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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동영(董永)과 칠선녀의 "4가지 문제"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예방육(倪方六) 

 

2013년 8월 13일은 음력으로 칠월 칠일이다. 중국전통의 "칠석"날이다.

 

"견우직녀(牽牛織女, 중국에서는 牛郞織女라 부름)"과 "칠선녀하범(七仙女下凡)"의 두 사랑이야기는 칠석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고대의 '발렌타인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칠선녀와 동영의 전설에 대하여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4대문제"가 있다.

 

첫째, 동영은 하층의 '소인물'인가? 아니면 '신분있는' 사람인가?

<한서>에는 그를 '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의 증손이라고 적었다.

 

동영과 칠선녀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 독자의 인상에 동영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다. 고대의 최하층 노동자의 이미지가 있다. 다른 집에서 일을 해서 먹고 살았다. 한때 집안이 가난하여, 부친이 병사한 후에 몸을 팔아서 부친의 장례를 지냈다.

 

진나라때 사람 간보(干寶)의 <수신기>에는 동영이 어려서 모친이 죽고, 부친과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부친은 농사를 지었으며, 동영은 작은 수레를 밀며 같이 일했다. 나중에 부친이 죽고, 매장할 돈이 없어서, 동영은 자신의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되고 그 돈으로 부친의 장례를 치른다.

 

간보가 쓴 것을 보면 동영은 한나라때 농민같다. 확실히 사회하층의 소인물이다. <수신기>는 필기소설인데, 역사상 동영의 원형인 인물이 있을까? 사서를 뒤져보면, 한나라때 '천승인(千乘人)' 동영이 있다.

 

<한서.경무소선원성공신표>의 기록에 따르면, 동영의 증조부인 동충은 한선제 유순의 호위병이었다. 지절4년(기원전66년), 장안남자 장장이 동충을 찾아와서 공신 곽광의 아들 곽우의 모반을 고발한다. 동충은 즉시 상사(좌조중랑) 양운에게 보고한다.

 

곽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장장, 동충, 양운은 공로로 조정의 상을 받고, 관직이 오르고 작위를 받는다. 동충은 '고창후'가 되고 천호를 하사받는다. 나중에 범죄를 저질러 삭호되고 겨우 79호만 남긴다. 다만 동씨집안은 이후로 작위를 가지게 되고, 아들 동굉, 손자 동무가 차례로 이 작위를 승계한다.

 

한애제 유흔 원수2년(기원전1년), 동무는 부친 동굉의 "간사한 행위"로 인하여 작위를 박탈당한다. 건무2년(26년), 유수가 황제(광무제)에 오른 다음 해 반정과정에서, 동씨집안은 작위를 회복한다. 동충의 증손자, 동무의 아들인 동영은 "고창후"를 승계한다.

 

이렇게 말하면, 동영은 당시 절대로 '신분이 있는 사람'이다. '고관자제'이다. '몸을 팔아서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지경에까지 전락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이 작위를 박탈당하여 가정에 변고가 생긴 것과 관련있다고도 말한다.

 

동영은 '신분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고대인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산동 임기 오백장의 화상석묘의 문미에 '동영고사'를 그린 그림이 있다. 동영은 진현관(進賢冠)을 쓴 모습이다. <후한서.여복지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현관은 고치포관(古緇布冠)이다. 유학자들의 복식이다."

 

다만 신문있는 동영과 가난한 동영이 같은 사람인가? 이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얘기가 없다.

 

둘째, 동영은 '낭만청년'인가 '도덕모범'인가.

한나라때 <효자전>에는 '매신장부(賣身葬父)'의 최초판본이다.

 

동영은 현대인들이 많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와 칠선녀간의 사랑이야기때문이다. 동영은 이로 인하여 현대인들이 보기에 '도화운'이 있는 낭만청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이나 고대전설을 보면, 동영의 이야기는 서한때부터 전파되었다. 다만, 동영의 초기 이미지는 낭만청년이 아니다. 아주 보기 드문 '효자'이고, 당시 사람들에 의하여 '도덕모범'이 된다. 효도를 제창하는 유가문화가 찬양하고 추앙하는 인물이었다.

 

한인 유향의 <효자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한때의 동영은 천승인이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부친이 혼자서 길렀다. 부친이 죽고, 장사를 지낼 수 없자, 사람들에게 돈 일만을 빌렸다. 동영은 돈주인에게 말한다: '나중에 당신에게 돈을 갚지 못하면 몸으로 노비가 되어...."

 

이것이 바로 동영의 '매신장부'의 최초판본이다. 유향의 <효자전>은 이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는 동영에 관련된 글은 모두 <수신기>, <태평어람>등 작품에서 전재되어 남은 것들이다. 어떤 사람은 <효자전>은 후인들이 유향의 이름을 빌은 위작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근거가 약하다. 한나라때 화상석에 이미 '효자동영'의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륭51년(1786년)에 발견된 산동 가양 동한말기의 무량사 화상석에 17폭의 <효자전도>가 그려져 있다. 그중 후벽에는 '동영사친'도가 있다. 그림에는 수레바퀴 하나짜리 수레 즉 소위 '녹거(鹿車)'가 있다. 나이 든 사람은 손에 구장(鳩杖)을 들고 독륜거에 앉아 있다. 수레 위에는 음식을 담은 그릇이 있고, 독륜거는 큰 나무 아래 시원한 곳에 세워져 있다. 한 젊은 농민이 손애 농기구를 들고 고개를 돌려 노인을 보고 있다.

 

그림에는 '동영은 천승인이다." "영부(永父, 동영의 부친)"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그림의 젊은 농민은 효자 동영이고, 노인은 동영의 부친이다.

 

산동경내의 여러 곳에서 '동영사친'도가 발견되는 외에, 사천등지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비록 세부사항이나 형내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주제는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사천 낙산 시자마냐구 1호 애묘에서 발견된 '동영사친'도는 무량사 화상석의 화면과 아주 비슷하다: 화면의 왼쪽에는 큰 나무가 있고, 동영은 늙은 부친이 큰 나무아래의 독륜거에 타고 있고, 나뭇가지에는 그릇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동영이 반쯤 몸을 돌려서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나무 아래의 부친에게 부채를 부쳐주고 있다....

 

동영을 고대인들이 칭송한 가장 주요한 것은 그가 효자이기 때문이다. 부친이 병사한 후, '매신장부'는 그의 '도덕모범'으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이것은 그가 나중에 칠선녀의 애정을 얻는 전제조건이다.

 

셋째, 동영이 만난 것은 '직녀'인가, '칠선녀'인가.

송,원시기 <동영우선전>은 가장 먼저 '칠선녀'가 칠월칠일 하범했다고 적었다.

 

동영과 칠선녀 이야기는 바로 '매신장부'이후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민속학에서 그의 효행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동우우선'의 전설을 언급한 것은 한나라말기의 재자 조식(曹植)이다. 조식은 부친 조조를 기리는 <영지편>에서 이렇게 썼다: "동영조가빈(董永遭家貧), 부로재무유(父老財無遺).....천령감지덕(天靈感至德), 신녀위승기(神女爲乘機)"

 

가장 먼저 '동영우선'을 개방적으로 묘사한 것은 <수신기>이다. 원문은 이렇다: "길을 가다가 부인 한 명을 만난다. 말하기를 '그대의 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했다." 대체적인 뜻은 동영이 약속한대로 돈을 빌려준 사람의 집에 일을 해서 돈을 갚으러 가는 길에, 예쁜 아가씨를 만난다. 아가씨는 주동적으로 나서서 그의 처가 되기를 원한다. 동영은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그 아가씨를 처로 맞이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부부는 같이 돈을 빌려준 사람의 집으로 가서 일을 해준다.

 

채무를 갚은 후, "부부는 함게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이 부인은 진실한 신분이 '하늘의 직녀'라고 얘기한다. 원래 천제(天帝)가 동영의 '매신장부'행위에 감동받아, 자신의 작은 딸을 인간세상에 내려보내 동영이 빚을 갚도록 도와준 것이다.

 

'직녀'는 왜 '칠선녀'로 바뀌었는가? 이것은 재미있는 변천과정이 있다.

 

초기전설에서, 동영과 견우의 처는 모두 '직녀'였다. 직녀는 어떤 사람인가? 사마천이 편천한 <사기.천관서>에 따르면, "직녀는 천녀손(天女孫)이다." 천제의 손녀가 어떻게 동영의 처가 되면서 다시 견우의 처가 되었는가? 천제의 집안에 '딸 하나를 두 남편에게 시집보내는' 법도는 없을 것이다. 수,당시기에 이 '인간과 선녀의 사랑이야기'를 합리화사기 시작한다. 하늘의 직녀는 3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직녀 1명'이 '직녀 3명'으로 바뀐다.

 

이렇게 하여 동영과 견우가 취한 직녀는 같은 선녀가 아니다. 남녀혼인관계가 이제 정상으로 바뀐 것이다. '십직녀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게 하기 위하여, 고인은 <사기.은본기>의 "삼인행욕(三人行浴)'의 전설을 빌려서 '심직녀가 연못에서 목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당나라사람이 쓴 돈황의 잔권 <동영변문>을 보면, 2명의 직녀는 이렇게 세상에 나타난다. 그리고 동영과 그중 한 직녀간에 아들 '동중(董仲)'을 낳는다.

 

이렇게 고쳐지자, 동영과 견우는 '동서간'이 된다. 여전히 함께 묶여 있게 된다. 그리고 도대체 3명의 직녀중 누가 부부인지 불분명해진다; 송, 원시기에 '동영우선'은 한번 더 발전한다. '칠선녀'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 것이다. 동영과 사랑하는 직녀와 견우와 결합한 직녀가 완전히 분리된다. 동영과 견우의 전설은 더 이상 엮어서 돌아가지 않게 된다.

 

"칠선녀"는 명확히 동영의 처로 된 것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송,원시기 청평산당 화본 <동영우선전>이다. 낳은 아들은 '동중'에서 한나라때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로 바뀐다. 동중서는 한 마음으로 모친을 찾아다닌다. 도사인 엄군평(嚴君平)이 이렇게 가르쳐 준다: "이런 효심은 보기 드물다. 네게 말해주겠다. 칠월칠일이 되면 너의 모친이 여러 선녀와 함께 태백산으로 내려와 약초를 캘 것이다. 일곱번째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너의 모친이다."

 

이후 동영과 칠선녀에 관련된 전설은 갈수록 풍부해진다. <동수재>, <우선기>, <직금기>, <괴음별>등 각종 판본의 '동영우선(董永遇仙)'이야기가 나타난다.

 

넷째, 동영은 '산동사람'인가, '호북사람'인가.

명나라 가정제때 창본 <직금기>는 그가 '윤주 단양현 동괴촌 사람'이라고 한다.

 

동영과 칠선녀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영의 관적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중국에는 현재 최소한 십여개현지의 지서(誌書)에서 모두 '동영의 고향'이라고 적고 있다. 현지에는 모두 동영사(董永祠), 동영묘 혹은 선녀분(仙女墳)등 유적과 전설이 있다.

 

동영의 관적변화도 마찬가지로 재미있다.

 

수,당이전에 동영은 '산동사람'이었다. 소위 '천승인(千乘人)'이다. 그러나 천년이래 행정구역은 계속 조정된다. '천승현(千乘縣)'은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동영이 도대체 산동 어디 사람인지는 논쟁이 있다. '천승'과 관련있는 청주(靑州), 박흥(博興), 광요(廣饒)등 몇 개현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있다. 모두 '동영은 우리 현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당나라대가 되면서 동영이 '호북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 설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동영변문>이다. 그 안에는 "효감(孝感)의 선현이 동영을 말하다"는 말이 있다. 청나라 강희연간의 <효감현지>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효건원년(454년), "한나라말기 효자 동영으로 인하여, 안륙현의 동족에 효창현을 두다" 효감과 안륙은 이로 인하여 모두 동영의 고향이라고 말하기 시작하게 된다.

 

송나라이후, 동영이 관적은 더욱 많아진다. 산동사람, 호북사람 외에, 강소사람, 하남사람, 하북사람, 산서사람등 여러 주장이 나타난다. 그중 '강소사람'이라는 설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가주단양(家住陽), 성동명영(姓董名永)"... 다만 '강소인'이라는 의견도 통일되지는 않았다. 명나라 가정제때의 창본 직금기>에는 '동영의 자는 연년이고, 윤주 단양현 동괴촌 사람'이라고 하였다; 같은 성의 동대시는 동영이 동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 매체는 다시 새로운 설을 내놓았다. 동영은 '남경'사람이라는 것이다. 남경 강녕 사람이란느 것이다. '남경운금(南京雲錦)'과 '직녀'를 함께 엮은 것이다.

 

현대에 동영이 '안휘사람'이라는 설이 많아진다. 이것은 황매희 <천선배(天仙配)>의 성공적인 전파와 관련있다. 황매희는 안경(安慶)에서 나왔다. 그러다보니 모두 동영이 안휘 '안경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같은 성의 마안산시는 마안산경내의 '소단양'이야말로 동영의 관적지라고 주장한다.

 

동영의 관적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고, 적지 않는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의 배후에는 최소한 '동영과 칠선녀'라는 비물질문화유산이 중국에서는 생존토양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동영이 어디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욱 의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