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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육조혜능(六祖惠能): 진신(眞身)이 1200년간 받은 최욕(摧辱)

by 중은우시 2013. 8. 4.

글: 허석림(許石林) 

 

광동 샤오관(韶關)은 남화사(南華寺)로 유명하고, 남화사는 육조혜능과 <단경(壇經)>으로 세계불교문화의 성지가 되었다. 육조혜능의 진신은 지금까지도 남화사의 대전 안에 모셔져 있고, 매일 전국과 세계각지에서 오는 불교신자들과 관광객들은 1200여년의 풍우동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완벽한 육조의 진신에 절을 하고있다. 육조전의 앞에는 향불이 끊이지 않아.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세계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인체진신은 기실 당초처럼 완벽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아름답지만, 그의 몸에는 일찌기 심각한 상처가 났고, 골격과 내장등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현재 사람들이 보는 것은 정교하게 수선된 진신이다.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육조진신의 그 화려한 가사 아래에, 흉험하고 추악한 역사적인 정보를 덮고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불가는 자비를 중시하고, 관대한 마음을 품는다. 탐,진,치를 경계한다. 과거에 사람들이 범한 잘못을 가지고 따지지 않고, 사람들이 범한 죄를 추궁하지 않는다. 다만 세속이 눈으로 보면, 과거에 발생한 진상을 세상에 밝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역사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상을 잘 알지 못한 결과는 결국 역사에 책임지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미리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일찌기 나쁜 짓을 했던 사람 혹은 모른척하거나, 소요하거나, 참회하거나, 죽어라 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모두 반드시 진실한 역사정보를 기초로 하여야 한다. 진실한 정보를 기초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신앙과 가치관을 건립할 수 있을 것인가?

 

육조혜능은 713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육신을 남겨,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방부제를 주사하지도 않았고, 진공밀폐를 실시하지도 않았다. 광동은 기후가 덥고, 환경이 습기가 많아, 지금까지 이미 1200여년동안 부패변질되지도 않고, 말라버리지도 않고, 여전히 평안한 모습을 유지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같다. 과학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불법은 정말 불가사의하다.

 

전문가인 리즈(李紫)의 소개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화장을 하는 것을 '다비'라 한다. 고대인도 팔리어를 음역한 겅디다. 법도에 따르면, 승려의 유체를 화장할 때 반드시 다비식을 거행하여야 한다. 손으로 불을 들고 있는 승려들은 소리내서 찬양한다: 인연을 따라 가고 법에 따라 다비를 한다....불교는 인도에서는 일찌감치 소실되었는데, 화장과 같은 장례의식은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승려의 유체는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아주 개별적으로 앉아서 죽은 경우 소위 몸은 죽었지만, 색신불산(色身不散)된 경우에는 특수한 처리를 하여 진신(眞身)이 된다. 이 특수처리는 신비로울 것도 없다. 대체로 먼저 베로 몸을 꼭꼭 감싸고, 진흙에 섞은 향료를 석탄과 목탄이 든 큰 항아리에 넣는다. 시일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마르고 나면, 다시 몸에 여러번 칠한다. 불학학자 인순(印順)은 특별히 지적한다. 유체의 목은 쇠로 고정하여 머리가 아래로 숙여지지 않게 한다고. 진신과 이집트의 미이라가 구분되는 점이라면 기본적으로 생전이 모습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지금 볼 수 있는 육조진신은 보통사람보다 작은데, 이는 마르면서 수축되어서 그런 것이다.

 

육조가 사망한지 얼마되지 않아, 전설에 따르면, 신라인이 밤에 육조진신의 수급을 훔쳐가려고 했으나 나중에 육조의 목에 있는 철편(鐵片)이 보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확실한 문헌기록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전설이다. 다만 이것은 인위적인 제1차 수난이기도 하다. 천년을 거친 육조신신은 계속하여 남화사에 좌정하고 있었고, 역대왕조에서 더 이상 침해를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존중해왔다. 일본이 중국을 침입할 때 그것은 다시 한번 겁난을 당한다. 어느 날, 남화사에 몇몇 일본군인이 온다. 수행원중 군의관이 있었다. 그들은 진신이 가짜라고 의심해서, 해부해서 확인해 보려고 했다. 일본인이 수술카로 육조의 등 뒤에 작은 구멍을 내고, 구멍으로 들여다 본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완벽하게 보존된 골격, 내장이었다. 주위환경은 근본적으로 완벽한 보호조치를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놀라움과 일본인의 신앙습관때문인지, 이 몇몇 일본군인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은 보살의 진신이라고 인정하고 놀라서 절을 하고는 물러난다. 일본인의 수술칼은 육조진신에 심각한 손괴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동시에 이로 인하여 어느 정도 남화사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라. 만일 일본인이 이것을 맏지 않았다면 전체 사묘를 약탈한 후에 불질러 버렸을 것이다.

 

홍위병의 공전절후의 훼손이라는 제2차겁난은 지금까지 가장 참혹한 것이었다. 혜능의 진신이 거의 훼멸되었다. 최근 들어 <불원노화상법휘>를 읽었는데, 노화상은 이렇게 썼다: 하루는, 육조진신이 홍위병에 의하여 손수레에 실려 샤오관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나쁜 놈, 가짜, 사기꾼이니 불태워서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한 사람이 쇠방망이로 등쪽 가슴부위를 때려 사발만한 구멍이 난다. 오장육부를 집어서 대불전에 버린다. 늑골, 척추골도 가득 버려진다. 그리고 이것은 돼지뼈, 개뼈이고 가짜라고 말한다. 육조의 머리에 철발(鐵鉢)을 씌워서, 얼굴에 "나쁜 놈(壞蛋)"이라고 두 글자를 써서 대불전에 놓아둔다. 원래는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하였지만, 몰래 가서 보았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몰래 육조의 영골을 수습했으나 둘 곳이 없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겁이 났고, 둘째는 자신도 어느 때 맞아죽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육조의 열골을 이렇게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와합(瓦盒)의 아래위를 잘 덮어서 구륭정 뒷산의 큰 나무 아래에 묻어서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홍콩의 성일법사(聖一法師)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와서 사진지로 이 곳을 찍으라고 하고 태평시대가 되었을 때 꺼내기로 하였다. 단전조사(丹田祖師)의 영골도 마찬가지로 해를 입었다. 나도 각각 수습했다.

 

불원법사(佛源法師)는 허운(虛雲)노화상의 제자로 허운노화상이 아끼고, 배양했던 사람이다. 불원화상은 허운화상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깊었고, 그것은 말에서도 드러났다. 지금까지도 법회를 주재하거나, 공과를 하거나, 사묘를 관리하거나, 개시하거나 일상담화할 때, 허운노화사을 모범으로 삼아서 하고 있다. 남화사는 허운이 중흥시키고, 나중에 불원이 다시 허운의 위탁을 받아 남화사의 주지로 있었다. 1958년, 불원은 우파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1961년 출옥한 후 남화사로 돌아온다. 그러나 단속을 받고 박해를 받아 심각한 질병에 걸린다. 지금 노화상은 85세의 고령이다. 삼차신경이 파괴되어, 씹는데 영향을 받아, 수십년간 유동식만을 먹고 있다.

 

신체가 망가졌지만, 불원의 수불의지는 전혀 꺽이지 않았고, 오히려 강해졌다. 한번은, 남화사의 화상들이 환속하도록 강제되었는데, 불원등 소수화상은 죽어도 환속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적지 않게 두들며 맞기도 했다.

 

육조영골은 불원이 비밀리에 보존해놓는다. 홍콩의 성일법사는 남화사로 가서 불원의 말에 따라 몰래 사진을 찍어둔다. 그렇게 하여 매장장소를 기억할 수 있게 하였다. 1979년이 되어 불원이 명예회복되고, 곧이어 북경중국불학원에서 율학을 강의한다. 거기서 명진, 거찬의 두 법사를 만나서 육조진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다시 조박초(趙朴初)에 보고한다. 조박초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이건 큰 일이라고 여긴다. 불원은 회고한다: 조박초는 즉시 시중쉰(習仲勳, 당시 광동성최고지도자)에게 서신을 보내 사람을 남화사로 파견해서 이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착한다.

 

시중쉰은 서신을 받은 후 바로 부성장 한 명을 남화사로 보내어 업무를 처리하게 한다. 다만 당시의 형세는 종교정책이 아직 완전히 집행되지 않고 있을 때어서, 남화사측에서 육조를 다시 회복시켜 모시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온 사람은 남화사측에 시중쉰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동의하면 회복시키고, 동의하지 않아도 회복시켜라!" 말이 뜻은 분명했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남화사측에서는 그저 명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조박초는 바로 불원을 북경에서 남화사로 돌아가게 하여 이 일의 처리에 협조하게 한다. 이 역사는 불원노화상의 회고에 들어 있으며 아주 감동적이다."육조영골을 꺼낼 때, 흙속에 묻힌지 이미 십여년이 되었고, 남방은 습기가 많아서, 늑골은 이미 곰팡이가 피어서 변했다. 그러나 여전히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척추골은 습기에 더욱 많이 침해를 입었다. 흙에 묻을 때보다 훨씬 못했다. 단전조사의 영골은 더더구나 예전만 못했다. 본인은 두 조사의 영골을 받들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목탄불로 깨끗하게 말린 후, 단향목으로 척추골, 늑골의 하나하나를 단향목 위에서 연결시켰다. 다 붙인 후, 다시 법도에 따라 진신내에 넣었다. 바깥은 베와 칠로 봉쇄하고, 단향목에 기록했고, 그 인과를 남겼다. 육주의 오장육부는 이미 썩었다. 할 수없이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단향가루와 혼합하여 형태를 만들어 육조의 가슴안에 넣는다. 당시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평생 육조진신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만일 나는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육조, 단전의 영골을 후산에 묻어서 이렇게 손괴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은 보호를 다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마음 속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저 이후 더욱 세심하게 현재상태대로 보호할 뿐이다. 몸과 목숨을 바쳐 육조를 잘 보호할 뿐이다. 불원노화상은 친히 보았다. 육조영골은 1200여년을 거쳤지만 여전히 금황색이고, 단단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단전조사의 영골은 흑색을 나타냈고, 무게도 많이 가벼웠다. 이것은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다. 당시의 국무원총리는 불원노화상에게 이렇게 반성하여 말했다: 만일 문혁의 겁난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육조진신은 절대로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육조의 자손으로 이를 위하여 몇번이나 몇년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에, 주위에는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드러내놓고 울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는데만 골몰하여 육조건 육조가 아니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감산대사(憨山大師)도 한 사자충에게 칼을 한방 맞았다. 다행히 등에 술잔크기의 구멍만 냈을 뿐 육조, 단전처럼 오장육부까지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육조진신이 당한 겁난을 알고나면 이 진실한 역사정보를 가지고 다시 육조의 화려한 가사를 걸친 진신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필자는 여러 스님 및 거사들로부터 이 역사를 들었다. 매번 들을 때마다 떠나지 않는 의문이 생겨나곤 했다. 이것은 도대체 누가 한 짓인가? 중국문화에는 마치 문책하는 습관과 정신이 없는 것같다. 역사상 많은 일들이 애매하면 애매한대로 넘어가곤 했다. 당시 홍위병을 이끌고 곡부삼공(曲阜三孔)을 부순 담후란(譚厚蘭)은 최근에서야 그녀의 이름이 공개되었다. 그녀의 비참한 최후는 인과응보설을 인증한다. 삼공을 유람할 때면, 나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문을 가졌다: 담씨성을 가진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서 대추(大錘)를 들고 수십톤이나 무게가 나가고 웅장한 자태로 서 있던 명성화비(明成化碑)를 깨트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건축과 석비를 모조리 깨버릴 수 있었을까? 누가 제76대 연성공 공령이의 묘를 파헤쳤을까? 그리고 그의 유체를 백수나무에 걸어두고 비투(批鬪)했을까? 담모여인 혼자서 한 것일까? 설마 그녀가 힘이 엄청난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담모여인의 동료와 도와준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가 있는가? 나는 곡부를 유람할 때면 생각한다: 이 일을 제대로 밝혀내지 않으면, 성현은 평안하게 쉬지를 못할 것이고, 흉악한 기운이 영원히 곡부이 상공을 맴돌 것이다.

 

곡부인, 산동인, 중국인은 오늘 유가문화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데, 이 글에서 영원히 화려한 정신적인 광염이 나오지 않을까 두렵다. 마찬가지로 나는 묻고 싶다. 당시 남화사와 육조진신을 훼손시킨 홍위병들은 어디에 있는가? 위에서 말했다. 불가는 자비롭고, 관대한 흉금을 지녀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친 것을 따지지 않는다고. 문제는 사람을 해친 사람이 평안하게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행복한 생활을 누려도 되는 것일까? 영골이 곰팡이가 피고 변했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처리해서 새로 만들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도 곰팡이가 피고 바뀌었지만, 그것을 계속 그렇게 놔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 참회일을 만들어, 불법을 강력하게 널리 알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참회가운데, 심령이 변한 것은 깨끗히 씻어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의 참회가운데, 심령이 정화되고 승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조문화절은 그저 융중한 각종 의식과 화려한 법회와 시끄러운 논단 그리고 운점무요(雲苫霧繞)의 선만이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