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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역사진상

by 중은우시 2013. 10. 10.

글: 안건회(晏建懷)

 

이묘환태자의 이야기는 원나라때의 잡극 <금수교진림포장합>, 청나라때의 소설 <칠협오의>, 현재의 30부 드라마 <이묘환태자전기>, 그거에 역대의 전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이야기는 개략 이렇다: 송진종(宋眞宗)의 첫번째 황후가 병사하고, 유비(劉妃)와 이비(李妃)는 거의 동시에 임신하여, 황후의 자리를 놓고 다툰다. 유비는 태감 곽괴(郭槐)와 모의하여, 이비가 분만할 때, 껍질을 벗긴 이묘(狸猫, 삵쾡이)와 막 태어난 아이를 맞바꾼다. 그리고 궁녀를 시켜 아이를 목졸라 죽이게 한다. 궁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아이를 태감 진림(陳琳)에게 넘기고, 팔현왕(八賢王)에게 보내어 부양하게 한다. 송진종은 이비가 요물을 낳았다고 여겨서, 그녀를 냉궁에 쳐넣는다. 유비는 아들을 낳은 후 꿈이 현실이 된다. 황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유황후의 아들은 나중에 불행히 요절한다. 송진종은 마침내 팔현왕의 아들이 바꿔치기하여 양자로 삼은 아들인 것을 알고 태자로 세운다. 태자가 점점 자라면서, 한번은 우연히 이비를 만난 적이 있다. 이는 유황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녀는 송진종에게 참언을 하여 이비를 사사시킨다. 태감들은 갖은 방법을 써서 이비를 구해내고, 그녀를 진주(陳州)로 보낸다. 마침 이곳에 있던 포증(包拯)과 우연히 만난다. 포증은 사실을 알고 난 후, 일련의 수사와 심문을 거쳐 마침내 이 하늘이 깜짝 놀랄 대사건을 파헤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유황후가 자결하고, 이비와 이미 황위에 오른 송인종 모자는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이다.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많다. 많은 상상과 억측이 섞여 있다. 가장 가소로운 점은 사료와 조금만 대조하면 발견할 수 있는 잘못들이다. 사건재판때, 즉 역사상의 유황후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송인종이 친정한 명도2년(1033년)에 포증은 막 진사에 합격한지 얼마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의 나이가 많아서, 조정은 그를 대리평사, 건창(지금의 강서성 영수)지현의 직무를 맡겼다. 그러나 그는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고, 계속 집에서 부모를 모셨다. 경우3년(1036년)이 되어서야 포증이 비로소 관직에 나간다. 천장(지금의 안휘성 천장시)지현같은 하급관직이었다. 이런 큰 사건을 심리할만한 기회나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와 역사가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점은 송인종이 확실히 유황후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모친은 확실히 이씨이다. 송인종은 확실히 자신의 신세내력때문에 사건을 크게 일으킨 일도 있다.

 

송진종은 본부인인 곽황후가 사망한 후,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유비를 황후에 앉힌다. 송진종과 유황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고, 다른 자식도 없엇다. 유황후의 주선하에 송진종은 이씨성이 시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이 아들을 유황후가 부양하여 성인이 되도록 기른다. 이 아이가 바로 나중의 송인종이다. 송진종이 임종하기 전에, 13세의 송인종에게 황제위를 넘겨준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유조를 남겨 유황후를 황태후로 삼아, "군국중사, 권취처분(軍國重事, 權取處分)"하게 했다. 이때부터 유태후는 수렴청정을 한다. 그 시간은 11년에 달했다. 임종전에 송인종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역사상의 유태후는 음험하고 독랄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자하고 선량하며 대국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송인종의 생모 이씨도 잘 보살폈고, 그녀를 시녀에서 신비(宸妃)로 승격시키고, 사후에는 황후의 규격으로 후하게 장사지내준다. 송인종에 대하여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에 대한 교육을 중시했다. 정무에 바쁠 때에도 천하의 명유를 불러모아서 그에게 경사를 학습시키고, 그의 학문과 도덕을 배양하도록 했다. 송인종도 유태후에 효성을 다했다. 유태후의 병세가 위중할 때 그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그녀의 복을 빌었다. 유태후의 생일에, 그는 법도를 넘어 백관을 이끌고 그에게 생신축하를 했다. 아들로서 모친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극치의 효성을 보여준다. 모자자효(母慈子孝)라 할 만하다.

 

명도2년(1033년), 65세의 유태후가 병사한다. 송인종은 순조롭게 권력을 넘겨받아 친정을 한다. 이것은 원래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수 있었고, 모친과 아들간의 지극한 사랑과 효성의 미담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새지 않는 벽은 없다. 누군가 송인종의 앞에서 그의 신세내력의 수수께끼를 말해준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는 일석격기천층랑(一石激起千層浪), 즉 일파만파로 번진다. 조정에는 큰 파도가 일게 된다.

 

<송사.인종본기>를 펼쳐보면, 유태후가 사망하기 전후의 기록이 있다. 마치 송인종이 자신의 신세내력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하여 무슨 혈우성풍의 조치를 취하지는 않은 것같다. 이 신세비밀을 캐는 과정은 조용히 이루어진 것같다. 그러나, 사관들이 일부러 감추려고 해도, 우리는 글자의 행간에서 그 과정의 흉험함을 느낄 수 있다. 사태의 심각성과 송인종의 내심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태후가 붕어하고, 송인종은 즉시 자신이 이신비의 소생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어 재상 여이간(呂夷簡), 추밀사 장기(張耆), 추밀부사 하송(夏竦), 참지정사 진요좌(陳堯佐), 예부상서 안수(晏殊)등 유태후가 임명한 조정중신은 모조리 좌천되어 경성에서 쫓겨난다. 한 명도 남겨두지 않고, 새로이 유태후시대에 빛을 보지 못했던 관리들을 조정대신으로 발탁한다. 정부의 인원은 거의 새로 판을 짰다. 이어서 이신비를 황태후에 추존한다. 그리고 조정에서 "봉구(封口)"를 실시한다. 다시는 유태후 수렴청정에 관한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세내력의 수수께끼로 심신이 피로해진 송인종은 자신이 특별히 후회할 멍청한 일도 한 가지 벌인다. 남송 왕전의 <묵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장의태후(이씨)는 소릉(송인종)을 낳았다. 장헌(유태후)가 죽을 때까지, 장의가 모친인 줄을 몰랐다. 장의가 죽자, 봉선사에 빈소를 차리고, 소릉은 장헌의 죽음에 곡을 하는데 도를 넘을 정도였다. 장혜(양씨)태후가 황제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황제의 모친이 아니다. 황제에게도 모친이 있다. 신비 이씨는 이미 죽었고, 봉선사에 모셔져 있다.'" 또 다른 북송의 소백온이 쓴 <소씨견문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연왕이 송인종에게 말하기를: '폐하는 신비의 소생입니다. 신비는 비명에 죽었습니다.'"

 

장혜태후는 송진종의 비인 양씨이다. 송인종이 태자로 있을 때, 양씨는 그의 생활기거를 보살펴 주었다. 송인종은 그녀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연왕은 송진종의 동생이며, 송인종의 숙부인 조원엄이다, 역시 '이묘환태자'의 극에서 팔현왕의 원형이다. 이 두명의 송진종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하나는 유씨가 그의 생모가 아니라고 말하고, 하나는 생모가 다른 사람에게 피살당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송인종에게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송인종은 급히 이신비의 영구가 놓여진 봉선사로 간다. 그리고 관을 열어 시신을 검사하여 진상을 찾으려 한다. 이신비의 관은 4개의 철삭으로 매어져 큰 우물의 위에 놓여 잇었다. 송인종이 관을 열어 보니, 그녀는 얼굴이 온전했고, 마치 살아있는 것같았다. 분명히 독약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면, 유태후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송인종의 주도하에, 조정의 상하에 번천복지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도광검영은 아니지만 학려풍성(鶴唳風聲)은 수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을 열어 시신을 검시한 후, 송인종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한다. 유태후가 자신을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니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신세내력문제는 한켠으로 미뤄두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더욱 중요한 변방의 문제와 개현경장의 조정대사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