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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위태후(韋太后): 남송의 국모

by 중은우시 2013. 11. 9.

글: 섭지추(葉之秋) 

 

황제의 여인은 보통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여인은 당연히 출신이 좋아야 하고, 집안이 고귀해야 한다. 송나라 황제의 비빈은 대부분 조정중신의 딸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인 위씨는 그저 비천한 시녀였을 뿐이다.

송철종때 재상을 지내다가 단양(丹陽)으로 은퇴하여 노년을 보내고 있던 소송(蘇頌)은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 그래서 젊고 예쁜 시녀들을 여럿 사서 자신의 곁에 두었다. 위씨도 그중의 하나였다. 하루는 저녁에 소노야가 위씨에게 남아서 함께 잘 것을 명했다. 막 자리에 눕자 소노야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침상위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이다. 위씨는 열 몇살인데도 아직도 침대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노야도 위씨가 두려워서 그랬다고 생각하고 좋은 말로 위로하고, 사람을 시켜 요를 바꾸게 한다. 그러나, 곧 위씨는 다시 오줌은 누었다. 순식간에 요를 몇 번이나 갈아야 했다. 그래서 소노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된 소송의 발언은 전혀 다르다. 소송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니는 크게 귀하게 될 상이다. 이 곳에 머물 사람이 아니니, 경성으로 보내야 겠다." 소송이 재상으로 있을 때,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는 자신은 황제의 여자, 국모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명하는 것이고, 위씨는 청백한 몸이라는 것도 해명하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사람들에게 집안에 자녀들이 오줌싸개이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대부대귀할 상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에 궁중에서 궁녀선발이 있었다. 공경대신의 미혼여자는 모두 참가해야 했다. 소송은 자신의 딸이 입궁하는 것을 바라지 안하서, 오줌싸개인 위씨를 경성으로 보낸다. 전임재상의 추천을 받아, 궁녀선발에 참가한 위씨는 당당하게 합격하여, 송휘종의 수만명 후궁중 한 명이 된다.

마침내 입궁했다. 황제의 여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원래 선망받을 일이다. 그러나, 위씨는 금방 깨닫는다. 입궁은 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평생동안 황제를 한번도 보지 못한다. 더더구나 총행(寵幸)을 받거나, 아들을 낳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하늘은 위씨를 보살폈다. 그후 새 궁녀들을 분배할 때, 위씨는 송휘종의 황후 정씨의 궁으로 들어간다. 바로 이 때 위씨는 자신과 반평생을 함께할 여자친구 교씨(喬氏)를 만난다.

위씨는 젊고 예뻤다. 그러나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금기서화에 능한 교씨와 비교하자면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교씨는 마음이 선량했다. 또한 원래 순박한 위씨를 좋아했다. 두 여자는 동병상련으로 자주 함께 다녔다. 적막한 생활에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두 여자아이는 정중하게 맹세한다: "먼저 기회를 잡으면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준다." 누구든지 먼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반드시 자매를 잊지 않기로 한 것이다.

송휘종의 즉위초기, 정황후와의 감정에 괜찮은 편이었다. 가끔 황후의 침궁에 드나들었다. 정황후의 시녀인 위씨, 교씨는 송휘종이 앞에 얼굴을 내밀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당시의 송휘종이 가장 좋아한 비빈은 유귀비였다. 정황후는 이를 보고 있었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자신이 송휘종을 붙잡아둘 수 없다면 최소한 유귀비가 총애를 독점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만일 황제가 총애하는 비빈이 정황후의 심복이라면 정황후의 인생은 조금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황후는 일부러 교씨와 위씨로 하여금 송휘종을 접대하게 하고, 심지어 고의로 자리를 피해주어 두 사람이 황제와 단독으로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금방, 송휘종은 교씨를 주목한다. 교씨는 미모에 보기드문 재주까지 지녔다. 그리고 교교절절(嬌嬌切切), 완약가련(婉約可憐)한 모습을 지녔다. 송휘종은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얼마 후, 교씨는 비빈에 봉해지고 나중에는 황후의 바로 다음가는 귀비가 된다.

선량한 교귀비는 과연 당초 위씨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여러번 송휘종에게 위씨를 만나보라고 권한다. 송휘종은 못이기는 척 위씨와 한번 잔다. 이것은 위씨에게 일생에서 유일한 한번의 시침이었다. 그후 위씨는 여전히 밤마다 적막하게 지낸다. 그러나 바로 그 하룻밤에 위씨는 용종을 잉태한다. 나중에 남송의 개국황제가 되는 송고종 조구를 낳은 것이다.

황자를 낳은 후 송휘종은 위씨에게 평창군군(平昌郡君)의 봉호를 내린다. 후궁비빈가운데, 그저 하급의 직위이다. 정강지변이 발생하기 전까지, 위씨는 송휘종을 이십여년간 모셨지만, 직위는 그저 첩여, 완용이었고, 정식의 "비(妃)"도 달지 못한다.

 

모친이 이처럼 총애를 받지 못하는데 아들 조구는 어땠을까?

조구는 원래 송휘종이 아홉째 아들이다. 송휘종은 일생동안 육십여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들만 삼십일명이다. 조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수준이었다. 게다가 조구는 무예를 좋아했다. 송휘종은 서화에 열중해서 취미가 맞지 않았다. 조구에 대하여 송휘종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송흠종이 즉위한 후 두 형제간에도 관계는 평범했다.

조구가 처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정강원년 금송간에 평화회담을 진행할 때였다. 당시 금나라사람들은 반드시 송나라의 친왕중 한 명이 금나라 군영으로 와서 담판해야한다고 요구했다. 송흠종은 여러 왕들을 보면서 "누가 짐을 위하여 갔다 오겠는가?"라고 말한다. 평상시라면 황제의 앞에서 서로 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금나라군대의 군영에 가는 것이다.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높은 것이다. 왕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유독 강왕 조구가 자원한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강왕은 영명신무(英明神武)하여 예조(藝祖)의 기풍이 있었다."고 적었다. 조구는 조광윤의 기풍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기실, 조구는 민간의 이미지처럼 멍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유병제(剛柔倂濟), 과감유위(果敢有爲)의 조광윤과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그러나, 강왕 조구는 송휘종의 아들 중에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황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었다. 그는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느니 한번 승부를 걸어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조구는 떠나기 전에 특별히 송흠종에게 당부한다: "조정에서는 편리한대로 하십시오. 친왕 한 명의 목숨에 연연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미 명을 받고 생사를 가늠하기 힘든 길을 떠날 것이면, 아예 영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낫다. 과연 송휘종, 송흠종은 감격한다.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송휘종이 지시하고, 송흠종이 조서를 내려,조구믜 모친 위씨를 용덕궁현비(龍德宮賢妃)로 승진시킨다. 황후, 귀비의 바로 다음가는 자리이다.

아들이 사신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위씨는 묵묵히 눈물을 흘린다. 아들이 금나라군대의 군영에 들어가는 것은 황천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강왕 조구는 바로 이 사신으로 떠난 것때문에 금나라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변량성에 움츠리고 숨어있던 왕후비빈들은 모조리 포로로 붙잡힌다.

조구는 금군대영에 도착한 후, 금군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질책한다. 금나라사람들의 위협과 협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금군의 장령들은 활쏘기를 겨루자고 제안한다. 의도는 송나라사신의 기를 꺽어놓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했으랴. 조구는 화살 3발을 모두 과녁에 명중시킨다. 금군의 장령들은 북송은 군암왕약(君暗王弱)하다고 여겨서, 눈앞의 이 친왕은 진짜 친왕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송나라가 종실중 일부러 무예에 뛰어난 자를 뽑아서 친왕을 사칭해서 보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변량성을 함락시키고 금나라사람들이 북숭의 왕후비빈을 모조리 체포할 때 금나라사람들은 조구에 대하여는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조구는 기회를 틈타 강남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아들은 도망쳤지만, 부모형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금나라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북상한다. 이전에 왕자들은 조구가 괜히 두각을 드러내려다 죽을 길을 간다고 멸시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된다. 송휘종에게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되어 강왕 조구는 순조롭게 등극하여 황제에 오른다.

인생의 승패는 정말 예측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