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중국역사상 형제를 가장 많이 죽인 황제는?

중은우시 2013. 8. 5. 01:29

작자: 미상 

 

중국역사상 형제상잔의 비극은 아주 많았다. 이 비극의 발생은 대부분 높은 담장 안에 있느 황궁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수족의 정을 돌보지 않고, 너죽고 나살기 식으로 다툰 것은 완전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초기,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때 형인 이건성과 넷째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황위계승자가 된다. 청나라전기, 강희제의 여러 아들은 각각 뛰어난 점이 있었다. 자금성내에서 보보경심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누가 역사상 형제를 가장 많이 살해한 황제일까?

 

사료를 살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황제가 있었다. 즉위한 해로부터, 죽기 3년전까지의 12년동안, 모두 15명의 형제를 죽였다. 이 황제는 바로 5대10국시기에 시기와 잔혹으로 유명한 남한 중종(中宗) 유성이다.

 

유성의 본명은 유홍희(劉洪熙)이고, 남한의 개국황제 유엄(劉龑)의 아들이고, 상제(殇帝) 유분(劉玢)의 동생이다. 만일 정상적이었다면, "부전자(父傳子)"의 관념하에, 유성은 황제가 될 수가 없었다. 다만 나중에 유성은 황제에 올랐을 뿐아니라, 황제에 15년간이나 재위하게 된다. 이 패러독스의 유일하고 합리적인 해석은 유성이 비상한 수단을 썼다는 것이다.

 

대유15년(942년), 중국남방의 변방에 위치한 남한에 두 가지 큰 일이 벌어진다. 54세된 개국황제 유엄이 사망한다; 유엄의 셋째아들 23세의 진왕 유홍도(劉洪度) 일명 유분이 황제위에 등극한다. 그리고 연호를 광천(光天)으로 바꾼다. 진왕 유성이 보정(輔政)을 한다. 보정이 되면서부터, 유성이 친형제를 살해하기 위한 서막이 열린다.

 

유분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황제이다. 부친의 장례식때, 황궁안에서 파티를 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분의 오락프로젝트는 배우들로 하여금 술마시고 노래하며 즐기게 하고, 남녀가 나체로 서로 쫓게 하는 것이며, 상복을 입고 기녀들고 함께 민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유분이 장악한 남한은 점차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린다.

 

유분의 황당한 짓을 유성은 모두 보고 있었다. 유분이 견마성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유성은 갈수록 많은 미녀를 바쳤다. 유분은 비록 황음무도했지만, 자신의 형제 특히 넷째동생 유성으로부터의 위협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유분은 환관에게 명령하여 궁문을 굳게 지키도록 한다. 그리고 궁으로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몸수색을 받도록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성은 다섯째 동생 유홍창(劉洪昌), 열째동생 유홍고(劉洪杲)와 셋째형 유분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는다. 유성이 유분을 제거한 방법은 강희제가 권신 아오바이를 제거한 방법과 거의 동일하다: 유성은 심복인 진도상에게 유사조등 용맹한 자들을 기르게 하고, 매일 씨름을 연습시킨다. 시기가 성숙되자 유성은 이들을 궁안에 들여보내어 유분에게 씨름시범을 보인다. 유분은 이 일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고, 술에 대취하여 있었다. 이때 진도상과 유사조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침궁 문앞으로 끌고가 살해한다.

 

유분을 죽인 후, 유성은 보정에서 일약 황제에 오른다. 그와 동모한 다섯째 동생 홍창, 열째 동생 홍고는 각각 병마대원수와 부원수가 된다. 권력이 증대되면서, 유성의 의심병은 갈수록 심해진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유성은 계속하여 형제들을 죽이게 된다.

 

유성이 죽여버린 두번째 형제는 바로 옛날의 동맹자인 유홍고였다. 바꾸어 말하면, 열째동생 유홍고는 유성이 즉위한 후 첫번째 희생자가 된다.

 

병마부원수로서, 유홍고는 여러번 유성에게 건의한다. 병력을 이끌고 도적을 토벌하고 싶다고, 동시에, 유홍고는 유성에게 유사조등을 제거하여 문무관료들이 뒤에서 얘기하는 것을 막자고 건의한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유홍고의 건의나 바램은 전혀 부당하지 않다. 다만, 민감하고 의심많은 유성이 보기에, 유홍고는 그에게 속하는 황권에 눈독을 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유성은 대노하여 사자를 시켜 밤에 홍고를 부른다."

 

유성의 사진을 본 후, 유홍고는 자신에게 흉다길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사자를 객청에서 기다리게 한 후,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은 후 유홍고는 부처의 앞에서 기도를 한다: "홍고는 생각을 잘못하여 왕궁에 태어나서 이제 죽는구나. 후세에는 민가에 태어나서 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후 그는 곡을 하며 가족들과 이별한다. 과연 유홍고는 입궁하자마자 살해당한다.

 

유홍고가 피살된 같은 해에, 유성은 남교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연호를 건화로 바꾼다. 그리고 존호를 "대성문무대명지도대광효황제"로 바치게 한다. 이런 연호와 존호는 유성이 형제를 죽인 행위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이는 절묘한 풍자라 아니할 수 없다.

 

유엄의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능한 것은 다섯째 아들인 유홍창이다. 그리고 유엄이 죽기 전에, 그를 태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신하들이 "어린 아들을 세우면, 형들이 다툴 것이고, 화가 생길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유홍창은 황제와의 인연이 스쳐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유홍고를 죽인 후, 병마대원수를 맡고 있던 유홍창은 유성이 죽이려는 다음 번 목표가 된다.

 

건화2년(944년), 유성은 다섯째 동생 유홍창을 양제릉에 보내어 제사지내게 한다. 양제는 유엄의 형인 유은이다. 유홍창의 행열이 광주성을 벗어나기도 전에, 유성이 파견한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유홍창과 함께 해를 입은 사람은 그들의 여덟째 동생 유홍택(劉洪澤)도 있다.

 

유홍택은 최초에 진왕에 봉해지고, 광서 남녕(옹주)에 거주한다. 남녕에 있는 기간동안, 유홍택은 근정애민하여, 현재 백성의 사랑을 받는다. 건화2년, 남녕의 상공에 봉황이 한 마리 나타난다. 유성이 보기에, 이는 여덟째 동생이 곧 황제가 될 것이라는 징조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다시 한번 신기한 효능을 발휘한다. 유성은 광주에서 남녕까지 독주를 한병 보내고, 여덟째 동생 유홍택은 독살당한다.

 

건화3년, 유성은 일곱째동생 소왕 유홍아(劉洪雅)를 죽인다. 동시에 그가 황제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운 유사조와 진도상도 토사구팽의 최후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진도상은 참수되었을 뿐아니라, 가족까지도 몰살당한다.

 

건화5년, 유성은 남아있는 형제들에 대하여 최대규모의 살육과 숙청을 감행한다. 같은 날, 8명의 형제가 동시에 피살된다. 그들은 각각: 여섯째 동생 제왕 유홍필, 열한째동생 식왕 유홍위, 열세째동생 동왕 유홍간, 열넷째동생 익왕 유홍건, 열다섯째동생 변왕 유홍제, 열여섯째동생 귀왕 유홍도, 열일곱째동생 선왕 유홍소, 열아홉째동생 정왕 유홍익. 그들이 피살된 원인은 자연히 유성의 시기이다. 다만 그들이 피살된 구체적인 과정은 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번 대도살후, 유성은 마침내 수족에 대한 살해의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사실상 이때 유성에게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 동생은 겨우 3명이 남았을 뿐이다.

 

건화12년, 열두째 동생 고왕 유홍막이 피살된다.

건화13년, 열여덟째동생, 통왕 유홍정이 피살된다.

 

유성은 모두 18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중 큰형인 옹왕 유요구, 둘째형인 강왕 유귀도는 병으로 요절했고, 아홉째 동생 만왕 유홍조는 교주 오씨와의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남한(南漢) 응건(應乾) 원년(943년, 이 해 겨울 건화(乾化)로 연호를 고친다)에서 남한 건화13년(955년)까지, 유성(劉晟)은 그의 형제 15명을 죽인다. 전체 중국역사상, 아마도 또 다른 유성같이 수족의 정을 돌보지 않고 잔인하게 이렇게 많은 형제를 죽인 황제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