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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학량(張學良)의 7명 동생의 인생내력

by 중은우시 2013. 8. 5.

글: 왕남방(王南方) 

 

"동북왕" 봉계군벌의 수령 장작림(張作霖)은 모두 6명의 부인을 두었고, 이 6명의 부인은 모두 8명의 아들을 낳는다. 현재 사람들은 대부분 "동북역치(東北易幟)", 9.18사변, 서안사변으로 유명한 장학량은 잘 알지만, 그의 7명의 동생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장학량의 7명의 동생은 각각 장학명, 장학증, 장학사, 장학삼, 장학준, 장학영, 장학전으로, 격동의 세월 속에 어떤 사람은 대륙에 남고, 어떤 사람은 대만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멀리 미국으로 갔다. 각자 서로 다른 생활을 보냈다. 2001년 장학량이 병사했는데, 그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사람이 되었다. 

 

장학명(張學銘)은 장작림의 둘째아들이다. 국민당 중장(中將)이고 장학량의 동모형제(同母兄弟)이다. 자는 서경(西卿)이다. 동북강무당을 졸업하였다. 1919년 일본보병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기 주일대사관의 견습무관을 지낸다. 1929년에 귀국하여 천진시 경찰국국장, 천진시 시장을 지낸다. 7.7사변후 유럽, 미국, 홍콩으로 이주한다.

 

장학명이 천진시장으로 있을 때, 그는 남긴 뛰어난 업적은 바로 "편의대"사건을 잘 처리하여, 일본인이 일으킨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로 인하여 일본이 화북으로 진군하는 발걸음을 늦춘 일이다.

 

1941년 홍콩이 함락된 후, 장학명은 다시 내지로 되돌아온다. 1943년에는 왕정위정권의 군사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항전승리후, 이로 인하여 추궁을 당한다. 국민당저ㅇ부 동북장관사령부 참의살 참의, 동북행원 참의실 부주임, 총참의를 지냈다.

 

건국후 장학명은 천진시 건설국 부국장, 천진시 시정공정국 부국장, 고문, 민혁제5기 중앙위원, 천진시위 부주임위원을 지낸다. "문혁"대 박해를 받아 감옥에 들어갔다가 1973년에 명예회복된다.

 

장학명은 제3기부터 제5기까지 전국정협위원, 천진시정협 상임위원을 지낸다. 1983년 4월 9일 북경에서 병사한다. 장학명은 공인된 미식가였다. 각 지역요리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했다. 그래서 그의 집에 있는 식당에는 인테리어에 있어서나 실용적으로 신경을 많이 썼다. 장학명의 부인은 주낙균(朱洛均)인데, 북양정부의 총리를 지낸 주계검(朱啓鈐)의 딸이다. 즉 그의 형과 스캔들이 난 주오(朱五)소저의 친여동생이다.

 

장학증(張學曾)은 장학량이 셋째동생이다. 장작립이 폭약으로 죽을 때 그도 기차에 타고 있었다. 다만 다른 칸에 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 장학증은 소년때 엄청난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알려진 바로는 장작립의 집에서 장작림에게 대놓고 요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 장학증은 성년이 된 후, 북대하에서 한 외국여자친구를 사귄다. 이 일을 허부인이 알고 난 후 크게 화를 낸다: "멍청난 녀석, 당당한 중국인이 외국여자와 놀아나다니. 그게 무슨 체면상하는 짓이냐." 허부인은 장학증을 땅 바닥에 꿇어앉게 하고는 채찍으로 때렸다. 그리고 그를 묶어서, 당시 천진시시장으로 있던 장학명에게 보내어 처리하게 한다.

 

장학명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장학량에게 넘겨서 처리하게 한다. 장학량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그저 노인을 좋은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서안사변후, 장학증은 일본, 영국에 유학을 하고, 나중에 미국에 정착한다. 그는 유엔에서 일을 했고, 모두 2남1녀를 두는데, 모두 미국에서 생활한다.

 

장학사(張學思)는 장학량의 넷째동생이다. 1928년 봉천 동택중학에서 공부흘 한다. 1931년에는 북경의 사립 회문중학에 들어가 공부한다. 9.18이후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한다. 1933년 3월에는 반제대동맹에 참가하고, 그해 4월에 공산당에 입당한다.

 

1933년 9월, 큰형 장학량의 소개로 남경중앙군관학교 제10기 예비반에 들어가 공부한다. 1936년 12월 서안사변이 발발한 후, 장학사는 국민당당국에 체포된다. 얼마후 석방되어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1937년 졸업후 동북군 제53사단에서 견습배장, 상위참모를 지낸다. 중공조직의 파견으로, 상해, 남경, 무한등지에서 동북군장령과 연락하고, 장학량의 석방을 추진하는 운동을 벌인다.

 

1938년 연안으로 가고 그 후에 마르크스레닌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1939년 9월부터 항일군정대학 제3분교 직속2대(동북간부대라고도 칭한)의 대장이 된다. 1940년 부대를 이끌고 진찰기항일근거지로 간다. 그후에 기중군구사령부 참모처장을 지낸다. 기중지구에서 1941년 춘계초계 '반소탕'과 1942년 오일 반'소탕', 위현 장사촌 포위돌파전등을 겪는다. 1943년 기중군구 부참모장 겸 작전과 과장, 진찰기군구 참모처장을 맡는다. 1944년에는 진찰기군구 평서군분구참모장,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 된다. 평서지구 1945년 촌하계 공세작전에 참가한다.

 

항일승리후 동북으로 간다. 요녕성정부 주석, 요녕군구사령관, 동북행정위원회 부주석 겸 요녕판사처 주임등의 직위를 지낸다. 남만근거지의 토쟁과 사보림강등 전투에 참가한다. 일찌기 동북대학 교장을 지낸 바 있고, 해군학교를 창건하기도 한다. 1958년 장학사는 소련에서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해군제1부참모장, 참보장을 지낸다.

 

문혁때 임표일당은 말되 안되는 죄명으로 장학사를 체포하여 구금한다. 1970년 장학사의 병세가 악화된다. 주은래는 장학사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즉시 지시를 내린다: "의원에 얘기하라. 방법을 다 해서 급히 목숨을 구하고, 만일 그들의 역량이 부족하면, 301 혹은 기타 의원에 요청하여 같이 목숨을 구하도록 하라." 주은래의 지시는 비록 급전으로 의원에 전해졌고, 의원의 간부와 의사들도 적시에 치료를 하고 여러가지 치료의견을 내놓았지만, 장학사는 이작붕 일당에게 심하게 당하여 병세가 이미 심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중간에서 방해까지 하여 1970년 6월 29일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장학삼(張學森)은 장학량의 다섯째 동생이다. "9.18사변"이후, 장학삼은 심영을 떠나 천진으로 간다. 나중에 미국에 유학하여 항공을 배운다. 공부를 마친 후, 대만에서 일한다. 장학삼은 형제중 장학량과의 관계가 가장 밀접했다. 그의 딸 장여형(張閭蘅)은 장학삼이 장학량의 곁으로 보내어 장학량을 돌보게 한다. 그는 일찌기 등소평 양상군과도 만난 적이 있다. 1995년 북경에서 병사한다.

 

장학준(張學浚)은 장학량의 여섯째 동생이다. 북경보인대학을 졸업하고, 일찌기 국민당 군통에서 근무한다. 신중국성립전에 대만으로 옮겨갔고, 1973년 대만에서 서거한다.

 

장학영(張學英)은 장학량의 일곱째 동생으로 신중국성립전에 대만으로 갔다. 나중에 빈곤하게 살다가 홍콩에서 사망한다.

 

장학전(張學銓)은 장학량의 여덟째 동생이다. 계속 천진에서 살았으며, "문혁"기간동안 주은래의 보호와 장학사의 죽음으로 피해를 겪지 않았다. 말년에는 장학량으로 인하여 좋은 대우를 받는다. 1992년 천진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