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한간(漢奸) 진공박(陳公博)의 생과 사

중은우시 2013. 9. 14. 00:54

글: 유전(劉典)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부총재, 국민참정회의장 왕정위(汪正衛)는 공개적으로 일본과 타협했고, 1940년 3월 남경에 별도로 국민정부를 만들어, "행정원장"과 "국부주석(國府主席)"을 겸임한다. 왕정위 정부의 2인자로서 진공박의 인생경력은 복잡하여 탄식하게 만든다.

 

1945년 8월 25일, 하늘이 막 밝아올 때, MC형 운송기 한 대가 새벽에 남경의 명고궁공항에서 출항한다. 비행기는 출항한 후, 계속 동쪽으로 몰아갔다. 비행기에 탄 사람은 진공박과 그의 처 이여장(李勵莊), 비서 막국강(莫國康), 그리고 안휘성 성장 임백생(林柏生), 실업부 부장 진군혜(陳君慧), 행정원 비서장 주륭상(周隆庠)등 모두 7명이었다. 진공박은 비행기내에 임시로 놓여진 등없는 나무의자에 앉아서 두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한 듯했다.

 

항일전쟁은 일본군국주의의 실패로 끝난다. 국민정부 대리주석인 진공박은 법망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비밀리에 일본으로 도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계획은 일본정부의 비준을 받았다.

 

세상에 새나가지 않는 벽은 없다. 진공박이 일본으로 도주할 것이라는 소식은 국내의 매체보도를 통하여 알려지고 여론이 들끓었다. 각 매체에서는 속속 글을 실어서, 일본정부에 진공박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중국정부도 이 기회에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생각지도 못하게,일본정부는 "거짓죽음"의 수완을 쓴다. 8월 29일 저녁, 일본 동맹사는 돌연 뉴스를 하나 내보낸다. 진공박이 8월 28일 교토(京都)에서 자살을 기도하였고, 의원에서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살려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은 로이터를 통하여 전파되었고, 금방 중국내외의 각 신문에 실렸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가? 국내의 민중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국내외 매체는 속속 이 소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9월 2일, 일본정부는 무조건항복에 정식 서명한다. 9월 3일, 국민당 중앙통신사는 진공박과 비서 일행 7명이 일본외교부 및 군사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이 투항한지 6일후, 국민당 육군총사령관 하응흠은 장개석의 명을 받아, 일본침화군 총사령부에 비망록을 보낸다.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에게 일본정부에 진공박을 체포하여 남경으로 압송하라고 전하게 한다. 패전국인 일본은 자신의 본국전범들조차 보호할 수 없게 되니 진공박은 더 말할 것도 없게 된다. 일본정부는 10월 3일까지 시간을 끌다가 진공박등 한간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압송해 돌려보낸다.

 

귀국후의 최후에 대하여 진공박은 마음 속으로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일찌기 처인 이여장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 바 있다: "복이지 화가 아니다. 화라면 파힐 수 없다. 이번에 너는 나를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이여장은 이 말을 듣고 대성통곡한다: "일본정부는 말을 지키지 않는다. 당초에 비밀을 엄격히 지켜주기로 약속했지 않느냐. 우리의 생명안전을 보장했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 다시 우리를 내놓겠다는 것이냐."

 

이렇게 하여, 진공박은 일본에서 전전긍긍하며 1개월 8일을 지낸 후, 남경으로 압송되고, 즉시 체포되어 영해로 23호 군통국임시간수소에 갇힌다. 이때부터 그의 죄수생활이 시작된다.

 

1946년 1월, 진공박, 매사평, 임백생, 이성오등은 남경 영해로 52호의 옛날 서양식건물 2층방에 갇혀 있었고, 진벽군, 막국강(진공박의 여비서), 진순정(저민의의 처) 및 진공박의 처 이여장은 아래층의 방에 갇혀 있었다. 문앞에는 보초가 지키고 있었고, 문안에는 일반 주택같았으며, 여건은 괜찮은 편이었다. 1946년 3월초, 진공박과 진벽군, 저민의등 3명은 소주 강소고등법원간수소로 압송되고, 사법부서의 정식재판에 회부된다.

 

이 기간동안, 진공박은 노력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매일 열심히 붓을 놀려, 이만여자의 <치장선생서(致蔣先生書)>를 쓴다. 이 서신에서 진공박은 자신이 예전에 장씨와 많은 심조불선(心照不宣)의 묵계가 있었고, 피차간에 관직에서 어려웠던 시절을 겪었으며, 일찌기 '혁명'을 하던 초기의 우의를 잊지 말자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언어는 간절하고 감정은 진지했다.

 

<치장선생서>는 남경에 있는 동안, 진공박이 이미 다 써놓았다. 소주로 압송되어 간 후 다시 이틀여의 시간을 들여서 계속 수정했다. 그후에 간수소의 인원에게 부탁하여 부치게 했다. 그는 장개석이 그에 대하여 가볍게 처리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며칠 전에 장개석이 남경 노호교 감옥에서 나온 한간 주불해를 접견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사정이 좋아질 여지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이전의 교분으로 장개석에게 부탁하면 장개석이 그를 용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 국내에서는 그를 '2호한간'으로 부르며 그를 욕하고 있었고, 주변이 사람들도 모두 그와는 선을 긋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은 모인봉이 읽어주는 진공박의 서신을 익은 후,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중에 그가 진공박과 함께 일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지고 놀았던 여러가지 '기관'을 얘기하자, 얼굴색이 점점 변해갔다.

 

진공박은 자신이 보낸 서신이 바닷속에 빠진 듯 아무런 소식이 없자, 여러해 동안의 관료사회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말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최후를 잘 알았다. 진공박은 오히려 진정한 듯이 보였다. 옥중에서 매일 30분간 산보흘 하게 했다. 그 시간이 되면, 진공방은 천천히 마당을 걸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했다. 어떤 때는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시를 읊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기운이 빠져있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태연자약해 보였다.

 

남경에서 소주까지, 진공백은 매일 여가가 생기면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이 일기는 아직도 안휘성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일기에는 옥중에서 진공박의 마음의 역정을 기록했고, 인생의 느낌을 모조리 말했다.

 

1946년 3월 2일부터 조사가 시작된 후, 3월 8일, 소주고등법원 수석검찰관 한도(韓燾)는 진공박에 대하여 기소하고, 기소장의 원문은 아주 긴데, 진공박과 왕정위등이 친일정부를 조직한 일련의 죄행을 나열했다.

 

1946년 4월 6일 오후 2시, 법정이 개정되어 진공박을 공개재판한다. 이날, 진공박은 짙은 회색의 자켓과 회색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흑니선형모(黑呢船形帽)를 쓰고, 흑피혜(黑皮鞋)를 신었다. 그는 손에 두 권의 기록을 들고,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연신 기운을 차려, 진정한 듯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법정에서 지정한 변호사는 고용(高溶)이다. 법정에는 모두 5명이 앉았다. 그중 3명은 법의를 입은 재판관과 1명의 검찰관, 그리고 1명의 서기관이다. 정중앙에 앉은 사람은 재판장 손홍림(孫鴻霖)이다. 금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왼쪽에는 정장(庭長) 석미유(石美瑜)로 군복을 입고 있었다. 도 다른 금찰관은 한연이고, 서기관은 채일정이다. 추사 진가서가 차례로 자리에 앉는다.

 

재판장 손홍림이 선언한다: "진공박 한간 사건의 공개심리를 시작한다." 이어서 진공박의 연령, 적관을 묻는다. 진공박은 대답한다: "현재 나이 55세, 광동 남해인, 광서33년 국민당에 가입."

 

수석검찰관이 기소장을 읽는다. 1945년 12월 6일 국민정부가 공표한 <징치한간조례>에 따라, 진공박이 행위는 이미 당해 조례의 제2조 제1항, 제3항, 제4항에 저촉되니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징치한간조례>에 열거된 12항의 한간행위에 대하여는 모두 사형과 무기징역만 있었다. 엄하게 처리하라는 것은 사형시키라는 말이다.

 

진공박은 기소장을 듣고 난 후, 인정하지 않았다. 법관은 진공박에게 기소장에 이의가 있는지 물어본다. 진공박은 법관에게 그가 간수소에서 쓴 <나의 팔년의 회고>를 읽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재판장은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리하여 진공박은 서류를 열고, 낭독하기 시작한다.

 

이 자백서에는, 진공박이 많은 분량을 들여서 왕정위의 "화평이념"을 해석한다. 그의 행위는 화평항일이라는 것이다. "화평항일은 무장항일보다 어렵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행정의 자유와 통일을 쟁취하고, 군사적으로 군사의 독립을 쟁취하여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물자의 보존과 국가인민의 원기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검찰측이 내놓은 기소죄명의 증거는 제3호 <진공박언론집>, 친링정부 대리주석대형위임장등 물건이 있었고, 유성기에 "일본황군을 환영한다"는 녹음이 있었다. 진공박은 이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이어서, 지정한 변호사 고용이 진공박을 위하여 변호한다. 그는 민중의 '화평운동'에 대한 비난은 편면적인 것이고, 사회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평이론'의 완충작용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화평정부가 없었다면 인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피고인 진공박은 15,6세부터 혁명사업에 종사하여 시종 국가를 위하여 노력해왔고, 그의 인생경력을 보면 모두 애국적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의 변호가 끝난 후, 법정은 저녁 8시에 끝난다. 재판장 손홍림은 선언한다: "본 사건은 이번 달 12일 오후 4시에 개정하여 판결한다."

 

1946년 4월 12일 오후 4시, 강소성 고등법원은 재차 개정하여, 재판장 손홍림이 판결문을 읽는다: "진공박은 적국과 통모하여, 나라에 반항을 도모하였으니, 사형에 처한다. 공민권리를 종신박탈하고, 모든 재산은 가족의 필수적인 생활비를 제외하고 몰수한다."

 

비록 일찌기 장개석에 보낸 서신에 대한 회답이 없자, 진공박은 일찌감치 자신에게 흉다길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있었다. 누가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겠는가?

 

1946년 6월 3일 오후 6시 30분, 법원원장은 옥장에게 신속히 임시법정을 안배하고, 형장, 경비를 설치하라고 통지한다. 진공박은 형장으로 가기 전에 붓을 들어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장개석에 서신을 쓴다. 서신을 절반가량 쓰다가 진공박은 돌연 쓰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역사에는 진공박이 장개석에게 보내는 미완성 서신만 남게 된다.

 

개략 8시반경, 진공박은 감옥에 설치된 임시법정으로 끌려간다. 법권이 진공박의 성명, 연령, 관적등을 물은 후, 곧이어 사형집행문을 낭독한다.

 

"최고법원은 특종형사판결35년도경특복제1229호....징치한간조례 제2조 제1항 제1호에 따라.....사형에 처하고, 공민권리를 종신박탈하며....

 

형장에 걸어들어간 진공박은 행형자와 악수하며 감사인사를 한다. 행형시 법경이 총을 발사하고, 총알은 후뇌로 들어가서 우관골로 나온다. 진공박은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검시원 왕춘영이 검시한 후, 목판으로 태평간으로 옮기고 그의 집안사람 유아침에게 통지한다. 민국정계를 질타하던 효웅이 이렇게 인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