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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예쉔닝과 위정성: 태자당 대표인물의 관계

by 중은우시 2012. 11. 25.

 

글: 김정(金睛)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중 가장 연장자이면서 68세의 데드라인에 근접한 위정성(兪正聲)이 상임위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하여는 외부에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태자당인 위정성은 외부에서 알려진 것처럼 덩(鄧)가의 가신인 것 이외에, 그들 가족은 중국공산당 정계의 중요인물인 광동 예(葉)가와도 인척관계에 있다.

 

위정성은 800년동안 흥성하며 영웅호걸을 많이 배출한 위(兪)씨가족에서 태어났다. 위정성의 증조부는 유명진(兪明震)이다. 유명진의 막내고모의 딸이 바로 증국전(曾國荃)의 현손녀(玄孫女)이다. 그녀의 이름은 증헌식(曾憲植)이고, 그녀는 중공의 십대원수인 예젠잉(葉劍英)에게 시집을 간다. 그녀와 예젠잉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예신핑(葉新平)이다. 그가 바로 나중에 중국정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예센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위정성의 부친잉 위치웨이(兪啓威, 黃敬)도 예젠잉을 고모부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다. 예젠잉의 아들이며 같은 태자당에 속하는 예쉔핑은 위정성보다 배분이 하나 높다. 위정성도 예쉔닝을 고모부라고 불러야 한다.

 

1976년, 십대원수중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예젠잉을 정변을 책동하여 강청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인방"을 체포하고 최종적으로 덩샤오핑을 최고지도자의 지위로 올린다. 그후 삽십년간 광동예가는 나무도 크고 뿌리도 깊다. 군계 및 정계에 인맥이 아주 널리 퍼져있다.

 

일찌기 1978년 예젠잉은 북경에서 당납(唐納)을 만났을 때, 예쉔닝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원래 당납은 강청의 세번째 남자이다. 강청이 첫번째 남자는 비(費)씨로 대갓집 자제였고, 두번째 남자가 위치웨이로 위정성의 부친이다. 이를 보면 예젠잉이 예쉔핑을 아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쉔닝은 일찌기 중공태자당계층 및 북경의 권력귀족권내에서 공인된 "태자당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80년대, 최고위층의 가장 중요한 "태자당" 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각각 예젠잉의 아들 예쉔핑,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鄧樸方), 왕전의 아들 왕쥔(王軍). 천윈의 아들 천위안(陳元), 타오주의 딸 타오쓰량(陶斯亮),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楊紹明)이 대표적이었다.

 

여러 중국공산당의 고관자제들 중에서, 특별히 덩샤오핑, 천윈, 예젠잉, 왕전등 몇몇 원로의 가족후손들은 상호간에 갈등이 많았다. 예를 들어, 덩, 천 두 집안의 후손들은 서로 교류가 없다: 덩, 양 두 집안은 비록 한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지만, 1992년의 '양가장'사건때부터 서로 대립하였다. 그들간에 조정작용을 하고 내부응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예쉔닝이다.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예쉔닝은 신비한 통천인물이다. 민간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비교적 적다. 고위층의 군계와 상계에서는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인맥도 아주 넓다. 그는 1968년 베이징공업학원을 졸업하고, 일찌기 공군작전부 부부장, 전국정협위원을 지낸 바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예쉔닝은 아주 정명하고 지모가 풍부하다고 한다. 예가의 후손중 가장 뛰어나다. 그의 큰 형이자 광동성 성장을 지낸 예쉔핑(葉選平)도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에게 아이디어를 구했다고 한다. 예쉔핑은 그에게 일찌기 북경으로 올라가서 관직을 받는 것이 어떨지 물어보자 예쉔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관직이 오르고 싶으면 중앙으로 가고, 제대로 살고 싶으면 지방에 남아라." 그래서 예쉔핑은 중국정협 부주석이 된 후, 광동에 계속 머무르기를 고집했었다.

 

예쉔핑이 광동에서 예가의 "통일천하"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예젠잉의 후손들이 세력을 잃지 않고 갈수록 강화된 것은 많은 부분이 예쉔닝이 배후에서 활동한 덕분이다.

 

그외에 예쉔닝과 리뤼환(李瑞環)의 관계도 보통이 아니다. 두 사람은 자주 주말에 함께 마작을 하거나 교외에서 낚시를 한다. "6.4"이후, 리뤼환이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후, 아주 골치아프다고 느낀다. 예쉔닝은 핵심을 찔러서 그에게 두 글자로 요약해서 말해준다: "소황(掃黃)". 리뤼환은 바로 알아듣고 조치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인심을 얻는데 성공한다. 지식인들은 '소황'을 통하여 좌파들의 이데올로기측면에서 자유화에 대한 비판을 완화시키준데 감사했다.

 

덩푸팡은 덩샤오핑이 아주 아끼던 아들이다. 덩샤오핑은 그는 사고가 신축성이 있다고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덩푸팡은 예쉔닝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나와 쉔닝을 비교하면, 하나는 하늘 위에 있고, 하나는 땅 속에 있다."

 

사실상 덩푸팡의 주요활동은 지식계와 최고위층이다. 그러나 예쉔닝의 활동범위는 훨씬 더 넓다. 일찌기 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예쉔닝은 중공의 고급장군으로서, 자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고, 여러번 타이완도 다녀왔다고.

 

"총정연락부"는 중국공산당의 또 하나의 특무기관이다. 총정연락부의 아래에는 3개이 국이 있는데, 1국, 2국 및 3국이다. 총정연락부는 주로 타이완정보를 책임진다. 덩샤오핑의 딸인 덩롱(鄧榕)은 바로 총정연락부의 연구원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의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1984년, 예쉔닝은 해방군총정치부 대외연락부 부부장에 임명된다. 소장의 계급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카이리(凱利)회사의 총재였다. 기실 그는 중국공산당의 3대정보계통중 하나를 장악한 사람이었다.

 

예쉔닝은 연락부 부주임, 주임의 신분에 카이리회사의 총재직을 겸했다. 자신의 독특한 인맥관계를 이용하여 "카이리"의 지명도를 높인다. 돈도 적지 않게 끌어모았다. 이 예산외자금원을 충분히 확보했으므로, 예쉔닝은 이를 연락부의 정보수집업무에 쏟아부었다. 일시에 총정치부의 정보업무는 총참모부를 압도하게 된다.

 

예쉔닝은 총정연락부에 있는 기간동안 한 가지 큰 일을 한다. 이는 3천의 태자당구성원을 해외유학보낸 것이다. 이는 태자당의 인재확보책이었다. 이 행동은 1990년 예쉔닝이 총정 연락부를 장악한 때로부터 차례차례 진행된다. 그가 1997년 퇴역할 때까지 중단없이 지속되었다. 지속기간이 길고 관련된 국가가 많으며, 파견인원수가 많은 것이 사상유례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중공의 군사정보사상 최대규모의 '잠복사건'이다.

 

예쉔닝은 당시 집권했던 장쩌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근정묘홍(根正苗紅)의 태자당이 당시 정계에 너무 일찍 머리를 드러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자당의 주력군을 해외로 보내어 교육훈련시켜서 한편으로 능력을 길러 자신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내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실력을 보존해야 했다. 너무 일찍 드러나면 일시적으로 흥할 수 있지만, 미래의 '태자당시대'를 가져오는데는 불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초 총정연락부의 안배대로 조용하게 생활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국내에 돌아오더라도 정계와는 거리를 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주'인 예쉔닝의 지시와 소환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 10월, 중공17대 5중전회가 개최된다. 전회는 시진핑이 중앙군위 부주석을 넘겨받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하여 시진핑은 제18대 총서지후임자의 지위를 확보했다. 시진핑이 승계하는 것은 '태자당'이 전면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황금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예쉔닝은 시진핑을 아주 잘 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집권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에 수하의 3천인재를 모조리 시진핑에게 넘겨주어 시진핑이 쓰도록 하였다. 이들은 국내에 있던 해외에 있든 모두 시진핑이 가장 믿을만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각종 형식으로, 미래의 시진핑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충칭에서 왕리쥔사건이 일어난 후, 전 중공원수 예젠잉의 아들이며, 전 해방군총정치부연락부부장이었던 예쉔닝은 앞장서서 당중앙에 서신을 보내어 보시라이의 사직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외부의 분석에 따르면, 제18대에 상임위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져 있던 왕양이 배제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바로 예가때문이라고 한다. 광저우는 예가의 천하이다. 그러나 왕양이 광동으로 간 후, 한 일부 조치에 대하여 예가는 불만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예가는 왕양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비록 능력도 있고, 일도 잘하지만,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으므로, 중공의 핵심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위가와의 친척관계로 예가가 위정성이 상임위원에 들어가도록 힘을 쓴 것은 당연하다고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