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조적(祖逖): 양진대호걸의 어쩔 수 없는 최후

중은우시 2013. 2. 12. 02:29

글: 유계흥(劉繼興)

 

중화영걸다호기(中華英傑多豪氣)

천지지간일조적(天地之間一祖逖)

 

"문계기무(聞鷄起舞)", "중류격즙(中流擊楫)"은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본 고사성어이다. 그러나, 이 두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조적의 사적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서진(西晋) 말년, 대족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여 호족의 횡포가 심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표면상의 번영으로는 이미 날로 심해져가는 사회위기를 덮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서진 혜제때(291-306), 여남왕 량(亮), 초왕 위(瑋), 조왕 륜(倫), 제왕 경(), 장사왕 예(乂), 성도왕 영(潁), 하간왕 옹(顒), 동해왕 월(越)등 8명의 제후왕간에 중앙최고권력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일련의 상호간의 살육과 전쟁이 벌어지며, 16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서진황족중 이 동란에 참가한 왕은 8명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 8명이 주요한 참가자였다. <진서>에는 이 팔왕을 하나의 열전으로 묶어서 썼기 때문에, 역사상으로 "팔왕의 난"이라고 칭하게 된다.  이 동란은 궁중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시작하여 전쟁으로까지 번지고 화가 사회에까지 미쳤으며 대규모의 파괴를 불러와서 서진의 통치위기를 가중시켰다. 이는 서진이 멸망한 중요한 요소가 되며, 이후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팔왕의 난"의 최종결말은 동해왕 사마월이 대권을 빼앗는다. 그는 혜제를 독살하고, 혜제의 또 다른 동생인 예장왕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올리니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연호는 영가(永嘉)로 고친다.

 

311년, 진회제와 순희(荀晞)는 사마월을 살해하고자 밀모한다. 그리고 사마월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사마월은 이해 3월에 군중에서 병사한다. 사마월의 군대가 사마월의 영구를 호송하여 동해봉국으로 돌아가갈 때, 흉노 석륵의 군대와 고현에서 전투했으나 대패하고 10만명이 모조리 몰살당한다. 서진의 마지막 병력이 소멸된 것이니, 더 이상 싸울 병사가 없었다.

 

금방 흉노대군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회제는 포로가 된다. 중원지역은 졸지에 혼란이 일어나는데 이는 역사에서 영가지화(永嘉之禍)라고 부른다. 북방의 인민들은 속속 남방으로 피난을 가고, 조적도 어쩔 수 없이 친족 수백가구와 함께 회사(淮泗, 지금의 강소성 서회지구). 그 동안 이들은 풍찬노숙하며 온갖 고생을 견딘다. 조적은 앞장서서 수레와 말을 노약자와 병자들에게 양보했고, 양식, 의복과 약품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아주 존경했고, 일치하여 피난대열의 "행주(行主)"로 추대한다.

 

남하과정에서, 조적은 백성들의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다. 강남으로 남하한 후, 조적은 여러번에 걸쳐 강남의 실제지도자인 사마예(司馬睿)에게 북벌의 건의한다. 구석에 쳐박혀 안주하고 있던 사마예는 조적의 건의에 그저 시늉만 낸다. 그를 서주자사로 임명하고, 경구(지금의 강소성 진강)로 옮겨간다. 당시의 서주는 이미 흉노인의 수중에 떨어졌으므로, 조적이 받은 서주자사는 그저 허직(虛職)이었다. 기실 부하 하나없는 사령관인 셈이다.

 

그러나, 강인한 조적은 계속 사마예에게 글을 올려 전쟁을 하자고 건의한다. 조적의 요구는 인민의 바램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예가 선택할 방안은 아니었다. 사마예는 건업으로 이전한 후, 강남의 소조정을 운영하는데 힘을 다 쏟는다. 그와 그를 추대한 문벌사족은 모두 북벌에 흥미가 없었다. 비록 국토를 점령당했지만, 그저 한쪽 구석에서 만족했다. 만일 그들의 북벌이 성공하면, 황제의 자리는 누구에게 돌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조적의 대의늠름한 요구에 그는 북벌을 저지했다는 악명을 남기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일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천하인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사마예는 조적을 분위장군. 예주자사, 전봉도독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북벌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겨우 1천명분의 양식과 3천의 베를 내렸고, 갑옷투구는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병졸도 추가로 보내주지 않았다. 스스로 군인을 모집하여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졸을 한명도 보내주지 않고, 스스로 모집하고 칼과 창도 스스로 만들어 쓰라고 한다.

 

그래서, 조적은 물건들과 그를 따라 남하하기를 원하는 7백명과함께 북상한다.

 

조적이 부대를 이끌고 강북의 회음에 도착한 후,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병기를 주조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유민을 모집하게 한다. 조적이 직면한 적수는 기(冀), 예(豫) 일대에 할거하고 병력10여만을 거느린 갈족(族)의 두령이자 하남지구에서 세력을 보존하고 있는 석륵(石勒)이었다. 하남지구에는 이외에 많은 수의 한족지주의 호강무장이 있다. 이들을 소위 "오주(塢主)"라고 부른다.  이들 오주들은 오보(嗚堡)를 쌓고 스스로 자사(刺史), 태수(太守)라 칭하며 한 지방을 통치하고, 진(晋)과 조(趙)의 사이를 오갔으므로 상황이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북벌군의 맹우가 될 수도 있고, 북벌군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형세는 조적의 북벌로는 험난하고 장애가 많은 길이 되도록 만들었다.

 

얼마후, 조적이 새로 만든 북벌부대는 2천여명에 달한다. 그 후, 조적은 부대를 이끌고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 기현)에 주둔한다. 당시 하남지역은 흉노족의 한(漢)은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이고, 기실 각 지역의 오주가 스스로 독립적인 무장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하여 흉노와 싸우지 않고, 자주 서로를 공격하고, 자주 한(漢)과 진(晋)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어느쪽이든 세력이 커지면 그쪽에 붙어버리는 것이다.

 

조적은 이런 상황을 알고난 후, 사람을 보내어 이런 오주들과 협상한다. 공동으로 석륵에 방어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일부 소규모 오주들은 석륵의 위세에 눌려, 부득이 자제를 양국(襄國)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적은 그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이들 소규모 오주들이 석륵도 따르면서, 자신에게도 복종하는 것을 그냥 놔두었다. 이들 오주는 조적에 아주 감사했다. 석륵군의 무슨 군사행동이 있으면 모두 사전에 조적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러므로 조적의 부대는 자주 승리를 거두었고, 명성은 갈수록 높아갔다.

 

석륵의 통치범위내에 많은 한인장수들도 속속 조적에 귀순한다. 북방에 남아서 여전히 진나라황실에 충성하던 장수들인 이구(李矩), 곽묵(郭默), 상관사(上官巳), 조고(趙固)등의 사람들도 조적의 지휘를 받아 공동으로 석륵을 치겠다고 한다. 조적의 명성은 이렇게 하여 크게 떨쳐진다. 그후 한동안 황하를 건너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조적은 군기를 바로잡고, 근검절약을 내세우며, 재물을 모으지 않고, 농잠을 권장하고 생산을 발전시켜 백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는다.

 

조적 자신은 생활이 검소하고 개인재산을 축재하지 않았다. 그의 자제와 전사들도 같이 밭을 갈고, 땔감을 해왔다. 그는 또한 유골을 모아서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하남지역의 인민군중으로부터도 옹호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한번은, 조적이 주연을 베풀어 현지의 주민들을 초대했는데, 일부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들은 늙었다. 그런데 다시 부모를 얻었으니,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행재유려면부로(幸哉遺黎免俘虜)

삼진기랑우자부(三辰旣朗遇慈父)

현주망로감호포(玄酒忘勞甘瓠脯)

하이영은가차무(何以詠恩歌且舞)

 

석륵은 감히 조적과 싸우지 못했다. 그래서 석륵은 사람을 보내어 조적의 조상묘를 잘 수선해주었다. 동시에 사신을 조적에 파견하여 호시(互市)를 열자고 한다. 조적이 비록 직접적으로 이를 승락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거절도 하지 않았다. 쌍방간의 통상무역에 대하여 묵인해준 것이다. 이 조치는 예주의 세수가 전부(田賦)의 10배나 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청호시(聽互市), 수리십배(收利十培), 어시공사풍섬(於是公私豊贍), 사마일자(士馬日滋)". 이렇게 공사가 모두 풍성하고 병사와 말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때 흉노족 유요(劉耀)는 갈족 석륵과 서로 공격하고 있어, 진나라에 아주 유리한 형국이었다. 그러나 동진의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난다. 조적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도독 대연상(戴淵相)을 파견하여 견제한다. 그는 조정내의 명쟁암투로 국사가 날로 엉망이 되는 것을 보면서 비분 속에서 생을 마친다. 321년, 조적은 옹구에서 병사하니, 향년 56세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중원의 백성들은 조적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부모가 사망한 것처럼 비통해 했다고 한다. 많은 지방의 민중은 그를 위하여 사당을 만들어, 이 북벌영웅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송나라사람인 호증(胡曾)은 이런 시를 지은 바 있다.

 

책마행행도예주(策馬行行到豫州) 말을 달려 예주에 와보니

조생적막수공류(祖生寂寞水空流) 조적의 흔적은 적막하고 물만 흐른다

당시갱유삼년수(當時更有三年壽) 당시에 삼년만 더 살았더라면

석륵심위계하수(石勒尋爲階下囚) 석륵은 아마도 포로로 잡힌 죄수가 되었을 것이다.

 

1965년 12월 24일, 모택동은 73세 생일을 맞이하기 이틀 전에, 항주에서 남창으로 간다. 일찍 이 곳에서 "격즙"한 조적을 떠올리고는 <칠율.홍도>를 쓴다

 

도득홍도우일년(到得洪都又一年)

조생격즙지금전(祖生擊楫至今傳)

문계구청남천우(聞鷄久聽南天雨)

입마증휘북지편(立馬曾揮北地鞭)

빈설비래성폐료(鬢雪飛來成廢料)

채운장재유신천(彩雲長在有新天)

연년후랑추전랑(年年後浪推前浪)

강초강화처처선(江草江花處處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