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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황포신화의 파멸

by 중은우시 2013. 8. 17.

작자: 미상

 

항전을 되돌아보면, 갈라진 후의 공산당을 이끈 무장역량을 중점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항전의 중요한 역량중 하나였다. 도한 황포신화에 열중하는 독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팔로군"에는 얼마나 많은 황포의 혈통이 있을까? "팔로군"의 장군들 중에서, 황포출신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 절대다수의 팔로군 장군들은 시스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바 없다. 이력서의 학력난에 "무"라고 쓸 수밖에 없는 장군들은 기실 모두 군사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유명한 "홍군대학"과 "항일군정대학"이다. 중국현대사를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이 두 곳은 "삼류대학"이라는 칭호도 받을 자격이 없는 군대에 부설된 학교였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중국의 운명을 가른 최후결전에서 승리한 장군들을 배출한다.

 

기실 황포군관학교(전반의 몇 기)에 공산당인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큰 파도가 지나간 후, 남은 인물이 많지 않았다.

 

첫째는 청당(淸黨)이다. 분당이후, 국민당쪽에서 먼저 손을 쓴다. 그리하여 일련의 황포출신 공산당원들이 숙청,살해되었다. 둘째는 과격한 농민운동으로 일부 황포군관학교졸업생들의 신경을 자극해서, 정치적입장을 바꾼 것이다. 서향전 원수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농민의 자식은 입학하여 공부하기 어려웠다. 황포학생의 가정출신은 지주, 부농이 많았다. 혁명은 자신의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팔로군 358여단의 여단장인 노종생(盧終生)은 786여단의 여단장 진갱(陳賡)과의 사이에 이런 이치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노종생은 원래 '도련님'인 진갱 집안의 일꾼의 아들이었다. '도련님'이 광동으로 공부하러 가자, 노종생도 진갱 공자를 따라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종생은 이때부터 '도련님'을 따라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항전군이 일어날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여단장을 맡는다. 이는 전기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외에 두 가지 원인이 더 있다. 하나는 북벌기간중에 공산당원인 황포군관학생은 전투에서 영웅적이고 용감하게 싸워서 희생이 컸다; 마지막 한가지 이유는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자.

 

1989년, 중앙군사위원회는 33명의 군사가를 확정했다.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서 33명을 선정한 것이다. 이를 보면 이것이 정중한 토론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중에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양상군, 이선념등 5명의 군대계급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10대원수, 10대대장이 있으며, 여기에 8명의 1949년이전의 희생자가 있다: 섭정, 허계신, 채신희, 단덕창, 증중생, 좌권, 팽설풍, 나병휘. 33명의 군사가들중 황포군관학교출신이 8명을 점한다. 그러나 모두 다 알고 있는 원인으로, 항전이후, 4방면군의 장군들은 지휘의 제일선에서 물러났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희생자중의 허계신, 증중생, 단덕창은 모두 숙반(肅反)과정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구의 숙반때, 황포졸업생들중 살해당한 사람이 소수가 아니다.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다.

 

북벌에서와, 항일시기에 황포졸업생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간에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그들은 마침내 역사무대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타난다.

 

항전이후, 국민정부는 대규모의 감군을 실시한다. 감군대상은 거의 전부 항전시기의 "잡패군(雜牌軍)"이다. 황포계 이외의 부대였다. 이런 도태에 대하여는 나중에 국민당에 대하여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발을 찍은 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고수훈(高樹勳)등이 진전도과(陣前倒戈, 전쟁터에서 창을 거꾸로 돌리다)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방면의 시비는 사학자들이 연구토론할 주제이다. 어찌되었건, 미국원조를 받고, 완전히 미국식으로 무장한 군대는 거의 전부 황포출신들이 지휘했다. 그들이 머나먼 서북에서 동북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20년전의 중하급장교는 여러번 전투를 거친 후, 자연스럽게 승진하는 비율이 있었다. 모든 군대에서, 20년간 군에 있던 장교는 바로 "당타지년(當打之年, 싸워야할 시기)"이다. 그런데 이 20년가운데, 국민정부가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일찌기 각 부대가 임의로 군관학교를 둘 수 없도록 명령하여, 중앙육군학교만 남아있게 되었다. 보정계출신의 고위장교는 이때 이미 졸업한지 모두 30년이 되었다. 그중 일부분은 이미 황포계에 속했고, 대부분은 지휘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호종남, 두율명, 정동국, 진명인, 요요상, 황유, 손원량등 황포1기생들이 마침내 무대에 나섰다. 이 순간, 황포학생들이 가장 빛난 시기이다. 그러나 단지 일순간이었다. 왜냐하면 3년이후 그들의 빛은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국민당정권이 대륙에서 무너진 것은 여러 방면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인민들이 국민당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항상 전쟁 특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런 "대결"과정에서, 황포졸업생은 실패자였다. 이런 전체적인 실패는 적군진영의 소수 졸업생들이 승리자가 되었다고 하여 덮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호종남, 두율명, 정동국, 범한걸, 황유등 황포집단은 실패했다. 그것이 임표, 진갱, 서향전등 수도 적고, 비율도 낮은 황포졸업생들이 승리하였다고 하여 성격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1924년부터 이미 근 90년이 흘렀다. 친히 이를 겪었던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황궁의 일을 얘기해줄 백발 궁녀는 더 이상 없다. 그러나 황포졸업생, 황포계, 황포정신은 점점 신화로 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 있다: "황포군관학교가 없었다면 북벌도 없었다. 북벌이 없었다면 국민당의 정권도 없었다. 국민당의 정권이 없었다면 항전시기 중국은 정부가 없었을 것이다. 국공양당의 고위층인사는 모두 황포군관학교와 관계가 있다. 황포군관학교가 없었다면 현대중국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 중국근대사는 황포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군벌시대에 탄생하였고, 그것의 탄생은 중국의 혁명군을 통일시켰고, 군벌을 타도했고, 중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일부인들이 쓴 역사는 영웅의 역사일 뿐아니라. '누락'의 역사이다. 국가통일의 대의로 30년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황포에 대한 일방적인 선전이 있었다. 황포로 제1차국공합작을 대체한다. 이것은 일종의 지혜이다. 역사에 대한 설계를 체현한다. 다만 이것은 더 많은 인물을 무대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등화란산처(燈火爛珊處)로 밀어내고, 배경으로 밀어내게 되었다.

 

역사의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누구를 비추느냐에 따라 그가 주인공이 된다. 이 등불은 항상 역사의 희극적인 충돌을 추구하고, 전통의 영웅주의 심미효과를 추구한다.

 

우리는 그 시대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문학에서 박리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 역사를 새로 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가지 제시를 하고 싶다: 우리가 신화를 읽을 때, 신화의 배후에는 많은 누락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의 신화를 공연할 때, 공연이 끝난 후, 모든 등불이 켜지고 나면,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위로 올라가서 인사를 하고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