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문강(盛文强)
봉래는 해상선산(海上仙山)이다. <산해경.해내북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봉래산은 바다 가운데 있다. 대인지시(大人之市)가 바다 가운데 있다." 이것은 진실과 상상의 사이를 오가는 산(섬)이다. 전설에 따르면, 봉래는 발해(渤海)에 있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고 한다. 명나라때의 간행본인 <산해경>은 봉래를 해면의 상공에 떠 있는 누각으로 그렸다. 상서로운 구름이 아래를 받치고 있으며, 이는 신선이 사는 곳이고, 모두 금과 옥으로 되어 있다. 새와 짐승은 모두 흰색이다. 봉래는 선인의 거소이고, 그들의 손에는 불사약이 있다. 진시황은 나중에 서복(徐福)을 바다로 보냈는데, 목적지는 봉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복은 일본에 도착했고, 후지산을 전설상의 봉래라고 여겨 거기에 정착했다고 한다.
봉래의 선종(仙踪)은 진시황이전부터 있었다. 전국시대에도 해상선산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사기.봉선서>에 따르면, "제위왕(齊威王), 제선왕(齊宣王), 연소왕(燕昭王)은 사람을 바다로 보내어 봉래,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찾았다. 이 삼신산(三神山)은 전설에 따르면 발해의 가운데 있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바다에 가깝고, 전설상의 봉래산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 그래서 이들 국왕은 진시황보다 일찌기 신선을 찾아서 바다로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찾아가기가 어렵다. 바다는 풍운의 변화가 심하여 봉래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이와 동시에 봉래의 위치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바뀌었다. <열자.탕문>에서는 바다의 가운데 5개의 선산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대여(垈輿)이고, 둘은 원교(員嶠)이며, 셋은 방호(方壺)이고, 넷은 영주(瀛州)이며, 다섯은 봉래(蓬萊)이다." 봉래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산은 고하주선삼만리(高下周旋三萬里), 그 꼭대기의 평지는 구천리, 산의 가운데 빈 곳은 서로 칠만리가 떨어져 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거기를 오가는 사람은 모두 신선이고, 공중으로 날아다닌다. 그러나, 봉래는 기반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항상 파도에 따라 아래위 앞뒤로 오가며,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하늘은 해신을 시켜 큰 거북으로 선산을 등에 지고 있게 했다. 큰 거북이 등에 산을 지고 있어도 안정되지 않아서 나중에 용백지국(龍伯之國)의 거인이 큰 거북을 낚시해 가 버려서 다섯 개의 선산 중에서 대여, 원교는 바다 가운데로 가라앉고, 나머지 3개의 선산만 남았는데, 계속 떠돌아다니고 있다
외부에서 봉래에 진입하는 것은 어렵다. 왕가(王嘉)의 <습유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봉래의 구조는 호형(壺形)이다. 그외에 두 개 선산인 방장과 영주를 나란히 언급하면서 '삼호(三壺)'라고 부른다. "삼호는 바로 바다 가운데의 세 산이다. 하나는 방호인데, 즉 방장이다. 둘째는 봉호인데 즉 봉래이다. 셋은 영호인데 즉 영주이다. 모양이 병과 같다." 병은 상대적으로 폐쇄된 세계이다. 병의 가운데 또 다른 우주가 있다. 선인호공(仙人壺公)이 있는데, <후한서>에는 비장방(費長房)이 늙은 약장수를 만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호리병을 하나 걸어놓고 있는데, 노인이 밤에는 호리병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비장방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다음 날 찾아갔더니, 노인이 비장방을 데리고 호리병속의 세계로 들어간다. "집이 화려하고, 술과 음식이 가득했다. 같이 다 먹고 나왔다." 원래 이 호리병은 아주 작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봉래를 봉호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스스로 운행하는 규칙이 있는데, 외부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다. 호리병모양은 혼돈의 우주를 모방했고, 호리병입구는 두 우주를 연결시키는 통로이다. 호리병입구에서 이질적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는 비밀통로이다. 선인은 한번 뛰어서 들어갈 수 있지만, 범인은 기연을 만나야만 들어가 볼 수 있다.
확실히 봉래는 도달하기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그저 바다의 신기루에 보이는 환상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속세와 평행하는 다른 차원의 공간인 것이다. 봉래선인이 속세에 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유명한 안기생(安期生)이 있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안기생은 "통봉래중(通蓬萊中), 합즉견인(合則見人), 불합즉은(不合則隱)" 항상 누군가 안기생이 동해에서 약을 파는 것을 본다. 몇 대의 사람들이 모두 안기생을 보았다. 그러나 안기생의 얼굴은 늙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안기생이 봉래의 선인이라고 하였다. 한무제때의 방사(方士)인 이소군(李少君)은 스스로 봉래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가 선인 안기생을 만났다고 한다. 안기생이 먹는 대추는 참외만큼 컸다고 한다. 범인이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이질공간에만 기이한 과목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봉래산의 신기함을 더욱 퍼트리는 요소가 되었다.
팔선과해(八仙過海)는 민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원나라의 잡극인 <쟁옥판팔선과해>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백운선장이 봉래선도에 모란이 활짝 폈을 때, 여덟 명의 신선에게 와서 연회에 참석하라고 초청한다. 여덟 신선은 바다를 건널 때 각자 법술을 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동해용왕을 건드려, 쌍방간에 격전이 벌어진다. 나중에는 관음이 나서서 조정하고, 비로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신선이라도 봉래에 가기는 쉽지 않았다. 하물며 범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후세의 전설에서, 많은 사람들이 봉래산에 가보았고, 구경을 한번 해보고나서 돌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에게 봉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노조(盧肇)의 <일사(逸史)>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나라 회창원년 상인은 바다에서 큰 바람을 만난다. 바람에 날려서 갔는데 어디인지를 모른다.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섬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바로 봉래였다. 상인은 도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도사가 말하기를 '이곳은 인연이 있어야 올 수 있다. 이곳은 봉래산이다.' 도사는 상인을 데리고 구경시켜주었다. 집이 수십개인데 각각 이름이 있었다. 그중의 한 곳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상인이 묻자 도사가 이렇게 대답한다; '이곳은 백락천원(白樂天院)이다. 낙천은 중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백락천은 바로 당나라때 시인인 백거이(白居易)이다. 상인은 묵묵히 기록했고, 나중에 그의 배는 절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일을 절동관찰사 이사직(李師稷)에게 보고한다. 이사직은 다시 백거이에게 알린다. 백거이는 <객유설(客有說)>이라는 시를 짓는다: '근유인종해상회(近有人從海上回), 해산심처견누대(海山深處見樓臺), 중유선감허일실(中有仙龕虛一室), 다전차대낙천채(多傳此待樂天采)"
후인들의 봉래에 대한 부회는 봉래를 잎과 가지가 무성한 신화수로 만든다. 지금 산동반도에는 봉래라는 지명이 있는데 연대(煙臺)에 있다. 당나라때의 두우(杜佑)는 <통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무제는 여기에서 바다의 봉래산을 보았다. 그래서 성을 쌓아 봉래라고 이름지었다." 신화에서 현실세계로 이식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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