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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후진타오가 면직시킨 장쩌민의 심복 3명

by 중은우시 2013. 8. 18.

글: 임예(林銳)

 

후진타오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있으면서 3명의 장쩌민의 심복을 제거했다. 천량위(陳良宇), 리짜오싱(李肇星) 그리고 보시라이(薄熙來). 그리고 이들 각각의 면직 배후에는 모두 놀라운 비밀이 있다.

 

천량위

 

2006년 5월초, 후진타오는 군사위주석의 신분으로 황해에서 북해함대를 시찰할 때, 두 척의 중국군함이 돌연 후진타오의 구축함을 향하여 사격을 가했다. 구축함에 있던 5명의 해군사병이 죽었고, 그후 북해함대는 급속히 연습해역을 벗어나 안전해역으로 간다. 다시 암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후진타오는 함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칭다오기지로 돌아간다. 거기더 더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윈난으로 간다. 후진타오는 윈난에서 1주일을 머문 후에야 베이징에 얼굴을 나타낸다.

 

베이징으로 돌아간 후, 후진타오는 일련의 행동을 취한다. 첫째, 장쩌민의 정적인 천시통(陳希同)을 보석으로 석방하여 치료받게 한다. 둘째, 해군부사령관 왕서우예(王守業)와 그의 배후인물인 장쩌민의 비서이자 전 군사위 판공청주임임 자옌안(賈延安)의 공동죄증을 확보한 후, 장쩌민이 더 이상 군내사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핍박한다. 셋째, 부정부패척결의 명목으로 천량위, 황쥐(黃菊)등 장쩌민의 인물들을 제거한다.

 

2006년 9월 24일, 상해시위서기, 중앙정치국위원이며 장쩌민의 '득력간장(得力干將)'인 천량위가 전용기로 베이징의 정치국전체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갔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돌연 체포된다. 같은 날, 천량위의 상해시위서기,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위원의 직무는 면직되고, 중앙기율검사위는 천량위를 엄중한 기율위반혐의로 입건하여 조사하게 된다. 2008년, 천량위는 뇌물수수, 직권남용, 직무소홀죄등으로 18년형을 받는다.

 

상해시위서기 천량위는 일찌기 장쩌민의 이상적인 후계자후보였다. 천량위는 1946년생으로 1984년 상해전기공업공사 당위서기로 부임했을 때, 정쩌민의 부인 왕예핑(王冶坪)을 통하여 장쩌민을 알게 된다. 장쩌민이 "6.4"사태로 인하여 자오즈양의 당내 총서기직을 물려받자, 천량위는 바로 장쩌민에 의하여 상해시장, 시위서기 및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발탁된다. 관운은 형통했고, 장쩌민이 가장 신임하고 '장쩌민계'의 본거지 상해를 지키는 대관가가 된다.

 

16대이후, 장쩌민은 천량위를 18대에 후진타오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키울 생각을 가진다. 장쩌민은 막후에서 후진타오를 괴롭히고, 천량위는 공개적으로 후진타오를 공격하며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거시조정정책을 견제한다. 장쩌민은 17대를 준비할 때 천량위를 정치국상임위원 및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밀어넣어 후계자로서 18대에 후진타오를 대체하여 장쩌민의 진정한 승계자가 되도록 할 예정이었다.

 

상하이는 천량위의 독립왕국이어서,후진타오는 조직계통을 통하여 정면으로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제사건을 빌어, 대량의 믿을만한 인원을 파견하여 상하이에는 암중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천량위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를 대거 수집한다. 장쩌민은 깜짝 놀라서, 천량위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한다.

 

리짜오싱

 

2007년, 중공17대전에, 장쩌민이 정치국내에 심어놓은 두명의 심복 황쥐와 천량위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감옥에 들어갔다. '태상황' 장쩌민은 리짜오싱을 정치국에 진입시켜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고자 한다. 장쩌민파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외교부부장 리짜오싱이 17대에 한단계 더 올라가서, 중공중앙정치국에 진입할 것이라고.

 

그러나, 2007년 4월, 후진타오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외교부로 간다. 업무검토의 고위층회의에 참가한다. 리자오싱이 '심각한 검토'를 하기를 기다렸다가, "리짜오싱 동지의 검토는 성의있고 진지하다. 잘못을 인식했으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진타오는 "다만, 어쨌든 당과 국가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조성시켰다. 나는 선포한다. 리짜오싱 동지의 외교부장 직무를 면직시키고, 금일부터 발효한다."

 

리짜오싱의 돌연 면직은 표면적으로 보면, 후진타오가 2006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접대를 받지 못한 점, 치사때 파룬공의 항의를 받은 점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국가를 중화민국국가로 잘못 부르는 등의 잘못때문이다.

 

실제로 리짜오싱과 후진타오간의 원한은 그 이전부터 맺어졌다. 2002년초, 중공총서기, 중공국가주석의 직을 승계한 후진타오가 미국을 방문하는데, 미국은 준국가주석의 신분으로 후진타오를 접대했다. 당시 미국 부통령인 체니는 후진타오의 진정한 생각을 알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후진타오와 1대1로 대화를 한다. 인삿말등을 마친 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방문이 돌연 열렸고, 당시 외교부부부장으로 있던 리짜오싱이 돌연 뛰어들어온다.

 

그후, 체니의 막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예의바르게 리짜오싱을 저지하고자 했고, 이것은 1대1의 회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바로 1대1의 회담이기 때문에 리짜오싱은 후진타오를 감시하기 위하여 억지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후진타오는 크게 노한다. 리짜오싱이 후진타오에 대하여 이렇게 드러내놓고 감시하는 행위는 그의 뒤에 있는 '태상황' 장쩌민이 받쳐주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이 권력을 잡은 후, 리짜오싱은 장쩌민의 발탁으로 외교부 신문사 부사장, 외교부 부장조리, UN상주대표, 주미특명전권대사, 외교부 부부장을 거쳐, 2003년 외교부 부장에 오른다.

 

발탁된 리짜오싱은 후진타오를 감시할 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장쩌민을 위하여 힘을 다 했다. 장쩌민은 파룬공탄압건으로 해외에서 계속하여 기소당하고, 여러 국가의 법정에 고발되었다. 2003년, 장쩌민은 중공국가주석에서 물러나고, '외교원수주권면제권'을 잃었다. 해외의 여러 법정에서 기소당한 것에 대응하기 위하여, 장쩌민은 심복인 리짜오싱을 외교부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리짜오싱은 외교부장이 된 후, 27명의 특별사건팀을 주미대사관에 파견하여, 장쩌민의 기소사건을 대응하게 한다. 각국대사와 총영사를 임명할 대, 리짜오싱은 그들을 불러 담화하며, 그들의 파룬공에 대한 태도를 확인했다. 장쩌민의 편에 서는 사람이면, 그들을 장쩌민이 기소된 나라로 파견했다. 동시에 중국의 주외국대사관에 파룬공을 감시하는 전문인력을 파견한다.

 

후진타오가 정권을 잡은 기간동안, 장쩌민의 또 다른 심복을 제거한다. 그것은 바로 현재 시끄러운 전 충칭시위서기, 정치국위원 보시라이이다.

 

2012년 2월 6일, 보시라이와 나쁜 짓을 함께 하던 전 충칭시 부시장, 공안국 국장 왕리쥔이 보시라이와 등을 돌리고, 살인멸구를 피하기 위해, 미국주청두총영사관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이는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분열을 불러온다.

 

2012년 3월 15일, 보시라이는 충칭시위서기의 직위를 면직당한다. 4월 10일, 중공중앙위원 및 정치국위원 직위를 정지당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8일 당적과 공직을 박탈당한다.

 

일찌기 2007년의 중공 '17대' 때, 당시 국가부주석으로 있던 쩡칭홍은 전면적으로 퇴진한다. 후진타오가 가장 중시한 사람은 리커창, 시진핑이었다. 장쩌민, 쩡칭홍은 계속하여 후진타오를 견제했고,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천량위가 물러났으므로, 자신의 심복중에는 2007년에 올려서 견제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장쩌민은 어쩔 수 없이 여러 관계의 균형을 고려하여, 과도기의 최고지도자로 시진핑카드를 내민다.

 

장쩌민은 중공최고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보시라이는 파룬공박해의 혈채로 장쩌민이 암중으로 지정한 장쩌민파의 후계자였다. 장쩌민파는 18대에서 정법위의 자리를 탈취하고자 한다. 시기가 성숙되면 다시 시진핑을 몰아내고, 보시라이를 올릴 생각이었다. 이 계획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져서 전체 판도가 붕괴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