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중국의 사자(獅子): 중국에 사자는 살지않는데, 석사자(石獅子)를 만든 이유는?

중은우시 2019. 2. 7. 15:35

글: 노하(老何)


수문사자(守門獅子)는 중국전통건축에서 빠질 수 없는 조각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사자가 살지 않는다. 역대장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를 만들게 되었을까? 현존하는 사자의 조형을 보면, 진실한 사자와는 거리가 멀다. 둘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서, 의문이 든다: 수문사자는 도대체 무슨 동물을 보고 만들게 된 것일까?


사실은 수문사자의 이미지는 확실히 또 다른 전설상의 동물에서 왔다, 바로 그리핀(格里芬, Griffin)이다.  


그리핀은 최초의 초원제국 스키타이왕조의 숭배물이다. 녹형(鹿形)그리핀, 사형(獅形)그리핀과 응형(鷹形)그리핀의 3종류로 나뉜다. 녹형은 아주 복잡하고, 새의 부리같은 긴 뿔을 지니고 있고, 사형은 날개가 달려 있는 사자이며, 응형은 매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하고 있다.


응형그리핀은 나중에 고대그리스신화에 나오는 Gryphon이 된다. 그것은 몸이 8마리의 사자보다 크고, 높이는 100마리 매보다 높으며, 긴 귀, 표범 입, 발톱은 소뿔만큼 크다. 사브(Saab)자동차의 표지이고, 제노아 CFC의 팀휘장에도 들어 있다.


그리핀이 서쪽으로 전해진 것은 응형이 위주이고, 동쪽으로 전해진 것은 녹형, 사형이 위주이다. 중국초기의 석사자의 조형은 모두 날개가 달려 있다. 여기에서도 잊혀진 옛 동서문명의 교류사를 엿볼 수 있다.


1. 사자(獅子)의 본명은 사자(師子)이다.


사자에게는 3가지 이름이 있다. 산예(狻猊, suanni), 사자(師子, 즉 獅子)와 효(虓).


산예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이아.해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산예(狻猊), 여호묘(如虎猫), 식호표(食虎豹)"(산예는 호랑이 고양이처럼 생겼고,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다). 이것은 사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인도어에서 사자는 suangi이다. 산예의 고음인 suan-ngiei와 비슷하다. 미국학자인 셰퍼는 인도에서 전래되어 온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야생사자는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시아, 유럽에도 사자가 있었다. 현재의 인도국가공원에도 야생아시아사자가 살고 있다.


인도 국가휘장(國徽)의 사자는 바로 아유타왕 석주(石柱) 꼭대기에 있는 돌조각상에서 왔다.


다만, 산예가 반드시 사자가 아닐 수는 있다. <목천자전>에는 "명수사족(名獸使足), 주천리(走千里); 산예야마(狻猊野馬), 주오백리(走五百里)"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산예는 그저 도발(桃拔), 천록(天祿)과 마찬가지로 전설상의 동물이고, 나중에 사자에 붙여진 것일 수 있다.


학자인 임해촌(林海村)은 이렇게 본다. 산예의 어원은 스키타이어의 sarvanai이다. 스키타이인(중국에서는 塞人, 塞種이라고 불렀다)은 상(商)나라때부터 중국과 왕래했고, 상나라때의 부호묘(婦好墓)에서는 아주 많은 화전옥(和田玉, 화전은 신강남부의 옥산지임)이 나왔는데, 이는 서로간의 교류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스키타이인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초춴에 살던 유목민족이다.


사자(師子)라는 칭호는 이란에서 왔다. 서한초기의 <한서.서역전>을 보면, "오과(烏戈)는 땅이 덥고 숲이 우거지고 편평하다. 도발, 사자, 서우(犀牛)가 있다." '오과'는 오과산리국(烏戈山離國)으로 지금의 아프가니스칸 헤라트이다.


북송에 이르러, 비로소 "사(獅)"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는 맹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자(師子)라고 불렀다. 명나라에 이르러, 사(獅)가 정식으로 사자(師子)를 대체한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자(獅子)는 서역제국에서 나며 백수의 우두머리이다."


효에 대하여는, <설문해자>에 "사자이다(師子也)"라고 하였는데, 사자가 포효할 때의 소리를 딴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는 계속 전해지지 않았다.


2. 반용(半龍)반그리핀(半Griffin)의 괴수


그리핀의 이미지가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상,주의 청동기에서는 도철문(饕餮紋)으로 나타난다. 그외에 하북 평산 전국시대 중산왕성의 유적지에는 착금은쌍익신수(錯金銀雙翼神獸)가 한쌍 출토되었는데, 확실히 그리핀의 변형이다. 여러 학자들은 이를 중국최초의 사형(獅形) 도상(圖像)이라고 말한다.


한무제가 서역을 개통한 후, 중원은 사자에 대하여 비교적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정사에서 아직 사자를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은 없다. 동한 장화원년(87년)에 처음 사자를 공물로 바친 기록이 나온다. "서약장사 반초가 사차(莎車)를 쳐서 대파했다. 월지국(月氏國)은 사신을 보내어 부발(扶拔), 사자(師子)를 바쳤다."


<후한서>에는 서역각국에서 사자를 4변 바쳤다고 나온다. 학자 송람(宋嵐)의 통계에 따르면, 역대정사본기에는 모두 21번의 사자를 공물로 바친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마지막은 청나라 강희17년(1678년) 포르투갈 사신이 아프리카사자를 데리고 조근(朝覲)한 것이다. 강희제가 강남으로 갔을 대 배에 사자를 싣고 간 적이 있다.


중원에는 사자가 살지 않는다. 공물로 바쳐진 사자는 황가내원에 갇혀있었다. 심지어 기효람 조차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그러새 민간에서는 사자의 진짜 모습에 대하여 잘 몰랐다. 원나라때 화가의 <원인화공오도축(元人畵貢獒圖軸)>은 현재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면 분명히 사자이다. 이를 보면 화가는 오(獒, 개)와 사자도 구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짜 사자를 보지 못했으니, 장인들은 그저 외국에서 온 그리핀을 보고 걱에 본토의 전통적인 도안에 따라 조형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동한때부터 중국에서는 석각사자가 나타난다. 능을 지키는 용도였다. 이 습속은 중앙아시아에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석사자는 그리핀과 큰 차이가 있다. 용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초기 석사자는 몸은 S자형으로 기복이 있었다. 앞발은 땅에 대고, 가슴은 쫙 펴고, 엉덩이는 높이 들었다. 그리고 압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여전히 두 날개를 달고 있었다. 이는 중앙아시아혈통임을 보여준다.


3 날개가 없어지다.


그러나 석사자의 날개는 점점 퇴화된다.


첫째, 날개는 만들기가 복잡하고, 재료도 많이 들고, 쉽게 손괴된다. 그래서 차라리 석사자의 늑골부위에 날개도안을 새기는 것으로 처리한다. 날개뿐아니라 석사자의 꼬리도 나중에 이렇게 처리한다.


둘째, 용과 결합하였는데, 용은 원래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다시 날개까지 만드는 것은 화사첨족처럼 보일 수 있다.


날개의 퇴화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당나라때 돈황장경동에서 해외로 유실된 진품회화 <사자도>에는 여전히 날개가 있다. 그러나 보기에 이미 날개인지 털인지를 구분하기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비록 여전히 그리핀의 특징인 날개의 끝이 머리를 향한더거나, 날개가 S자형을 보인다는 특징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나라시기는 그리핀이 중국에서 변형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불교의 영향이 증가하면서, 불교에서는 사자를 인수(仁獸)로 본다. 보살이 타고 다니는 것이다.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부른다. 사자는 이렇게 하여 벽사호법(辟邪護法)의 공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사자의 이미지도 크게 바뀐다. 전통적인 용맹하고 튼튼한 모습에서 자비롭고 선량한 눈에 위무함은 안으로 감추게 된다.


한나라이후 중원은 근 400년간 전란의 시기를 맞고 인민들은 고통에 시달린다. 당나라는 무력으로 천하를 얻은 것을 감추고, 선비혈통을 지녔다는 단점을 갑추기 위하여, 중원전통문화를 극력 선정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정통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본토의 용을 고의로 떠받들고, 외래의 사자는 크게 억압한다. 그리하여 갈수록 더 맹수같지 않게 된다.


당나라 궁중에서 중앙아시아의 조련사가 사자를 훈련시키는 것(혹은 사자로 분장하여 춤을 추는 것)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할 때의 지정프로그램이 된다. 이백은 <상운악(上雲樂)>에서 이렇게 썼다:


오색사자(五色獅子)

구포봉황(九苞鳳凰)

시노호계견(是老胡鷄犬)

명무비제향(鳴舞飛帝鄕)


석사자는 점점 '개'처럼 바뀐다. 그러면서 날개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고,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4. 황실에서 민간으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석문사자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당나라때의 도시는 '이방제(里坊制)"를 취하고 있었다. 장안을 예로 들면, 108방이 있었다. 매 방은 모두 흙으로 만든 담을 쌓아서 도둑을 막았다. 낮에는 방문을 열고, 밤에는 닫았다. 장안은 야간통금제도가 있어서, 펴민들이 밤에는 다닐 수가 없었다. 이백은 시에서 이렇게 썼다.


탁녀홍장기차야(卓女紅粧期此夜)

호희고주수놀가(胡姬酤酒誰論價)


호인의 주점은 밤새도록 영업을 하였는데, 정부에서 간섭하지 못했다. 호희를 찾아서 술을 마시는 것 이외에 별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방문은 일반적으로 패루식(牌樓式)이다. 기둥의 양쪽을 큰 돌로 고정시키고, 돌의 위에는 사자등을 새겨서 장식으로 삼는다.


당나라말기에서 송나라초기에 이르러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방의 담장이 무너진다. 부유한 집에서는 스스로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전통적인 방문양식을 본따 자신의 호화주택의 문앞에 석사자를 세운다.


석사자가 민간의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면서 그 모양도 점점 생활화된다. 청나라때 <양주화방록>에는 석사자를 만드는 격식을 적어 놓았는데, 사자는 두(頭), 검(臉), 신(身), 퇴(腿), 아(牙), 고(胯), 수대(繡帶), 영당(鈴鐺), 선라문(旋螺紋), 곤착수주(滾鑿繡珠), 출착재자(出鑿崽子)" 영당, 수대, 수주등은 완전히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이다.


석사자의 보급은 또 하나의 의외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거북(龜)의 몰락이다. 거북은 원래 용, 봉, 기린과 함께 사령(四靈)에 속했다. 집앞에 거북을 조각하여 길상을 추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나라때 <철경록.에는 김방(金方)의 누구를 조롱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택권개위탱목토(宅眷皆爲撑目兎)

사인초작축두귀(舍人總作縮頭龜)


전설에 따르면 토끼는 달을 보면 임신한다고 한다. 이것은 여자가 남편없이 임신한 것을 가리킨다. 음란한 짓을 행하는 자는 비밀스럽게 행동하여 마치 머리를 집어넣은 거북이와 같다는 것이다. 명나라때 영락제가 권력을 찬탈한 후에 "오귀법령(烏龜法令)"을 반포하는데, 건문제에 충성하던 신하를 모조리 '오귀'라 칭하고 그 후손을 '귀자(龜子)'라 칭하며 영원히 천한 업에 종사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고정적인 신분이 탄생하는데 바로 악적(樂籍)이다.


거북이가 재수없이 버려지면서, 석사자가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석사자가 유행하게 된다.


5. 잔짜사자는 중국에서 우울하게 살았다.


비록 석사자가 점점 더 개에 가까워졌지만, 진짜 사자는 중국인들이 여전히 경외했다. 원나라때의 사람인 웅태고(熊太古)는 이렇게 말한다: "그(사자)의 젖이 소, 말의 젖에 들어가면 모두 물로 바뀐다. 비록 죽은 후에라도 사자와 표범이 감히 그 살을 먹지 못했다."


<낙양가람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문제 유장은 시중 이욱에게 말하기를, '짐이 듣기로 호랑이가 사자를 보면 반드시 납작 업드린다'고 하는데, 한번 보고 싶다. 그러자 인근의 군현에 호랑이를 잡아서 보내라고 명한다. 공현, 산양에서 호랑이 2마리, 표범 1마리를 보낸다. 황제는 화림원에서 이를 보았다. 그러자, 호랑이와 표범은 사자를 보자 모두 눈을 내려깔고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다."


명나라말기 궁정의 문앞에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 한마리, 표범 2마리를 두어 지키게 했다. 그렇다면, 왜 더욱 위맹한 사자를 두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사자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자는 진공(進貢)으로만 얻을 수 있다. 명나라 성화19년(1484년)에는 아흑마왕(阿黑麻王)이 사자 2마리를 보낸다. 한 마리다 금전표의 예에 5표리를 더해준다. 소위 표리(表里)는 일반적으로 1필의 비단을 가리킨다. 당시 금전표를 진공했을 때의 가격이 8표리였다. 이렇게 계산하면 가격이 아주 비싼 편이다.


1478년, 사마르칸트의 사신 파륙만(怕六灣)이 사자를 바친다. 황제는 종전의 예에 따라 하사품을 내린다. 그러나 사신은 길이 멀다며 불만을 표시한다. 황제는 다시 정사, 부사에게 각각 2표리, 수행원들에게 1표리씩을 추가로 내린다. 그러나, 파륙만은 시간을 끌고 다음 해가 되어서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는 할 수 없이 다시 정,부사에게 50냥백은을 주고, 15명의 수행원에게는 1인당 5냥을 주었다. 파륙만은 다시 말하기를 육로로 돌아가려면 중간에 험난한 곳이 많아서 해상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가는 길에 천진의 장로에서 소금을 사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중간에 소란이 일어, 결국 황제는 다시 병력을 보내어 광주까지 보낸 다음 쫓아냈다.


중앙아시아의 사료에 따르면, 매번 명나라에 사자 1마리를 보낼 때마다 30상자, 1천개의 상품을 얻었다고 한다. 댓가가 아주 컸지만, 아무런 실용적인 가치는 없었다. 그리하여, 명효종에 이르러, 더 이상 사자를 진공하지 말라고 한다. 이동양(李東陽)은 시를 써서 남긴다;


만리교예초각공(萬里狡猊初却貢)

일시대성공등환(一時臺省共騰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