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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 사대부들의 "외호(外號)"

by 중은우시 2013. 6. 27.

글: 안건회(晏建懷)

 

<수호전>의 일백팔장은 사람들마다 외호를 가지고 있다. 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 이 말만 들으면 그의 외모를 알 수가 있다; 벽력화(霹靂火) 진명(秦明), 이것만 들어도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 이것만 들어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 송나라때, 강호호한들만 외호를 짓기 좋아한 것이 아니라, 조당에서 단정하게 옷깃을 여미고 앉은 사대부들도 외호를 짓기를 좋아했다.

 

용모를 가지고 외호를 짓는 것도 사대부들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송신종때, 손각(孫覺), 손수(孫洙)가 같이 관각대신이었는데, 손각은 뚱뚱하고, 손수는 말랐다. 두 사람은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호사가는 그들의 신체특징을 가지고 손각을 "대호손(大鬍孫)", 손수는 "소호손(小鬍孫)"이라 불렀다. 송휘종은 즉위초기, 증포(曾布), 한충언(韓忠彦)이 나란히 재상이 되었다. 증포는 아주 키가 작고, 한충언은 아주 컸다. 두 사람이 대전에 서서 황제와 정사를 논할 때면 키다리와 난쟁이같았고, 거북이와 백학이 서 있는 것같았다. 동료들은 참지 못하고 그들을 "귀학재상(龜鶴宰相)"이라고 불렀다.

 

송나라는 북방인이 건립한 나라이다. 조정의 상하에서 남방사람에 대하여는 멸시를 했다. 송태조가 일찌기 정한 규정에 따르면 남방인을 재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비록 나중에는 일부 남방인이 재상에 올랐지만, 단 <송사.간신전>은 거의 모두 남방인이다. 이것도 타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 왕종서 자주 지역차별이 나타났다. 북방인들은 특히 외호를 지어 남방인을 조롱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사천인을 "천약저(川藞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더럽고 멍청하다는 의미이다. 복건인들은 '복건자(福建子)'라고 부렀는데, 그 의미는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마광(司馬光)과 여혜경(呂惠卿)은 정견이 서로 달라서 상대방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송신종의 면전에서 자주 다투곤 했다. 한번은 거의 주먹질을 할 뻔했다. 송신종이 "재상은 시비를 말해야지 어찌 이러는가?"라고 화를 낼 정도였다. 사마광은 섬주 하현(지금의 산서성 하현) 사람이고, 여혜경은 복건 진강(지금의 복건성 천주시)이다. 동료들은 싸움을 구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 섬서인과 한 복건자., 어찌 서로 마음이 맞을 수 있겠는가." 이때부터 '복건자'는 여혜경의 외호가 된다.

 

어떤 경우는 재능과 장점을 가지고 외호를 만들었다. 찬탄하고 흠모하는 뜻이 담겨 있다. 경력년간에, 구양수는 제주(안휘 제주시)로 좌천된다. <취옹정기>를 지어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에게 '취옹(醉翁)'이라는 외호를 붙여준다. 기실 그때 구양수는 30여세에 불과했다. 송기(宋祁)가 봄날을 묘사한 싯구는 아주 유명하다: "녹양연외효한경(綠楊煙外曉寒輕), 홍행지두춘의뇨(紅杏枝頭春意)". 그는 공부상서를 역임한 바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홍행상서(紅杏尙書)"로 불렀다. 용도각직학사인 두호박(杜鎬博)은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았다. 매번 서적을 읽을 때면 반드시 서리에게 말하곤 했다: "어떤 일은 어떤 책의 어느 권 어느 행에서 보았다." 서리가 찾아보면 과연 틀림이 없었다. 사대부들은 그의 기억력을 찬탄하여, "두만권(杜萬卷)"이라고 불렀다.

 

어떤 경우는 성격을 나타냈다. 서학박사 미불은 개성이 괴이하여, 당복을 입고, 결벽정이 있으며, 기석(奇石)을 만나면 절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전(米癲)"이라고 불렀다. 한번은 사대부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한참 먹고 마시던 중 미불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말하는데, 그대의 뜻을 듣고 싶다." 소동파와 같은 문단의 영수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이때 소동파는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사람들의 뜻에 따르겠다." 소동파마저도 그의 "미전"이라는 외호가 적절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미전"이라는 외호는 널리 알려져서 삼척동자도 알게 될 정도였다. 송신종 희종연간(1068년-1077년), 재상 왕안석은 송왕조의 재력이 비어있고, 군사력이 쇠약한 것을 우려하여,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혁변법을 대거 추진한다. 송왕조라는 무너져가는 왕조를 구원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개혁에서 대대적으로 손을 대었고, 사람을 기용하는데서 독단적으로 행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천명은 두려울 것이 없다. 조종의 법도도 따를 필요가 없다. 사람의 말도 믿을 것이 없다." 태도가 아주 고집스러웠다. 사대부들은 등뒤에서 그의 척추를 자르며 "요상공(拗相公)"이라고 불렀다.

 

어떤 경우는 조정에서의 태도와 정치풍격을 따서 짓기도 했다. 포증은 사람됨이 강직했고, 철면무사했다. 그는 일찌기 개봉지부로 있을 때, 경성의 소송과 치안을 담당한다. 당시 소송에는 한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백성은 직접 관청에 소장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급관리를 통하여 제출할 수 있었다. 지부대인이 하루라도 빨리 수리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돈을 쓰고 관계를 동원해야 했다. 소송을 하게 되면 설사 이기더라도 돈을 손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포증은 개봉부에서 이 누습을 개혁한다.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찾아와서 억울한 점을 호소할 수있게 해주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소송비용을 감소시켜주었을 뿐아니라, 지부대인이 소송내용을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심리기간도 단축했다. 이렇게 하여 일거수득의 효과를 거둔다. 경성에는 신속히 민요가 전파된다: 관절부도(關節不到), 유염라포로(有閻羅包老)" 그 뜻은 소송을 하는데 관계를 뚫기 위해서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포대인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염라포로"는 백성들의 포증에 대한 애칭이 된다.

 

가장 재미있는 외호는 아마도 열정(劣政, 형편없는 정치)과 용관(庸官, 못난 관리)에 대한 풍자를 담은 것일 것이다. 정위(丁謂)가 재상으로 있을 때, 그는 황제의 허영에 영합하여, 국가대사마다 반드시 선학이 궁궐의 위로 날아올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여 "학상(鶴相)"이라고 불렀다. 송신종때 재상인 왕규(王珪)는 대전에 오르면서, "취성지(取聖旨)"라고 말하고, 황제가 비시(批示)한 후에는 "영성지(領聖旨)"라고 말했다. 다른 관리들에게 전할 때는 "득성지(得聖旨)"라고 했다. 그는 재상으로 16년간이나 있었는데,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고, 아무런 성취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은 "삼지상공(三旨相公)"이라고 불렀다. 남송말기, 가사도(賈似道)는 누이인 가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재상이 된다. 그는 탐욕스럽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는 금은재물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귀뚜라미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널리 귀뚜라미를 구하게 한다. 그가 만족할만한 귀뚜라미를 바치면 금은으로 크게 상을 내리고 파격적으로 중용했다. 그는 국가안위는 돌보지 않았다. 몽골대군이 양양,번성을 포위하고 있어, 전선에서는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그는 보고를 받은 후에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귀뚜라미를 가지고 놀았다. 백성들은 그를 "실솔상공(蟋蟀相公)"이라고 불렀다.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외호는 인품의 반영이고, 관품의 반영이며, 주류의 평가를 드러내고, 민간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만일 <청명상하도>가 당시의 시정생활을 묘사했다면, 사대부의 외호와 함께 묶어서 살펴보면 극히 분명한 정치생활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송나라의 관료사회사, 정치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