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중국 십대표국(十大鏢局)과 그 비조(鼻祖)

by 중은우시 2013. 8. 17.

작자: 미상

 

표국의 비조는 전문가들조차 확정할 수 없다. 그리고 문자기록도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표국은 자신의 비조를 다 알고 있다. 각각의 표국에는 모두 자신의 장방선생(帳房先生)이 장부를 기록했고,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표국의 잔존 장부에서 그 표국의 비조는 찾아낼 수 있다. 그 후손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구술전승이 있는 것도 물론이다.

 

당시, 전국의 각 중요한 상업도싱는 크고 작은 표국들이 수도없이 많이 존재했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30여개에 달한다. 그리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업무범위가 넓으며, 전국에서 통하는 표국은 10개가 있었다. 이 십대표국은 다음과 같다:

 

흥륭표국(興隆鏢局) 청나라 가경연간                             북경 순천부(順天府)      신권무적(神拳無敵) 장흑오(張黑五)

회우표국(會友鏢局) 청나라건륭연간 - 1912                     북경 전문(前門)           삼황포추문(三皇砲捶門) 송언초(宋彦超)

성흥표국(成興鏢局) 1878 - 1900                                    하북 창주(滄州)           표불함창주(鏢不喊滄州) 이관명(李冠銘)

옥수표국(玉水鏢局) 청나라 가경 - 1838                          강소 소주(蘇州)           장미노도(長眉老道) 장덕무(張德茂)

창륭표국(昌隆鏢局) 1840 - 1901                                    강소 소주                    철퇴좌이파(鐵腿左二把) 좌창덕(左昌德)

광성표국(廣盛鏢局) 1802 - 1830                                    하남 사점(賒店)           심의권종사(心義拳宗師) 대이려(戴二閭)

동흥공표국(同興公鏢局) 1855 - 1913                              산서 평요(平遙)           신창면왕(神槍麵王) 왕정청(王正淸)

원순표국(源順鏢局) 1878 - 1900                                    북경 주시구(珠市口)     대도왕오(大刀王五) 왕자빈(王子斌)

삼합표국(三合鏢局) 1890 - 1971                                    하북 장가구(張家口)     공의권전인(公議拳傳人) 안진원(安晋元)

만통표국(萬通鏢局) 1891 - 1999                                    하북 보정(保定)           단도리(單刀李) 이존의(李存義)

 

위의 표에서 우리는 중국십대표국의 창시시기와 비조를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들 표국의 개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흥륭표국은 최초의 표국이라고 칭해진다. 창시자는 산서사람 장흑오이다.

 

회우표국의 창시자는 송언초이다. 그의 평생절기는 삼황포추권이다. 삼황포추문의 역사연원은 길다. 인문초조 헌원황제(즉 인황씨)를 창시자로 모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종문(人宗門)", "인조문(人祖門)", "삼황문(三皇門)"이라고 칭해진다.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삼황포추권은 계속 완비되고, 번성하며 전파된다. 명말청초에 하북 기현 무술명가 교삼수(喬三秀)가 이 권법을 전수받는다. 이때부터 문자기록과 문물이 남아있게 된다. 교삼수는 아들 교령(喬齡, 자는 鶴齡)에게 전해 제2대가 되고, 교령은 이 권법을 제3대의 송언초(자는 邁倫), 우연등(于連登), 장문채(張文彩), 왕쌍규(王雙奎)의 4제자에게 전한다.

 

송언초는 평생에 배운 것을 열심히 연구하여, "부자삼공수(夫子三拱手)"라는 절기를 만들어낸다. 청나라 도광25년(1845년), 송언초는 경성으로 와서 '신기영(神機營)'에 들어가서 국가에 힘을 바친다. 신기영의 노칠왕야는 송언초와 영내의 교련인 무림고수와 비무를 시킨다. 송언초의 출수는 신기하여, 여러 고수들이 모두 송언초에게 패배한다. 노칠왕야는 아주 기뻐하며, "정말 신권이로다"라고 말하고, 오품양란정대를 내린다. 그후 "신권 송매륜"의 명성이 무림에 유명해진다. 송언초는 경성을 돌아다니며 팔괘장의 조사인 동해천(董海川)과도 사귀어 친한 친구가 된다. 송언초는 관료생애에 조정의 부정부패를 목도하고, 스스로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관직을 버리고 사업을 시작한다. 북경의 전문밖에서 양식점포가에 "경도회우표국"을 창립하여 무로써 친구를 모은다. 이때부터 보표의 생애를 시작한다. 동시에 무술을 전수한다. 이때부터 북경 삼황포추문의 역사에서 신기원을 이룬다.

 

청나라 동치5년(1866년) 우연등의 아들 우감(于鑒, 자는 鏡堂)은 먼저 부친의 무예를 전수받고, 나중에 경성으로 가서 송언초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다. 송언초의 오묘한 비법을 배운 후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상승의 경지에 다다른다. 이때부터 우감은 북경에서 산문을 열고, 삼황포추권을 전수하기 시작한다. 이 역사시기에 "경도회우표국"과 "삼황포추문"은 동시에 명성을 떨치고, 표국의 사업이 잘 된다. 삼황포추문도 널리 전파되여, 큰 발전을 이룬다. 나중에 표국에 이요신(李堯臣)과 같은 걸출한 표사가 배출된다. 그는 항일전쟁기간동안 무극도법(無極刀法)을 항일군대에 전수하여, 희봉구전투에서 무극도법을 배운 대도대가 일본군을 근 백명 죽이고, 일본군을 60여리나 추격하여 대포 18문을 탈취한다. 이요신으로부터 무술을 배운 사람은 아주 많다. 경극의 무생태두 양소루(楊小樓)가 연기한 대뇨천궁의 후권과 매란방(梅蘭芳)이 연기한 우희(虞姬)의 검법은 모두 이요신이 전수한 것이다.

 

성흥표국에는 이런 규칙이 있다. "표불함창주". 과거 남북으로 다니는 표거(鏢車)는 흑도이건 백도이건 수로이건 육로이건, 창주를 지나갈 때면, 반드시 표기를 내리고, 조용히 지나가야 한다. 표호를 부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하거나,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크게 당하고 체면을 모조리 잃게 될 것이다.

 

이 규칙의 기원은 성흥표국의 창시자인 이관명이다. 그를 이어 조카인 이봉강, 이경림등 3대가 경영하는 '성흥표국'은 명성이 ㅏ자했을 뿐아니라, 이봉강의 제자는 더욱 유명했다. 그는 바로 원순표국의 총표두인 대도왕오 왕자빈이다.

 

옥수표국은 가경년간에 하북 창주인 장덕무가 창립한다. 그의 외조부인 장경화(張景和)는 강희연간의 유명한 권사(拳師)이다. 강호인들이 "신권교습"이라고 불렀다. 장덕무는 그에게 무예를 배운 후, 소주에서 옥수표국을 연다. 그의 표국은 대강남북을 다녔고, 명성은 해내에 떨쳤다. 한번은 북경으로 표물을 가져갔는데, 좌창덕을 제자로 받는다. 소주로 돌아온 후, 좌창덕의 재주가 뛰어나도 의리가 있어서, 표국을 그에게 넘겨준다.

 

창륭표국은 도광20년에 창립된다. 선통3년에 문을 닫는다. 옥수표국의 총표두 장덕무가 한번은 북경성밖에서 젊은이 한 명을 눈에 들어하여 그의 무예를 전수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 이 젊은이가 누구인가? 바로 산서성 문수현 효자진 거촌 사람인 좌창덕이다. 그는 형제중 둘째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좌이파"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장덕무는 자신의 재주를 좌창덕에게 전수해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면장(綿掌)이다. 면장은 연환면장이라고도 부르는데, 수법은 장을 위주로, 솜처럼 펼치고 운용한다. 동작은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고, 장법은 원을 이룬다.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여 반격하여 면장이라고 부른다. 좌창덕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아침저녁으로 면장을 열심히 수련한다. 한번 연마하기 시작하자 8년이나 연마하여, 무공이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때 젊은이는 이미 26살이 된다. 장덕무의 소개로 소주에서 옥수표국을 연다. 다음 해에 창륭표국으로 이름을 고친다.

 

이때부터 좌이파는 보표생애를 걷는다. 대강남북을 다니며 30여년이 흐른다. 아들인 좌안민(左安民), 손자인 좌병신(左秉信)은 모두 그를 따라 무예를 배우고 표국을 운영한다. 표국의 전성시기에 표사가 일백여명에 달한다. 유명한 표사로는 좌이파, 좌안민, 좌병신, 속인정(續仁政)등이 있다. 그리고 항주등지에 분호를 설치한다. 도광24년(1844년) 좌창덕은 강소순무의 부탁을 받아, 북경으로 비단류를 운송하게 된다. 안전하게 북경에 도착한 후, 도광제는 그에게 황마괘 한 벌, 표기 한 장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명성이 천하에 떨쳐진다. 나중에 좌안민은 부친을 이어 표국을 운영하다가 신해혁명때 표국을 고향으로 철수시킨다.

 

광성표국의 표두 대이려는 자가 의웅(義熊)이고, 아명이 이려(二驢)이다. 산서 기현의 무술세가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찌 이런 아명을 짓게 되었을까? 부친인 대룡방(戴龍邦)이 대씨는 비록 내외에 유명하지만, 위험이 많이 따르므로, 조불보석(朝不保夕)의 느낌이 있었다. 그리하여 산서지방의 풍습대로, 천한 물건으로 이름을 지어준다. 그래야 오랫동안 평안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려가 성공을 거둔 후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너무 우아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같은 발음이 나는 려(閭)로 바꿔부르게 된다. 대이려는 어려서부터 힘이 남달랐다. 부친 대룡방을 따라서 심의권을 수련한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으니, 기술을 모조리 다 익혔다. 대가권의 모든 기술이 그에게 넘어온다. 그는 밤낮으로 익혔다. 그중 오행권, 십대행, 칠소행, 칠포칠방, 대가삼권 및 육합도,창,곤,사파,갑세등 단소타로도 있었다.

 

대가권의 기본공은 "준후후(蹲猴猴)"이다. 이려는 이것을 익히기 위하여 3년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힘을 겨룰 때 한번 발동하면 사람을 이장 밖으로 내칠 수 있었다. 대이려가 유명해진 후, 당시 사점의 산서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돈을 들여서 그에게 사점에 상행을 위하여 표국을 열어달라고 한다. 대이려가 처음에 사점으로 갔을 때, 현지에는 무술명가들이 많이 있었다. 대이려는 그들과 힘을 겨루었는데 이기질 못했다. 그리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3년을 더 익힌다. 그리고 청나라 가경6년(1801년)에 이르러 다시 사점으로 가서 광성표국을 연다. 표국내의 표사는 그의 형인 대대려(戴大閭), 임지(任志)등이 있었다. 표물은 주로 산서, 섬서, 호북, 안휘, 강소, 산동, 하북, 북경, 장가구, 천진등지를 다녔다. 표차에는 표국의 명칭이 적힌 표기를 꽂는데, 가면서 '표국의 이름을 외친다' 그 이유는 첫째, 표국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연도의 강호인사들이 사념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강호인들에 대한 존경도 나타낸다. 당시 하북창주는 무술고향이다. 각지 표국은 창주 무술계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하여, 창주의 경계내에만 들어서면 표국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한번은 광성표국에서 산동으로 표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표사가 규칙을 몰라, 표국이름을 불렀다. 창주 무술계의 윤옥문(尹玉文) 삼무사가 길을 막고 죄를 물었다. 대이려는 여러번 사죄한다. 그러나 삼무사는 그래도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겨루기를 청했다. 대이려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무술을 겨룬다. 그 결과 삼무사는 모두 그의 수하에게 패한다. 이때부터 '대가권'은 더욱 명성을 날린다. 광성표국의 명성은 천하에 떨쳐진다.

 

사점 광성표국은 당시에 석문가 북단로 동쪽에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고 건물이 있었다. "후하(後河)"의 옛 부두를 향하여, 5간의 문두가 있는데, 가운대는 높고 큰 문루이고, 문앞에는 높은 깃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광성기'가 휘날렸다. 안으로는 세번 들어가는 큰 저택이었다. 각각 객청, 첨압방, 창방, 표두거실, 표사거실, 연무장등이 있었다. 사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중 하나였다.

 

청나라 도광3년(1823년) 산서 평요상인들이 가장 먼저 "일승창(日昇昌)", "울성장(蔚盛長)"등의 표호를 만든다. 상업도시 사점도 연이어 "울성장"등 7,8개의 표호분호가 설립된다. 표호에서 발급한 은표는 전국각지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는 상인들이 무역에서 현은을 가지고 다녀야 해서 불안전하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 표국의 업무는 이로 인하여 격감한다. 광성표국은 1830년에 업무를 중단한다. 대이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아들 대광흥(戴廣興)은 사점에 남아서 "과재행(過載行)"을 영업하여 제1대 채주(寨主)가 된다.     

 

동흥공표국은 왕정청이 건립했다. 왕정청의 자는 송암이고, 호는 면왕(麵王)이다. 평요 남양장 사람이다. 청나라 가경 6년(1801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는 사숙에서 2년간 공부를 했다. 그러나 집안이 빈한하여, 16세때 고향을 떠나 북경의 한 국수집(麵館)에서 일을 한다. 왕정청은 손과 어깨로 면을 주물러야 했고, 이를 통하여 남다른 팔힘을 연마한다. 왕정청은 나중에 무술대가 유류(劉留)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간 무술을 익히는데, 진보가 아주 빨랐다. 그후 유류의 사형인 가전괴(賈殿魁)를 스승으로 모신다. 가전괴는 일찌기 도광제에게 무술을 가르킨 스승이다. 가전괴는 왕정청을 아주 좋아했고, 그에게 생활비도 주면서 무술연마에만 열중하도록 한다. 왕정청은 스승으로부터 소림산수 108세등 여러 무예를 익힌다. 동시에 그는 내가고수 상의(常義)와 항상 무술을 절차탁마했다. 3년후, 왕정청은 이미 내외가고수로 성장한다. 왕정청이 30세가 되던 행 강서도대 주문의 무술교련이 된다.

 

36세때, 그는 주문을 따라 하남에 부임한다. 전후9년간, 도적들을 물리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방정부의 치안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도광28년(1848년), 47세된, 왕정청은 강호를 떠나 평요로 돌아온다. 다음 해에 동흥공표국을 연다. 왕정청은 기현의 대룡방, 문수의 이육수(李毓秀)와 함께, "화북삼걸(華北三傑)"이라 불린다. 세 사람은 모두 표국을 운영했다. 그래서 자주 서로 소통했고, 부하들이 함께 표물을 운송하기도 했다. 하남 숭산 소림사는 일찌기 왕정청을 위하여 비각을 새겨 무림사에 기록한다. 아들 왕수무(王樹茂)는 진전을 이어 청출어람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동흥공표국은 창립시부터 전국의 저명한 표국중 하나로 된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치게 되는데, 서쪽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먹고 마시는데 돈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팔월 초아흐레, 서태후와 황제는 평요에 도착한다. 여기서 현은 93만냥을 찾는다. 이렇게 큰 금액을 아무도 감히 황실을 위하여 보표를 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평요의 왕씨만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세에 왕가표대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며 반달여만에 안전하게 서안까지 은량을 호송한다. 지금까지도 왕씨의 옛 저택부지에는 "봉지의서(奉旨議敍)"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황실의 임무를 완성한 후 서태후가 내린 것이다.

 

원순표국의 왕자빈(1844-1900)은 자가 정의(正誼)이고, 회족이며 창주 남문밖의 사람이다. 12살때 샤오빙(燒餠)가게에서 배운다. 자주 성흥표국으로 가서 몰래 무술을 배워 익혔다. 아주 힘들게 익힌다. 나중에 표국의 장궤 이봉양이 그를 발견한다. 그리고 제자로 삼는다. 이봉강은 회족이고 왕자빈은 한족이어서, 기술을 외국인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서서 말을 해주어 왕자빈도 회족으로 바꾸고, 이봉강을 스승으로 모시고, 육합권법을 배운다. 그는 사형제중 다섯째 항열이고, 도법이 특히 정묘하며, 쓰는 칼이 일반칼보다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도왕오(大刀王五)"라고 불렀다.

 

대도왕오는 강호를 돌아다니며, 널리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사귄다. 이것이 바로 원순표국을 창업한 주요 밑천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전문밖 서반벽가 13호원은 바로 대도왕오의 원순표국이 있던 곳이다. 대도왕오의 후손에 따르면, 원순표국의 정문은 원래 주칠대문이었다. 오런쪽에는 행황기가 걸려 있었는데, 위에는 "원순표국"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문의 동쪽벽에는 "덕용감화(德容感化)"라는 금자편액이 있고, 서쪽벽에는 "의중해참(義中解驂)"이라는 금자편액이 걸려 있었다. 대문의 안에는 "상무(尙武)", "제빈(濟貧)"이라는 두개의 작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 몇 개의 편액은 북경성의 백성들이 대도왕오의 경재중의(輕財重義), 제곤부위(濟困扶危)의 정신을 기려서 걸어준 것이다. 전체 표국에는 전원, 후원과 서과원이 있고, 모두 30여간의 건물이 있다. 전원에는 대거붕, 마방과 창방이 있고, 왕오의 가족과 귀중화물을 놓아두는 곳은 모두 후원에 있다. 서과원은 여러 표사들이 연무하는 곳이다. 연무하는 곳에는 도, 창, 검, 극등 장단병기와 석쇄(石鎖), 모래주머니(沙土口袋)등 무술연마에 필요한 기계가 놓여있었다.

 

광서26년(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온다. 북경성내에는 살인방화가 모두 일어나고,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대도왕오는 분기탱천하여, 침략군에 맞서 싸운다. 전문밖의 호성하가에서 적과 전투하던 중에 총알을 맞고 희생한다.

 

대도왕오가 죽은 후, 원순표국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봉,경한철도가 완공된 후, 상인들의 화물운송은 대부분 기차역에서 짐을 부치는 것이 되었다. 이때부터 원순표국의 업무는 철로에 빼앗긴다. 개략 광서30년(1904년)에 원순표국은 영업을 중단한다.

 

삼합표국은 산서 유차현 동양진 사람인 안진원이 창립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청왕조 중기, 8명의 소림사의 명사들이 문파관념을 버리기 위하여 공동으로 무예를 익히고, 태국, 팔괘, 형의, 소림, 통비, 응조, 육합, 금나등 여러 문파의 정화를 모아서, 일문의 권술을 공동으로 논의(共議)한다. 그리하여 이름을 공의권(公議拳)이라 칭한다. 공립권(公立拳)이라고도 부른다. 안진원(1850-1927)은 공의권의 제5대전인이다. 청나라 광서연간에 안진원은 하북 장가구에서 '삼합표국'을 만들어 널리 무림고수와 사귀고, 이 권법을 각지에 전파한다.

 

만통표국의 창시자는 유명한 '단도리' 이존의이다. 이존의의 원명은 이존의(李存毅)이다. 자는 숙당(肅堂)인데, 나중에 존의(存義)로 개명한다. 자는 충원(忠元)이다. 청나라 도광27년(1847년)에 태어났고, 하북성 심현 남소영촌 사람이다. 성격이 온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시했다. 성격은 권술을 좋아했다. 어려서 장단권을 배운다. 38세때, 형의권의 명사 유기란(劉奇蘭)을 스승으로 모시고, 형의권을 배운다. 여러해를 배운 후, 형의권의 정수를 얻는다. 이후 북경의 동해천이 팔괘장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북경으로 가서 동해천을 스승으로 모신다. 그는 정정화(程廷華)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래서 정정화에게 부탁하여 동해천을 스승으로 모신다. 동해천은 이존의가 형의권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아서, 처음에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나중에 정정화, 유봉춘, 양진포등 팔괘장의 제자들이 계속 부탁하는 바람에 동해천도 이존의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일찌기 양강총독 표파총을 역임하고 나중에 보정에서 만통표국을 열었으며 제자들을 거두여 무예를 전수했다.

 

1900년 이존의는 53세의 고량으로, 의화단에 투신한다. 손에는 단도를 들고 전투에 나서 외적과 싸운다. 서양의 총과 포에 맞서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적을 죽였다. 천진노룡두 기차역전투에서 그는 서양병사 십여명을 죽여서 중원에 명성을 날린다. 일시에 '단도리'의 명성이 퍼져나간다. 말년에는 표국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거두어 가르친다. 선통3년(1911년), 섭운표와 천진에서 중화무사회를 창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