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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대립(戴笠)과 진의(陳儀)는 어떻게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었나?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녕녕(寧寧)

 

대립이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군통(軍統)의 두목, 중국의 히믈러,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며, 여자들을 좋아했다는 것 등이다.

 

대립의 위하력은 그의 사람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는데서 나온다. 군통은 중국의 비밀경찰이다. 1946년 미국 군사정보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대립은 18만명의 사복정보요원이 있었다. 그중 4만명은 하루종일 그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외에 7만의 무장유격대, 2만의 별동대, 1.5만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충의구국군'과 4만에 이르는 조직적인 해적이 있었다. 합계 32.5만명이 대립을 위하여 일했다.

 

중통(中統)과 군통은 마찬가지로 장개석의 오른팔 왼팔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들은 형제와 같다. 그러나 대립은 중통을 중공의 바로 다음가는 '적'으로 규정했다.

 

제2차 국공합작후, 대립은 장개석의 '방공(防共)', '용공(溶共)', '한공(限共)', "반공(反共)"의 방침을 잘 이해했다. 그러나, 진립부(陳立夫)와 중통의 두목인 서은(徐恩)은 반공에 대하여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개석 위원장에게 보고되는 중공의 정보는 중통의 수량과 품질에서 모두 군통에 미치지 못하였다. 갑종회의(甲種會議)때, 장개석은 중국공산당의 어떤 상황을 알고 싶어했지만, 서은은 자주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대립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았고, 물흐르듯이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반공활동은 대립에 의존하게 되고, 지위도 점차 올라가게 된다.

 

장개석의 신임을 받은 후, 대립의 지위는 주식이 상승곡선을 긋듯이 올라간다. 그는 원래 군통국의 국장이었다. 겸직하고 있는 지위중에서 비교적 높은 것이라고는 재정부 집사서(緝査署)의 서장 정도였다. 그러나 장개석에게 신임을 받게 되면서, 국민당집단내에서 위로는 황친국척에서 아래로는 전구사령관, 성부주석까지 모두 대립에게는 예양삼푼(禮讓三分)하게 된다. 전 주영대사인 곽태기(郭泰祺)는 귀국하여 외교부방을 맡을 때, 대립은 업무상의 필요로 신임 외교부장을 식사에 초청했다. 곽태기는 유럽에 오랫동안 머물다보니 국내사정에 어두웠다. 더더구나 대립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그래서 비서에게 초청장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한다. 비서인 이철쟁(李鐵錚)은 초청장을 한번 훑어보고는 대립의 이름으로 된 것을 보고는 곽부장에게 다시 보고한다: "곽부장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히틀러 수하의 히믈러 같은 사람입니다." 곽부장은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초청장을 다시 찾는다: "그렇다면, 내가 가야지!' 

 

항전초기, 봉강대리, 복건성 주석인 진의는 대립과 깊은 원한을 맺고, 원수지간이 된다.

1934년, 장개석은 진의를 복건성으로 보내어 지방을 맡게 한다. 진의는 일본유학을 한 적이 있는 지일파이다. 장개석은 진의의 장점을 살려 일본의 군정요인들과 '친선외교'를 하게 하였다.

진의는 절강 사람이다. 웅후한 개인세력은 없고, 외성인의 신분이다보니, 복건에서 뭔가 활동을 하려면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복건에 부임한 후, 그는 대립에 군통에서 골간을 보내어 복건에서의 일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한다.

대립은 절강인이고 진의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래서 지연관계로 두 사람의 교분은 괜찮은 편이었다. 게다가 장개석이 진의를 복건성에 보내면서 그가 일본과 지나치게 '친선'우호적이 될까봐 우려했다. 그래서 대립에게 복건에 신경을 많이 쓸 것을 주문했었다. 진의의 요청은 대립이 바라던 바였다.

얼마후 대립의 조치와 진의의 협조하에, 하문시 경찰국장, 북주시 경찰국장 특무조장, 복건성 경관훈련소 소장등 경찰계의 요직은 개립의 군통 사람들로 채워진다. 복건성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권력이 큰 복건성 보안처 첩보고(諜報股) 고장의 자리는 대립의 심복인 장초(張超)가 맡는다. 장초의 또 다른 직무는 군통 복건참 참장이었다.

 

장초가 복건으로 온 후, 자신의 임무범위내의 일을 처리하는 동시에, 군대를 만든다. 그는 복청, 평담의 두 곳에 1000여명의 해적을 개편한 수경중대를 만든다. 이렇게 크게 움직이니 진의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장초는 부임한 후 그를 위해 적지 않은 공로도 세웠고, 대립과의 관계도 있어, 진의는 장초의 북건수경 창설등 행위에 대하여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다.

권력은 양날의 칼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말은 정말 틀리지 않았다.

장초는 원래 좋은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과 총이 쥐어지자 교만하고 흉악해진다. 더더구나 대립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그는 연속으로 진의에게 참의, 자의, 현장등 20여명을 추천한다. 진의도 그의 체면을 봐서 모두 응락한다.

그러나 장초는 득촌진척(得寸進尺)했다. 계속하여 진의에게 자신의 사람을 심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되자 진의는 더 이상 그 부담을 질 수가 없어, 단연코 거절하게 된다. 장초는 진의가 자신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진의를 찾아가서 소란을 부린다. 이렇게 하다보니 진의와 장초는 서로 보지 않는 관계로 된다.

 

항전이 발발한 후, 진의와 장초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1937년 10월, 복건에서는 2건의 중대한 흉악사건이 벌어진다. 진의와 관계가 좋던 복건성립의원 원장, 일본유학박사인 황병정(黃丙丁)이 피살되고, 진의와 관계가 밀접한 복건전기공사 경리 유준업(劉駿業)과 업무경리 유숭륜(劉崇倫)이 동시에 실종된다. 사건발발후, 진의는 각방의 압력하에 군경에 기한을 정해주고 사건을 해결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흉악사건은 미결로 남는다.

복건의 모든 경찰력을 동원했는데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진의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 두 개의 사건은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그는 군통, 중통, 헌병계통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비밀리에 조사를 한다. 결과는 그에게 의외이면서도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두 사건의 주모자는 장초였던 것이다. 진의는 장초의 행위임을 알았지만, 장초는 "한간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진행한 것이었으므로, 진의도 잠시 장초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장초는, 자신이 진의의 사람을 건드렸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더욱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진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진의가 복건성주석에까지 오른 것은 그냥 오른 것이 아니다. 장초를 이렇게 함부로 날뛰게 놔두면 그가 이후에 어떻게 관료사회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는 손을 썼다.

 

첫째 초식, 분권. 

 

진의는 복건 '수정(綏靖)'공서하에 새로운 권력기구인 정보처를 신설한다. 이 처는 복건 전체 성의 경찰특무계통을 관할했다. 이렇게 하자, 군통, 중통, 헌병등은 정보처의 명령이 없으면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천진한 장초는 진의의 이 조치가 자신을 견제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이 정보처 처장은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런 기대를 품고 있을 때, 정보처장은 장초의 라이벌이자, 군통계의 경찰훈련소소장인 호국진(胡國振)에게 넘어간다. 임직을 선포하는 회의에서, 장초는 이빨을 갈았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소동을 벌일 뻔했다.

 

둘째 초식, 파면

 

진의는 장초가 출장을 간 틈을 타서, 비밀리에 장초와 갈등관계에 있는 보안처장, 군구군훈처장, 경비국장, 수경총장등을 불러모아 회의를 한다. 그는 장초의 치명적인 죄상을 열거한다: 장초는 특무계통이 무장을 건립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면서 군대를 조직했다.

 

금방 장초를 고발하는 고발서신이 산더미처럼 몰려들어온다. 대립은 할 수 없이 장초의 복건성 군통참 참장의 직위를 파면한다. 

장초가 파면된 후, 여전히 대립의 '비밀리에 군대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아 복건에서 활동한다. 1938년초, 장초는 국민당 정규군의 중용되지 못하는 장교와 민군 수령들을 데리고 한구 군통국으로 가서 대립을 만난다. 대립은 그를 크게 칭찬한다.

 

대립의 '상방보검'을 가지고, 장초는 복건의 연해로 돌아가서, '동남유격간부훈련반'을 만든다. 그리고 당당하게 군대를 건설한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장초는 진의에게 군비를 요구한다. 진의에게는 그 돈을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 장초와 진의의 관계는 졸지에 날이 서게 된다.

대립은 장초가 책략도 없이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의가 자신의 군사계획을 지지해주지 않는 것도 미웠다. 그러나 대립이 진의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사태가 나쁜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초를 상해로 전근시켜 적점령지의 행동대장으로 앉힐 수 밖에 없었다.

진의에게 쫓겨나자, 장초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기회만 있으면 진의에게 한방 날리고자 노렸다. 장초는 원래의 조직에서의 무장을 이용하여 '한간 진의'를 타도하는 의거를 기획한다. 이를 위하여 복건에 주둔하는 49사단으로 가서 반란을 획책한다. 이뿐 아니라, 장초는 진의의 10대죄상을 열거하여 인신공격을 행한다. 특히 진의의 두번째 부인이 일본간첩이라는 것이다.

 

장초는 진의의 명예에 먹칠을 했을 뿐아니라, 그의 체념을 말이 아니게 만들었다. 만일 진의가 이런데도 참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1938년 6월, 진의는 장초를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장초가 체포되자마자 대립은 정보를 얻는다. 대립은 이번에 진의가 정말 화났다는 것을 알았다. 결과도 심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서 장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군통성참장이 성주석과 싸우다니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 이유는 대립이 장개석의 총애하는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내부에는 불문의 규정이 있었다. 어떤 군정경찰헌병부서도 비준을 받지 않으면 군통인원을 함부로 체포해서는 안된다.

대립은 자신의 부하는 끔찍하게 생각했다. 장초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먼저 절강향친회에 연락하여 진의에게 전보를 보내게 한다. 장초를 즉시 한구로 압송하여 처분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장개석도 찾아간다. 콧물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하자, 장개석은 시종실에서 진의에게 급전을 보내도록 한다.

장개석, 동향회, 대립으로부터의 3통의 밀전을 받은 후 진의는 생각한다. 만일 이번에 자신이 패하면,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는 전보는 쳐박아놓고, 먼저 손을 쓰기로 한다.

 

6월 18일, 진의는 "반란음모, 정부에 반항, 항전대계를 파괴"하였다는 이유로 장초를 총살한다. 진의가 장개석의 전보도 깔아뭉개고 장초를 죽였다는 것을 보면, 진의가 장초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인봉(毛人鳳)은 대립에게 계책을 얘기한다: 현재 군통의 세력으로는 진의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나 군통도 물러날 핑계거리가 있어야 한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는다고 하지 않은가.

대립은 한구 강북로 가산의 장개석 행원으로 달려가서 장초를 체포한 보안처장 섭성(葉成)을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교장께서 만일 학생(대립은 황포군관학교 6기임)의 요청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면 오늘 여기서 꿇어앉아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송미령이 곁에서 대립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장개석의 곁에서 한마디 거든다: "우농(대립의 자)의 부하는 바로 교장의 부하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임을 당한다면...아..."

한 명은 장개석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명은 장개석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이 움직여서 안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장개석이 친히 서명한 "보안처장 섭성을 무한으로 압송하여 처분을 기다려라. 중정(중정은 장개석의 호)"는 전보를 잡은 후, 진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원래 보안처장은 장초를 제거하는 것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첫째는 장초의 행위는 위법이지만, 진의가 장초를 죽이는 것도 위법이라는 것이다. 둘째 장초는 대립의 사람이고, 대립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며 절대로 그냥 끝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초 장초를 총살할 때, 진의는 섭성에게 가슴을 치면서 장담했다: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책임지겠다." 만일 섭성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이후 누가 자신을 위해서 일하려 할 것인가?

대립도 계산하고 있었다. 섭성이 무한으로 오기만 하면 그를 붙잡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진의가 이번에는 자신보다 한 수 높았다.

진의는 섭성이 한구에 가면 반드시 대립의 암산을 당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군정부장 하응흠에게 사람을 보내어 섭성을 데려가달라고 부탁하고, 장개석의 결의형제 겸 친구인 장군(張群)에게 섭성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장군과 진의의 관계는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군은 대립의 행위에도 불만이어서 바로 응락한다.

하응흠과 장군의 보호산이 있으니, 대립이 섭성을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군통인원들은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섭성이 하응흠의 전용차를 타고 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립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그 뒤에 일어난다.

장개석은 급히 대립을 부른다. 장초가 인쇄한 진의를 모함하는 전단을 그의 앞에 던진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정말 후안무치하다." 대립은 이때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군이 몰래 섭성을 데리고 교장(장개석)을 만난 줄을. 대립은 전단을 집어들고 교장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자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

대립은 장개석의 성격을 잘 알았다. 자신이 교장의 화를 삭일 방법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바로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연다: "학생이 무능하여 그런 것이지 후안무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그 일들은 모두 교장님을 위한 거입니다. 교장께서는 저의 사직을 허락해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눈물을 얼굴 가득 흘린다.

장개석은 대립이 사직하겠다는 말을 듣자, 대립을 걷어차며 때린다. 이때 송미령이 나타나서 구해주었다: "우농. 위원장을 더 어렵게 만들지 마세요." 

대립이 울면서 말한다: "학생이 무능하여 교장님을 화나게 하였습니다." 

 

대립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의 화를 받아주자, 장개석도 마음이 약해진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직하겠다고? 네가 가면 누가 너를 대신한단 말인가? 빨리 일어나라.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 어떻게 이렇게 혁명영수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너도 진의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않느냐. 정학계의 영수이고, 이급 상장이며, 성주석이다. 뒤에는 하응흠, 웅식휘등의 사람들이 가득 있지 않느냐."

대립은 이번에 참패를 한다. 진의에 대한 불공대천의 원한을 가지고, 계책을 세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 날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1946년 남경에서 비행기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이다.

 

10년후인 1949년 1월, 진의는 절강 단독의거계획을 기도하여, 친히 자신의 옛부하인 탕은백(湯恩伯)에게 반란책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탕은백은 자신의 선배이자, 은사이자, 고향사람이자 상사를 배신하고, 진의의 서신을 군통의 두목인 모인봉에게 넘긴다. 군통은 진의를 체포한다.

장개석은 진의에게 두 통의 서신을 쓰도록 요구한다. 하나는 장야중(張冶中)에게 쓰는 것이고, 하나는 부(傅作義)에게 쓰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당과 국가를 배신'한 것을 견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옛날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내용이다.

진의는 뼈대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를 바로 거절한다.

장개석은 화가 나서, "먼저 군법으로 재판하고, 그 후에 처결하라"고 지시한다.

진의가 처결되기 전에, 군통의 두목인 모인봉을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의의 목숨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나중에 모인봉은 모삼(毛森)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의를 제거하는 것은 대립 선생이 완성하지 못한 유원(遺願)이었다. 오늘 끝을 내게 되었는데, 말해봐라. 내가 그를 구해줄 것같은가?"

1950년 6월 18일, 진의는 타이페이 마장정형장에서 총살된다. 이 날은 바로 12년전 장초가 진의에게 총살당한 그 날이다.

대립과 진의의 은원은 이렇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