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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선종(唐宣宗)의 세 가지 얼굴

by 중은우시 2013. 5. 3.

글: 조염(趙炎)

 

백거이(白居易)가 죽은 후, 당선종 이침(李忱)은 추도시를 쓴다. 그중에는 "문장이만행인이(文章已滿行人耳), 일도사군일창연(一度思君一愴然)!"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감동할만하다. 임금으로서 이처럼 신하를 생각해주다니 이런 유정유의(有情有義)는 고금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동은 감동이고, 필자는 그의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침은 너무 잔머리를 많이 굴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후세의 좋은 명성을 얻기 위하여 그는 일찌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헌종(唐憲宗)의 집권기간동안,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錡)는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여 황제를 돌아가면서 하고자 했다. 그러면 자신에게도 차례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황제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황제가 보내온 병사가 정말 그의 집으로 왔고,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모조리 적몰(籍沒)되었다. 이기의 애첩인 정씨(鄭氏)는 당헌종의 곽귀비(곽자의의 딸)의 시녀가 된다. 어느날 당헌종이 우연히 정씨를 만나고, 이 어린 여자에 관심을 보인다. 신분내력을 물어보니 이기의 여자였다. 죽은 자의 여자를 건드리는 재미도 괜찮다. 그래서 패왕경상궁(覇王硬上弓)하여 정씨는 아이를 하나 낳는다. 그가 바로 나중의 당선종 이침이다.

 

이런 출신에 대하여 이침은 고민이 많았다.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곽귀비 소생의 아들이 법정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당헌종이 죽자, 이침의 형이 순조롭게 등극한다. 그가 바로 당목종(唐穆宗)이다. 그후 당목종의 세 아들이 각각 몇년씩 황제를 지낸다. 이침은 황숙이지만, 환관만도 못했다. 특히 당문종, 당무종이 재위하던 몇년동안 이침은 더욱 우울해 했다. 시시때때로 목숨까지 위협받았다. 그가 구차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첫번째 얼굴: 장사충릉(裝傻充), 즉 바보인 척하고 멍청한 척하는 것이었다.

 

바보는 항상 바보의 복이 있는 법이다. 진짜 바보인지 가짜 바보인지 따질 것도 없이, 어쨌든 이침은 바보인척 하는 바람에 복이 왔다. 당문종, 당무종 형제는 친숙부를 '광숙(光叔)"(그는 光王이었다)이라고 조롱할 때, 환관의 우두머리인 마원지(馬元贄)는 이미 다음번 허수아비를 물색하고 있었다. 허수아비를 두는데 가장 좋은 것은 바보를 고르는 것이다. 당무종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태자로 삼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마원지등이 어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것인가. 급히 이침을 황제의 보좌로 끌어올린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이침은 바보인척 한 것일 뿐인데, 이들 환관들이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다시한번 이 말은 입증되었다: 아래에 물건이 없는 자는 기본적으로 머리도 없다. 십중팔구는 멍청이이다.

 

이침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두번째 얼굴: 기민과인(機敏過人), 즉 남들보다 기민함을 드러낸다. 카멜레온도 그처럼 빠르게 변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조정업무를 처리하면서 환관과 권력귀족을 압박했다. 그러면서 매일 질리지도 않고, '정관정요'를 읽는다. 원래 그는 조상 이세민을 배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제, 기뻐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환관들은 미칠 것같았다. 너는 바보가 아니었나? 어찌 순식간에 이렇게 총명하고 시원스럽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사람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이침이 한 일은 확실히 바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재위13년동안, 그는 과거를 중시하고, 당무종이 멸불(滅佛)한 잘못을 바로잡았고, 수십년간 지속된 우리당쟁(牛李黨爭)도 철저히 해결하였으며, 광망한 토번도 혼내주고, 하황(河湟)의 땅을 수복한다. 그는 관료사회를 정돈하고, 황친과 환관의 권한을 제한하였으며, 감로지변때 죽은 이훈, 정주이외의 모든 백관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환관을 뿌리채 뽑고자 하였지만, 환관의 세력이 너무 크다보니, 그는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동안 환관들은 많이 억눌려 있게 된다.

 

나중의 사서기록자들은 당선종의 두번째 얼굴에 미혹되었다: 폐하. 원래 당신은 바보가 아니었군요. 좋습니다.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 듣기 좋은 말을 많이 써놓겠습니다. 그래서 당선종에게는 "소태종(小太宗)"이라는 별명도 붙는다. 그의 재위기간을 "소정관(小貞觀)"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제2의 이세민이었던 것이다. 이런 듣기 좋은 말을 보자: "당선종은 성격이 명찰침단(明察沉斷)하고, 용법무사(用法無私)하며, 종간여류(從諫如流)했으며 중석관상(重惜官賞)하고, 공근절검(恭謹節儉)했고, 혜애민물(惠愛民物)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기려서 소태종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높은 평가는 당나라때 두번의 태평성대에나 가능했다. 그런데 어찌 몇년이 지나지 않아 황소의 난으로 나라가 거덜나는가? 이것은 바로 당선종의 세번째 얼굴: 허두파뇌(虛頭巴腦), 즉 허위 가식적이라는데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말하곤 한다. 사람은 다면성이 있다고. 억지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은 쉽게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분류법을 당선종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조금도 극단적이지 않다.

 

당선종이 죽은 후, 대신들은 그에게 시호를 바친다: "장인신총의도대효황제(章仁神聰懿道大孝皇帝)" 동시에 그에게 묘호를 바친다. 선종(宣宗). 전자는 대단하다. 모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좀 들어맞지 않는다. 왜 들어맞지 않는가? 뒤의 묘호가 바로 답안이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인'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효'라는 것은 더더욱 헛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대신들의 문자유희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마디 찬미의 말을 늘어놓고, 다시 몇 마디 폄하하는 말을 붙인다. 그러면 플러스 마이너스 해서 제로가 되는 것이다. 너는 그저 좋지도 나쁘지도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가운데 세월을 보낸 황제일 뿐인 것이다.

 

사서에 황제의 평생을 기록하면서 일반적으로 황제의 후비들을 귀찮을 정도로 나열한다. 왜 그런가? 후비는 황제를 위해 자식을 낳기 때문이다. 태자, 왕야, 공주들에게 엄마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선종의 역사를 쓰는데에는 이 방면에서 아주 기이하다. 태자 이최(李漼, 나중의 唐懿宗)를 낳은 조씨(晁氏, 원소황후)에 대하여 간단히 몇 마디 소개를 한 이외에, 나머지 이십여명의 자녀들의 모친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구재인(仇才人)은 난산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다른 후비는? 예를 들어, 오소의, 유씨, 진씨등은 모두 어떻게 죽었는가?

 

한 가지 예를 들면 그것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절강지방관리가 미녀 한 명을 바쳤다. 당선종은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 며칠동안 이 미인에게 무수한 기진이보를 선물로 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선포한다: "이 여자를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대신들은 그 말에서 살기를 느낀다. 대신들은 모두 이 미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한다. 그러나, 당선종은 말한다: "돌려보내면, 내가 생각할 것이니, 독주를 한잔 하사하겠다." 아무런 죄가 없는 미녀가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여색에 빠져 국사를 망칠까봐 걱정해서일까? 하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녀와 충분히 눌았으니 죽인 것이다. 미녀는 다시 찾으면 된다. 다시 놀다가 지겨우면 다시 죽이면 된다. 이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전이 글에서 소곽씨(小郭氏)를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곽자의(郭子儀)의 손녀이고, 승평공주(昇平公主)의 딸이다.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고대 황실의 예법으로 보면, 소곽씨는 당선종에게 명목상의 모친이 된다. 어쨌든 그의 생모는 일개 시녀가 아닌가. 당선종이 즉위할 때, 소곽씨는 이미 여러해동안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자마자, 소곽씨는 단지 태후(太后)로 된다. 그리고 당선종은 효를 다해야 마땅하다. 그의 부친인 당헌종의 체면을 봐서라도 태후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당선종이 어떻게 소곽씨를 대했는지 보자. 풍문에 따르면, 곽태후와 당목종모자는 모두 당헌종 모살의 혐의를 받는다. 이게 가능한가? 처와 아들이 남편과 친아버지를 죽이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당선종은 믿었다. 즉시 조사를 전개한다. 그리고 태후의 일상비용도 줄여버린다. 곽태후는 우울할 뿐아니라 화까지 난다. 그래서 근정루로 올라가 자셜하고자 시도한다. 다행히 적시에 발견되어 자살은 미수로 끝난다. 태후의 자살미수를 당선종이 들은 후 가서 말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화를 낸다. 그날 밤, 곽태후는 돌연 사망한다. 어떻게 죽었는가? 아마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에게 "효(孝)"를 말할 수 있겠는가?

 

배우 축한정(祝漢貞)은 우스개로 유명했다. 반응이 민첩하여 상황에 맞게 적절한 말을 했으며 유머가 넘쳤다. 당선종은 그가 자신의 무료함을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주 총애했다. 하루는, 축한정이 얘기를 하다가 정치관련이야기를 꺼낸다. 이를 가지고 간하려 한 것이다. 당선종은 즉시 얼굴색이 바뀌었고, "내가 너희들을 기르는 것은 그저 웃자고 하는 것인데 어찌 조정에 간섭하려 하는가?" 이때부터 그를 멀리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부패사건이 벌어지자, 아들을 곤장으로 때려 죽인다. 그리고 그는 유배를 간다. 이처럼 간언을 듣지 않으려 하고 듣기 싫어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찌, "의(懿)"자가 어울리겠는가?

 

이렇게 분석해보면, 모두 당선종이 왜 백거이를 추도하는 시를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의 세번째 얼굴의 산물이다. 허위가식위선. 백거이의 걸출한 문명(文名)과 뛰어난 관성(官聲)을 빌어 천하문인과 사대부의 마음을 회유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인재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좋은 명성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편협한 마음과 어두운 심리을 감추고자 하였다. 재상 영호도(令狐)가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십년간 정무를 보았는데, 황상은 나를 아주 신임했다. 다만 연영전에서 업무를 아뢸 때, 한번도 등에 식은 땀이 흐르지 않은 때가 없었다." 재상마저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일개 배우야.

 

마찬가지로 당선종이 미인을 많이 죽인 것은 절대로 그가 여색에 빠져 국사를 망칠까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미인의 선혈로 자신이 호색한다는 악명을 감추고자 했을 뿐이다. <신당서>에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는 바로 탐색황음한 자이다. 비약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하여 중년시기에 이미 더 이상 놀 수 없게 된다. "오호, 이때부터 당나라는 쇠약해진다." 이 소위 '명군'은 기실 3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호는 그렇게 길었지만, 그의 사후 당왕조의 수명은 그렇게도 짧았던 것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