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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중국인들은 왜 사년(蛇年)을 싫어하는가?

by 중은우시 2013. 2. 13.

글: 예방육(倪方六)

 

12지신가운데 사(蛇, 巳)는 아마도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동물인 것같다. 기실 이러한 뱀에 대한 혐오감정은 현대인들만의 것은 아니고, 진한(秦漢)이후 중국고대인들의 마음도 그러했다. 중국고대인들은 심지어 사년을 흉년(凶年)으로 보고, 뱀띠인 사람들은 명이 좋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상의 근원을 따져보면 결국 중국인들이 뱀을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초기에 "뱀을 숭상했다"(崇蛇), 그리고 뱀을 민족의 토템으로 삼았다. 1958년, 지금으로부터 약 5500년전의 감숙성 감곡현 서평유적지에서 채색도자기병이 발견되었다. 병의 복부에는 묵채로 그린 인수사신(人首蛇身)의 신괴(神怪)가 그려져 있었다. 그후 감숙 무산, 정서, 임조(臨洮)등 여러 지방에서 속속 이런 인수사신도를 담은 문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문물의 출토는 상고시기의 중국인들이 뱀을 상당히 숭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화여성의 인문시조인 여와(女娲)는 사신인면(蛇身人面)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당시 뱀을 숭배하던 풍속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만일 그 당시 사람들이 뱀을 싫어했다면, 조상을 이런 기괴한 모양으로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뱀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고고학적 출토문물에서 고대인들의 뱀에 대한 태도변화를 볼 수 있다. 이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용(龍)"의 지위가 크게 올라간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상고시대의 하(夏)왕조에서는 절대적으로 뱀을 숭배했다. 다만 "예약붕괴"의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문물중 뱀도형은 더 이상 사람들이 경외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볼 때 뱀에 대한 비존경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전국시대 문물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명확하다.

 

1982년에 발굴된 호북 마산1호초묘(楚墓)에서 출토된 사금수(絲錦繡)에는 "봉조식사(鳳鳥食蛇, 봉황새가 뱀을 잡아먹다)"의 문양이 나타난다; 1987년에 발굴된 태원 금승촌 진(晋)나라 조경묘(趙卿墓)에서 출토된 동기(銅器)에는 "조천사(鳥踐蛇, 새가 뱀을 짓밟다)"의 문양이 나타난다; 1992년에 발굴된 산서 후마의 진(晋)나라때 주동(鑄銅)유적지에서 "수천사(獸踐蛇, 짐승이 뱀을 짓밟다)"의 문양이 있는 도범(陶范)이 발견되었다. 일찌기 민국시대에 초왕묘로 알려져있던 안휘 수현의 이삼고퇴(李三孤堆)에서 "을착사(鷹捉蛇, 매가 뱀을 붙잡다)" 동기가 발견된다; 입을 벌린 흉맹한 늙은 매가 다리에 발버둥치는 뱀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뱀이 더 이상 숭배대상이 아니게 된 현상을 학술계에서는 "천사(踐蛇)"라고 칭한다. 즉 뱀을 짓밟는다는 뜻이다.

 

"천사"는 고대 중국인들의 상대방을 정복하고, 사악한 것과 싸워서 이긴다는 문화신호이다. 이는 뱀이 신단에서 내려왔다는 표지이다. "천사"현상의 출현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염사(厭蛇)"의 시작이다.

 

나중에, 약간 시대가 늦은 문물에서 "타사(打蛇, 뱀을 때리다)"와 "담사(啖蛇, 뱀을 씹어먹다)"의 도안도 나타난다. 1978년 강소 청강시(지금의 회안시) 성남향고장의 전국시대묘에서 출토된 동기의 그림에는 뱀을 때리는 동작이 그려져 있다. 타사자는 한손을 높이 들고, 한손으로 막 잡은 뱀 한마리를 잡고, 뱀을 향하여 치는 것이다; 사천의 한 동한시대 묘에는 "타사석용(打蛇石俑)"이 출토되었다. 용인은 한손에 삽(鏟)을 들고, 한손에 뱀을 들고 있다. 선진(先秦)이전 특히 하,상왕조때 중국고대인들은 뱀을 신령으로 취급했고, 절대로 뱀을 치지 않았고, 뱀을 잡아먹지 않았었다.

 

고대 중국에서 사람들이 뱀을 진정으로 싫어하기 시작한 것은 뱀과 길흉화복을 연계시켰을 때일 것이다. 이것은 12지신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뱀을 포함한 12마리 동물은 어느때부터 해를 표시하는데 쓰이기 시작했을까? 민속학자들은 정확한 시간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선진시대 <시경.소아>의 <거공(車攻)>편에는 "길일경오(吉日庚午), 기차아마(旣差我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후세인들이 말하는 "오마(午馬)"인지아닌지에 대하여 학술계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1975년 호북 운몽 호지진묘와 1986년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진묘에서 출토된 진간(秦簡) <일서>의 "십이수(十二獸)"가 발견되어, 생초문화(生肖文化, 띠문화)가 나타난 시기는 훨씬 더 앞당겨지게 되었다.

 

"십이수"는 나중의 "십이생초(십이지신)"과 아주 비슷하다. 생초가 해를 표시하는 것으로 쓰인 것은 선진시대부터는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널리 이용된 것은 아마도 한나라말기이전일 것이다. 동한의 왕충의 <논형>이라는 책에는 지금과 완전히 같은 십이생초를 기록하고 있다.

 

기괴한 것은 생초가 해를 표시하는 것으로 쓰인 후, 사람들은 매번 사년(蛇年)과 용년(龍年)이 될 때마다 수확이 좋지 않고, 재해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북송 조정(송인종)이 황제로 있을 때, 용사년에 재난이 많았고, 가뭄과 홍수가 있었다. 당시 시인인 소순흠은 <오월대한>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오월용사년(吳越龍蛇年), 대한천리적(大旱千里赤)" (오,월의 땅에서 용년 사년을 만나면 큰 가뭄이 나서 천리땅에 풀이 없었다.)

 

오월 일대는 원래 강남의 어미지향(魚米之鄕)이다. 이런 지방에 큰 가뭄이 나면 그해의 수확은 형편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전해지고 있다. "병호흘(丙好吃), 정난과(丁難過), 용사무량요애아(龍蛇無糧要挨餓)" 유사한 말이 호북일대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사년불수화(蛇年不收花), 용년광탑탑(龍年光塌塌)"

 

그래서 소순흠보다 한세대 늦은 소식은 <염과초연대증태수곽상>에서 이렇게 썼다: "석음우천별상산(昔飮雩泉別常山), 천한세재용사간(天寒歲在龍蛇間)"; 남송시인 육유도 마찬가지로 "사년은 좋지않다"는 말을 믿었다. <인일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비현나외사년지(非賢那畏蛇年至)? 다난각수인일음(多難却愁人日陰)"

 

사년에는 재난이 많아서 수확이 좋지 않았고, 기후가 순조롭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자연재해로 조성된 불행과 고난을 모조리 뱀에게 책임을 돌렸다. 나아가 뱀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과거 산명선생들의 눈에는 사년과 용년은 인류의 건강에도 위해를 끼쳤다. 명수(命數)에서 말하는 "세재용사(歲在龍蛇)"는 바로 이런 관념을 반영한다. <후한서.정현전>에 따르면, 이 말은 동한의 경학대가 정현(鄭玄)의 입에서 나왔고, 그 본인도 그 해에 죽는다.

 

실제로 이는 뱀과 용에게 모두 불공평하다. 기후로 말하자면, 변화는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 나쁜 기후가 출현하는 주기가 아마도 사년, 용년과 만났을 것이다. 민간에서 공인된 "우마년(牛馬年), 호종전(好種田)"이나 "양마년(羊馬年), 광수전(廣收田)"도 바로 우년, 마년, 양년이 좋은 해라는 말이다. 만일, 소, 말, 양이 뱀의 기년위치에 놓였더라면 아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