 한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이런 말을 정말 듣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때는 이미 그 누구도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고, 쓰러지는 건물을 지탱해줄 수 없다(挽狂瀾於旣倒, 扶大廈於將傾)". 왜냐하면 이때의 대당관료사회 기풍은 이미 철저히 망가져 버렸다. 조정의 상하가 문념무희(文恬武僖)하여, 다시 기운을 차릴 기회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적중난반(積重難返)의 왕조기수(王朝氣數)는 이미 쇠갈(衰竭)하였다. 그저 남은 목숨을 겨우 연명하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환관전권과 번진할거의 내외에서의 압박이 가해지고 있음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