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녕녕(寧寧)
민국시대를 얘기하자면, 파벌을 얘기해야 하지 않으면 민국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파벌을 얘기하자면, 육영정(陸榮廷)을 얘기하지 않으면, 파벌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육영정이 광서(廣西)를 십년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민국의 파벌이 난립한 배경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자주 민국시대의 중요인물들의 말에서 남북화담(南北和談)과 같은 류의 주제가 나올 때마다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민국에서 다양한 파벌중 기본적으로는 남북 양대파벌로 구분할 수 있다고. 북방은 초기에는 북양군벌로 통칭되었다. 그 우두머리는 원세개이다. 그의 수하에는 3갈래의 부대가 있었다. 각각 단기서, 풍국장, 장작림이 이끌었다. 원세개는 청나라정부의 북양대신을 지냈고, 나중에 북양정부를 조직하였으므로 그의 부대를 통칭하여 북양부대라고 부른다.
원세개의 사후, 그의 부대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직(直), 봉(奉), 환(皖)의 3개파벌로 나뉜다. 풍국장의 부대를 직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직예 하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풍국장의 사후 오패부, 조곤이 이어받았다. 오패부는 중국을 통일할 가장 실력있는 일방의 제후라고 칭해졌었고, 오랫동안 남방과 대적했다. 단기서의 부대는 환계라 칭했다 그 이름 그대로 그는 안휘 사람이다. 장작림의 부대는 봉계라 칭했는데, 봉은 봉천 즉 현재의 요녕성이다. 성회도시인 심양을 봉천이라고 불렀다. 그는 원래 동북의 토비무장두목이었다. 먼저 청나라정부에 투항하고, 나중에 원세개에 의하여 재편된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후, 장작림은 사단장에서 봉천도독이 된다. 그는 북양군대의 중요한 역량중 하나가 되고 점차 동북삼성을 지배하여 명실상부한 동북왕이 된다.
파벌이 있으면 투쟁이 있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3개의 파벌은 먼저 직,환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나중에는 무력을 사용하는데 이른다.
봉계 장작림은 원래 환계 단기서를 따랐다. 나중에 환계의 실력이 약한 것을 보고, 바람이 부는대로 방향을 바꾸어 반환으로 돌아서고, 반환동맹에 가입한다. 양강이 연합하니 단기서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단기서가 하야한 후, 직,봉은 공동으로 북경에 진주한다. 장작림은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실현했고, 조곤과 공동으로 북양정부를 장악한다.
다만, 직,봉의 밀월도 얼마가지 못했다. 더 많은 세력범위를 위하여, 직,봉간에는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연이어 두 번의 직봉대전이 벌어진다. 제1차전투는 봉계의 패배로 끝난다. 직계가 팽창한다. 제2차전투에서 봉계, 환계 및 광동방면이 동맹을 이루어 공동으로 직계에 대항한다. 그 결과 직계는 사면초가에 빠진다. 먼저 조곤이 뇌물총통에서 하야하고, 오패부는 도망친다.
민국시대의 파벌은 위의 3개 이외에 저병한 보정계(保定係)와 황포계(黃埔係)가 있다.
보정계는 보정군관학교 출신의 군인이다. 보정군관학교는 중국근대사상 정규 군사학교이다. 이 학교는 근대군사인재를 많이 배출했고, 이들을 "보정계"라고 부른다. 1902년, 원세개는 직예총독겸 북양대신으로 있을 때, 보정에 일련의 군사학교를 개설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양행영장변학당(北洋行營將弁學堂)이다. 1904년 장변학당은 북양속성무비학당(北洋速成武備學堂)으로 바꾸고 단기서가 독판이 된다. 1912년, 원세개가 대총총에 오른 후, 단기서는 육군총장이 되며, 각급 군관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보성속성학당과 군관학당은 합병하여 보성육군군관학교로 된다. 1912년부터 1923년 사이에 모두 9기를 배출하고, 졸업생은 전후로 6500명에 이른다. 이들은 각지의 각 부대로 흩어졌고, 점차 "보정계"를 형성한다. 이들은 국민정부의 중요한 파벌중 하나가 된다. 장개석 본인도 보정군관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다. 황포군관학교의 각급 지도자와 교관은 대부분 보정학교 출신이다. 예를 들어, 고축동, 유치, 장치중, 진성, 부작의, 백숭히, 주지유, 황기상, 황소굉, 이품선, 육장첩등이 그들이다. 공산당 부대에도 보정출신이 있다. 예를 들면,섭정, 조박생, 황진당 등이 그들이다.
황포계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군인이다. 1924년 6월,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도움하에, 중국국민당은 광주 황포에 육군군관학교를 연다. 장개석이 교장을 맡는다. 항전이 발발한 후, 군관학교는 사천 성도로 옮긴다. 항전승리후인 1946년에는 남경으로 옮겨가고 육군군관학교로 개칭한다. 그외에 군관학교는 낙양, 무한, 성도, 광주, 곤명, 남경, 서안, 적화등지에 9개의 분교를 설립하는데, 1926년부터 1949년까지 존속기간은 서로 다르다. 황포군관학교는 제1기부터 제23기까지 30만여명의 학생을 배출한다. 그중 1기에서 7기까지는 모두 13000여명이다. 이 1기에서 7기까지의 학생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국민당군대의 골간이 된다. 황포계는 황포학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황포군관학교의 교관도 포함한다. 왜냐하면 황포군관학교에서 나온 학생은 아직 독립된 작전과 지휘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는데는 최소 10년이상이 걸렸고, 이런 과도기간에 군사대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이들 교관들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항일전쟁과 3년내전시기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위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았다. 하응흠, 진성, 고축동, 유치, 전대균, 장정문, 주지유등이 그들이다. 1940년대에 이르러, 황포학생들이 중견역량이 된다. 그중 병단사령관이상만 100여명이 된다. 해군사령관 계영청, 장갑병사령관 심발조, 공군사령관 왕숙명, 육군사령관 관린정, 헌병사령관 나우륜, 군통국장 대립, 안전국장 정개민등은 모두 황포 1기 내지 7기생이다. 3년내전기간동안, 황포학생은 대권을 장악한다. 초총사령(剿總司令), 수정사령(綏靖司令), 병단사령, 군장, 사장은 대부분 황포계가 맡는다. 장개석이 대륙을 도망칠 때, 마지막 1기 황포학생 3천여명은, 호종남을 따라 남창 일대로 도망친다. 일부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방군에 의해 소멸된다. 이렇게 황포군관학교는 종말을 고한다.
북방에는 세력이 강대한 진계(晋係)가 있었다.
진계는 염석산(閻錫山)의 부대이다. 염석산은 산서 오대 사람이다. 일본사관학교 출신이고, 신해혁명전에 신군혼성여표통을 지냈다. 1911년 무창의거의 영향을 받아, 태원에서 의거를 일으켜 성공하고 산서도독이 된다. 실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군대를 1개 사단으로 편성한다. 그리고 기병2개단, 포병 1개단 및 공병등을 추가한다. 이것이 바로 염석산의 군대가 "진군(晋軍)"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때이다. 1916년 원세개의 사후, 염석산은 산서를 독패한다. 군대를 1만여명으로 확충한다. 직,봉,풍옥상이 혼전을 벌인 후, 염석산의 세력은 수원(綏遠)으로 들어가고, "진군"은 "진수군"으로 된다. 이때 염석산의 군대는 이미 8개군, 17개사단으로 편성되어 당시의 군벌중 무시할 수 없는 역량을 갖춘다. 1926년, 광주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하고 무한을 점령한 후 사람을 보내어 염석산과 연락한다. 그도 북벌에 참여하도록 요청했고, 염석산은 응락한다. 1927년, 염석산은 청천백일기를 내걸고, 북방국민혁명군총사령관이 된다. 1928년 북방국민혁명군은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으로 재편되고 염석산이 집단군총사령관이 된다. 염석산의 진군은 비록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었고, 겉으로는 국민정부의 지휘를 받지만, 국민정부는 그를 지휘할 수 없었다. 여전히 산서를 독패하는 군벌로 남는다. 장개석, 풍옥상, 염석산의 대전이 벌어지기 전날, 장개석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염석산은 군대를 확충한다. 8개군 17개사에서 14개군 40개사로 개편한다. 총병력은 20만으로 늘어난다. 장개석, 풍옥상, 염석산의 중원대전에서 진군은 패배한다. 염석산은 대련으로 도망치고, 진군은 축소편성된다. 4개보병군과 1개 정태호로군만 남긴다. 적지 않은 군관은 재편에 불응하여 속속 쿠데타를 일으킨다. 보병32군 군장인 상진(尙震)은 1931년 부대를 이끌고 진군에서 벗어난다. 진군은 일시에 혼란상태에 빠진다. 나중에 염석산이 산서로 돌아와서 대권을 다시 장악했지만, 더 이상 함부로 군대를 확충시키지는 못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염석산은 제2전구사령장관이 된다. 항전승리후, 염석산은 4만여명의 친일군과 6천여명의 일본군을 받아들여 이전의 병력을 회복한다. 4년후 이 부대는 해방군에 의하여 소멸된다. 이때부터 진군은 없어진다. 염석산도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도망간다. 최후에 1960년 대만에서 병사한다.
진군과 이웃해 있는 것은 서북군이다.
풍옥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서북군은 아주 실력있는 지방무장세력이다. 풍옥상은 원래 원세개의 심복인 육건장의 수하 영장이었다. 얼마후 연병에 공을 세워 단장으로 승진한다. 1917년 손중산의 호법남하에 풍옥상이 혼성여단을 이끌고 호남으로 간다. 누가 알았으랴 호남성의 대권은 이미 환계가 빼앗아가 버렸다. 직계군대는 불복하여, "화평휴전"을 일으킨다. "휴전"을 주장한 풍옥상은 호남서부로 밀려나 진수사가 된다. 풍옥상은 이 기회를 틈타 섬서로 들어가고 환계도독 진수번을 쫓아내고 스스로 섬서도독이 된다. 2년도 되지 않아, 직,봉대전이 벌어진다. 풍옥상은 직위만 있고 권한은 없는 육군검열사가 된다. 풍옥상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 컸다. 1924년, 제2차 직,봉대전이 일어난다. 풍옥상은 직계 여단장 손악, 섬군 사단장 호경익과 연합하여 국민군을 구성한다. 그리고 북경정권에 창을 거꾸로 들고 직계에 반대한다. 풍옥상은 국민군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경수,경한 두 철로를 방어선으로 하여, 서북지구를 상당히 장기간동안 다스린다. 이때부터 풍옥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서북군이 전국에 명성을 떨친다. 1928년, 국민혁명군의 제2차북벌때 풍옥상은 적극 참여한다. 서북군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으로 재편된다. 총병력은 30만이었다. 장개석은 풍옥상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와 결의형제를 맺는다. 누가 알았으랴. 장작림을 쫓아낸 후 장개석은 북경의 대권을 염석산에게 넘겨버렸다. 그리하여 풍옥상의 불만을 산다. 장개석, 풍옥상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29년 산동 및 편성문제로 장개석과 풍옥상이 다툼을 벌인다. 결국 장개석, 풍옥상의 전투가 시작된다. 서북군의 장령 석우삼, 한복거, 유진화, 마홍목등이 장개석에게 매수되어, 풍옥상은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패배당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하야한다. 1930년 5월, 풍옥상은 염석산과 연합하여 장개석,풍옥상,염석산의 중원대전을 벌인다. 그러나 서북군은 진군의 효과적인 협조를 받지 못하고, 다시 장학량이 동북군의 주력을 이끌고 들어와 장개석을 지원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실패하고 하야한다. 이때부터는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지 못한다. 다만 서북군 장령은 여전히 부대를 통솔하여 각종 정치활동을 벌였다. 분화와 조합을 거쳐, 각각 서로 다른 운명을 걷는다. 양호성과 장학량이 "서안사변"을 일으키고, 양호성은 장개석에 의하여 중경집중영에서 살해당한다. 길홍창은 공산당토벌에 동의하지 않아 부득이 외국으로 나간다. "128"사변후 귀국하여 일하다가 장개석에게 피살당한다. 장자충, 송철원, 길성문은 모두 항일명장이다. 그중 장자충은 조의회전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희생된다. 하기풍, 장극협은 1948년 가왕의거때 인민해방사업에 공헌을 한다. 석우삼, 한복거는 장개석에 투항한 후, 계속 입장을 바꾸다가 항전중에 장개석에게 피살당한다. 유욱분은 항전중에 매국노가 되어 일본에 투항하기 전에 북경에서 병사한다.
중국의 서남과 서북에 있는 주요 파벌로는 "이류(二劉)"와 "오마(五馬)"가 있다.
사천 "이류"는 유상, 유문휘를 가리킨다. 유상은 육군속성학교 출신이다(속성계). 유문휘는 보정군관학교출신이다(보정계). 유문휘는 유상의 당숙이기도 하다.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유상은 중경호군사였고, 유문휘는 천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20년대, 웅극무, 유존후가 사천으로 들어온다. 유상은 양삼, 전송극, 등석후등과 협력하여 "천인치천"의 구호를 내걸어 사천인사들의 지지를 받는다. 1921년, 유문휘도 여단장이 된다. 얼마후 웅극무를 몰아낸다. 유상은 군정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1927년, 유상은 중앙국민정부에 귀순한다. 그가 이끄는 4만여 군대는 국민혁명군 21군으로 재편된다. 스스로 군장이 된다. 유문휘도 3만여 군대를 가지고 24군을 만들어 스스로 군장이 된다. 1928년, 남경정부는 사천성임명명단을 발표한다. 유문휘는 일약 사천성 주석된다. 그러나 대권을 장악한 유상은 성부위원 및 편견위원회 위원장의 직만을 맡게 되었다. 권력분배가 합리적이지 않은데다가, 속성계와 보정계의 다툼이 있어, 숙질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1931년 유문휘가 연해에서 무기를 구입해 오다가, 유상이 중간에서 막아서 가로챈다. 이로 인하여 이류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그 결과 유문휘가 패배하여, 잔여부대 2만여명을 이끌고 천강변계로 도망친다. 유상은 사천을 독패하는 군벌이 된다. 그리고 사천성주석을 맡았다. 또한 천강수정공서주임도 겸임했다. 이류가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서향전이 공농홍군 4방면군을 이끌고 사천으로 들어와 활동했다. 얼마후 하룡등이 지도하는 홍군 2,6군단도 사천에 진입한다. 유상은 무서웠다. 그래서 외부인이 사천의 사무에 간여하는데 반대하던 태도를 바꾸어, 친히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장개석은 이 기회를 틈타 사천에 개입한다. 그는 사천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상과 장개석간에는 갈등이 발생한다. 통제와 반통제. 동화와 반동화. 갈수록 격렬해진다. 1936년 4월 16일, 장개석은 친히 성도로 간다. 유상은 피하고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읍의 고향으로 가버린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유상은 제23집단군 총사령이 된다. 항일을 위하여 그는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남하하여 무한에 도착한 후 제7전구사령장관이 된다. 다음 해 한구에서 병사한다.
유문휘는 천강으로 패퇴한 후, 서강건성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항일전쟁시기에 반문화, 용운등과 "천강진"동맹을 맺는다. 1939년 서강성정부가 성립되고, 유문휘는 성부주석 및 24군군장이 된다. 이 기간동안 유문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연공항일을 한다. 그리고 "민맹", "민혁"조직에 가입한다. 1949년 12월 팽현의거가 일어나고 나광한의거를 일으킨다. 대서남해방에 공헌을 한다. 해방후 유문휘는 서남군사위원회 부주석, 임업부 부장을 지내다가 1976년 북경에서 병사한다.
서북 "오마"는 마목상, 마홍빈, 마기, 마린, 마정양의 5명이다.
이 '5마'의 관계는 아주 복잡하다.
그중 마복상의 부친 마천령, 마기, 마린의 부친 마해안은 모두 마정양의 조부인 마점오를 따라 청나라에 투항했다. 각각 연하, 서녕에서 병력을 이끌었다. 마정양은 원세개, 풍국장, 여원홍 3명의 총통의 시종무관을 지낸 바 있다. 1917년, 국민군에 의하여 살해된다. 마홍빈은 마복상의 조카이다. 마복상이 병사한 후, 그의 아들인 마홍목은 당형인 마홍빈을 쫓아낸다. 자신이 영하성주석이 된다. 마기, 마린은 친형제이고, 마기의 3아들은 각각 마보청, 마보방, 마보영이다. 그중 마보방은 청해석주석으로 있던 숙부 마린을 쫓아낸다. 나중에는 형인 마보청의 병권을 빼앗아 청해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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