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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죽림칠현 혜강(嵇康)의 죽음

by 중은우시 2013. 6. 13.

글: 사비상(史飛翔)

 

262년, 하남 낙양의 동시(東市). 시간은 혈색잔양(血色殘陽, 피같은 색깔의 지는 태양)의 오후였다. 수거(囚車)에서 걸어내려온 혜강은 형집행인들에게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전에 옥중에서 고난과 혹형을 받아서, 이때의 혜강은 이미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태연자약한 모습이었고, 두려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고금이래로 문인지사들 중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담담하고 가장 시원스러웠던 사람이라면 혜강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음이 도래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망나니의 큰 칼이 이미 목에 다가오는 상황하에서,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언제 목이 땅바닥에 떨어지는지 기대하고 있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상황하에서, 곧 목과 몸이 분리될 혜강은 사방을 둘러본 후 돌연 큰 소리로 말한다: "금(琴)을 가져오라!"

넓다랗고 시끄러운 형장은 순식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것같았다.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고, 조용해서 바늘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목을 빼고, 발꿈치를 들고,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길을 혜강에게 집중한다. 이때의 혜강은 담담하고 조용하며 입가에는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석양아래에서 금의 앞으로 걸어가기 전에, 소매자락을 휘두르고, 굳어져 있던 손목을 주물렀다. 그후, 석지좌하(席地坐下, 땽에 자리를 깔고 앉다)한다. 손가락을 튕기자 금에서 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가볍고 느리게 탔으며, 줄이 내는 소리는 유정(幽靜)했고, 담원소락(淡遠疎洛)했다; 점차 소리는 침울하고, 비분하며, 억압적으로 바뀐다; 나중에는 박자가 빨라지고, 힘이 강해진다. 이어서 손가락이 거문고줄 위에서 날아다니며, 거문고소리가 웅장해진다. 마치 장병들이 창을 휘두르고 말이 달리며 풍운을 질타하는 것같았다. 그리고 호협이 칼과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같았다. 절반 정도 연주했을 때부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해강, 금, 생명. 이 순간에 이미 하나로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만큼 울렸을 대 돌연 '쨍"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지고 음악이 끝난다. 다시 보니 혜강은 미미 봉두난발에,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를 보니, 몸을 일으켜 앙천대소한다: <광릉산(廣陵散)>은 이제 실전되는구나.

 

칼이 내려쳐지자 목이 떨어진다. 이 중국역사상 걸출한 문학자, 사상가, 음악가이며 '죽림칠현'의 대표인물은 억울함을 품고 일생을 마친다. 향년 39세였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혜강은 죽어야 했던가? 그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얘기하자면 웃긴다. 혜강의 죽음은 기이한 하나의 "강간사건"과 관련된다. 이 사건을 서술하기 전에, 우리는 혜강의 신세내력을 간략히 알아보기로 하자.

 

혜강. 자는 숙야(叔夜). 초군(지금의 안휘성 숙현) 사람이다. 위문제 황초4년(223년)에 태어난다. 그의 조상은 원래 성이 해(奚)였다. 원래는 회혜(會嵇) 상우(上虞)(지금의 절강성 상우) 사람이다. 원수를 피해서 질(銍)로 옮겨간다. 질에는 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혜산(嵇山)"이다. 그들은 산옆에 안착한다. 그래서 산의 이름을 따서 성을 "혜"로 바꾸게 된다. 혜강의 부친인 혜소(嵇昭)는 일찌기 하급관리를 지낸다. 사회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다. 혜강이 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약7살때) 부친은 사망한다. 혜강은 모친과 형의 보살핌하에 성장한다. 혜장의 형은 혜희(嵇喜)이다. 자는 공목(公穆)이며 정치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 서주자사와 황족사무를 관장하는 종정등의 직을 지낸다.

 

혜강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선대의 전적에 능통했다. 그리고 글을 잘 쓰고, 언행거지가 우아했다. 용모도 당당하여 공인된 미남자였다. 혜강은 사람됨이 산담(散淡)하고 황노(黃老)를 좋아했다.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다. 개략 정시5년, 조림(曹林)은 자신의 딸 장락정주(조조의 외손녀)를 혜강에게 시집보낸다. 혜강은 조위종실과 혼인한 후, 조정에서 중산대부의 직위를 받는다. 그리하여 조정의 고문이 된다. 봉록은 600석이다. 혜강의 관운은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인생은 무상하고 세상사는 예측하기 어렵다. 혜강의 전도가 유망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조위정권은 차례차례 사마씨에게 잠식당하고 결국은 권력을 탈취당한다. 이때 혜강은 관료사회의 투쟁에 염증을 느껴,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산양(山陽)으로 이사간다. 거기서 피세은거(避世隱居)의 생활을 보낸다. 혜강이 산양에 은거한 기간에, 그와 교류했던 사람은 진류(陳留)의 원적(阮籍), 하내의 산도(山濤), 하남의 향수(向秀), 원적의 형 원함(阮咸), 낭야의 왕융(王戎), 퍠인(沛人) 유령(劉伶)이 있었다. 그들은 뜻이 맞았고, 서로 잘 사귀었다. 모두 담현논도(談玄論道)를 즐기고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그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다.

 

난세에 화를 피하는 것은 원래 많은 지식분자들의 입신지도이다. 관료사회에서 멀리 떨어지고, 명리를 담백하게 여기고,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세상에 들어갔을 때의 리스크를 피하는 것이다. 다만, 진정 정치투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식분자에 있어서, 많은 경우 네가 정치를 건드리지 않더라도, 정치는 너를 건드린다.

 

정원2년, 사마소가 대장군을 맡은 후, 권력을 공고히 하고 찬탈을 빨리 하기 위하여, 한편으로 조씨 일당을 잔혹하게 주살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심을 안정시키고 회유한다. 공명이록의 유횩과 강권정치의 압박하에, 적지 않은 인사들은 모조리 사마씨쪽으로 돌아선다. 그중에는 혜강의 좋은 친구이자 "죽림칠현"의 하나인 산도도 들어있다. 혜강이 죽림명사집단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지식인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다. 그리하여 사마씨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를 끌어들이려 한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산도로 하여금 나서게 한다. 산도는 즉시 산기시랑과 이부랑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이유로 혜강에게 이부랑의 자리를 주도록 추천한다. 누가 알았으랴. 혜강은 성격이 강직하였다. 산도의 추천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위산거원절교서>를 써서 산도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사마씨는 그 소식을 듣고 수치를 느껴 대노한다. 그리하여 혜강을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여안사건(呂安事件)"이 벌어진다.

 

여안과 여손(呂巽)은 모두 혜강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여손은 사마소에 의탁한다. 그는 동생 여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욕심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를 강간하고 자신이 가지려고 한다. 여안은 이를 알고난 후 대노한다. 그는 관청에 형을 고발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혜강을 찾아가서 상의한다. 혜강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분개한다. 그러나 이 일을 소송으로 몰고가면, 여씨집안의 명성에 손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여안에게 우선 참으라고 말한다. 그가 나서서 조정해주기 위해 여손을 찾는다. 여손은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으니 찔려서,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은 여안의 처를 욕보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로 여안을 해치지 않겠다고 보증한다. 혜강은 그의 약속을 받아낸 후, 좋은 말로 여안을 위로한다. 집안의 수치스러운 일을 밖에 떠드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이 일은 여기에서 끝내라고 권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여손은 암중으로 사마소에게 여안이 '불효'하다고 고발한다. 모친을 때렸다는 것으로 그를 치죄하도록 요구한다. 사마소는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을 표방했으므로, 불효는 '명교'에 반하는 큰 죄였다. 그래서 여안을 체포하고,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낸다. 혜강은 이 일을 듣고난 후, 아주 놀라고, 미안해 한다. 그는 원래 좋은 뜻에서 조정을 해준 것인데, 여손이 이렇게 비열한 자일 줄 몰랐던 것이다. 여안이 오히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나서서 여안의 모죄를 증명한다. 동시에 <여여장제절교서>를 써서 여손이 의리와 신의를 배신하여 형제를 해친 것을 통열하게 비난한다. 다만, 혜강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 이 절교서를 가지고 문제를 삼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종회(鍾會)이다.

 

종회는 위나라의 대부 종요(鍾繇,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신, 저명한 서예가, 해서를 창제함)의 차남이고, 청담(淸淡)을 좋아했으며 당시에 유명한 공자였다. 그는 사마씨집단에 의탁한 후, 사마씨 형제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자신의 위진 명사내에서의 지위와 영향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종회는 당시 문단의 영수인 혜강에게 잘보이고자 했다. 종회는 <사본론>이라는 책을 써서, 혜강을 찾아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혜강의 사람됨을 알기 때문에 겁을 먹고 감히 부탁하지는 못했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종회는 글을 쓴 다음 가슴에 품고서 몰래 혜강의 거처 문밖으로 가서 멀리서 글을 집어던져 넣고는 급히 도망간다. 종회는 원래 이렇게 생각했다. 혜강이 자신의 글을 읽은 후에 찬탄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혜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종회는 마침내 실망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회는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사마소의 심복이 된다. 그는 다시 한번 혜강을 방문한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몰래 간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사람을 데리고 갔다. 종회가 갔을 때, 혜강은 쇠를 다루고 있었다(혜강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쇠를 다루는 것이다. 일생동안 그러했다.) 그는 눈꺼풀 한번 깜빡이지 않고, 종회를 완전히 무시한다. 종회는 혜강이 자신을 무시하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떠난다. 이때 혜강이 말한다: "너는 무엇을 듣고 왔으며, 너는 무엇을 보고 가는가?" 종회는 혜강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들을 것을 듣고 왔고, 볼 것을 보고 갑니다." 말을 마치고는 떠난다. 종회는 계속 혜강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보냈지만, 매번 실망한다. 그래서 그는 혜강을 마음 속으로 미워하게 된다.

 

"여안사건"은 그에게 낙정하석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가 어찌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것인가. 그래서 스스로 완벽한 계책을 짰다고 생각하고 사마소에게 진언한다: "혜강은 와룡(臥龍)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무궁할 것입니다. 과거에 강태공, 공자도 모두 성현을 비방한 명인을 죽여서 사회기풍을 바로잡은 바 있습니다. 만일 마음을 약하게 먹고 손속을 느슨하게 봐준다면, 예교는 뒤집어질 것입니다." 와룡이라고 하자, 사마소는 즉시 촉국의 제갈량을 떠올린다; 쓸 수 없으면 골치거리가 된다. 혜강은 위나라에서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마씨와는 항상 대립했다. '와룡'을 죽여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종회의 말은 사마소의 뜻에 들어맞았다. 그래서 그는 건의를 받아들여, 혜강을 하옥시킨다. 혜강은 위로는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왕을 섬기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풍속을 해쳤다. 이제 혜강을 죽이지 않으면 왕도를 깨끗이 할 수가 없다.

 

혜강이 투옥된 후, 태학생 수천명이 그를 위하여 청원한다. 그리하여 호걸들은 혜강을 따라 감옥에 들어간다. 3천여명의 태학생이 연명으로 청원을 하여 혜강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뿐아니라, 그를 태학으로 불러서 스승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호걸들도 혜강을 따라 함께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것은 항의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결과는 혜강을 구해내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사마소에게 혜강을 죽일 결심을 굳혀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혜강은 262년 오후의 피비린내 나는 형장에 서게 된 것이다. 혜강은 명성을 천하에 떨쳤지만, 고립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죽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곡광릉절천하(一曲廣陵絶天下)

타철혜강수능상(打鐵嵇康誰能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