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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네 가지 차이점을 논하다

by 중은우시 2013. 6. 16.

글: 삼문치(三文治)

 

옛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미치지 않았다면 소년시절을 헛되이 보낸 것이다(人不痴狂枉少年)" 그래서, 그 젊은 세월에 나는 무협지를 읽었다. 무협을 읽지 않은 소년은 미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십여년동안 책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허구세계에서 노는데 습관이 되었다. 일김일고(一金一古), 한 명은 대협(大俠)이고 한 명은 낭자(浪子)이다. 지금까지 이 두 사람의 무협세계는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마치 초나라와 한나라와 같이. 김파와 고파로 확실히 나뉜다. 무협지를 읽는 사람이라면 보통 입장이 분명하고, 선을 확실히 긋는다. 모호하고 흔들리는 중간인은 아마도 돌을 맞아 죽을 것이다. 그것도 참혹하게.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작품을 모두 좋아하며, 좋아하는 정도도 비슷하다. 만일 억지로 나누라고 한다면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돌을 맞을 각오를 하고, 김고합파(金古合派)의 글을 한번 써보기로 한다. 두 사람이 같은 관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였다는 점을 얘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1. 인물

 

김용 선생은 전통적인 사람이다. 소설을 쓰는 것도 법도에 맞게 쓴다. 책에 나오는 많은 인물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자주 독자들에게 얇은 책장에서, 세상 일을 알지 못하던 순진한 아이가 점점 성장하면서 갖은 고난을 겪고, 마침내 정천입지(頂天立地)하는 절세영웅이 되고, 협지대자(俠之大者)가 된다. 책 한권을 다 읽고나면, 마치 하나의 인생을 산 것같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탄식과 감탄을 하게 된다. 근홍묘정(根紅苗正)의 곽정(郭靖), 고오불기(孤傲不羈)의 양과(楊過), 그리고 고령정괴(古靈精怪)의 위소보(韋小寶)....모두 일찌기 장난꾸러기인 어린아이였고, 김용의 붓끝에서 점점 성장했다. 우리는 그들의 성장을 목도하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성장했다.

 

김용의 인물은 모두 내력과 배경이 있고, 사문이 있다. 그리고 하나같이 스승을 존경하고 가르침을 중시하는 착한 아이들이다. 곽정과 양과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모범생이다. 대리국이 단공자는 신산저저의 옥상에서 천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심지어 나태하게 자란 위소보마저도 구난사태의 앞에서 감히 일을 벌이지 못했다(비록 그가 스승으로 모신 목적은 아주 불순했지만). 영호충의 악불군에 대한 존경정도는 거의 바보라고 느낄 정도이다. "하루를 스승으로 모시면, 평생 부친처럼 모신다(一日拜師, 終身爲父)" "좋은 스승에게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 좋은 장인이 아름다운 옥을 깍는다(名師出高徒, 良匠琢美玉)". 이러한 고전적인 관념은 김용에게는 뿌리깊은 것이다.

 

고룡은 '반전통'적인 사람이다. 전복과 혁신은 그가 집착하며 나아갔던 방향이다. 그의 붓끝에서 만들어진 인물은 어린 시절도 없고, 내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사부도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어느 장 어느 페이지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게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것이다. 남는 것은 독자들이 스스로 상상해야하는 것이다.

 

그 신비로운 인물이 고룡의 책에서 나올 때면, 나오자마자 바로 누군가와 최고를 다투고, 만인이 앙모하고,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고, 고고한 기질과 준미한 눈썹, 시원시원한 웃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 동작 하나하나 눈썹을 휘날리고 말을 꺼낼 때마다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책을 뒤적일 필요도 없이, 눈만 감으면, 이심환(李尋歡, 한국에서는 '비도탈명'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유심환, 유탐화라는 이름으로 나왔음)의 그 바닷물같은 눈동자, 파도와 같은 입술에 떠오르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초향수(楚香帥, 초류향)의 코를 만지는 그 전형적인 동작도.

 

"무초승유초(無招勝有招)"는 고룡의 독창이다. 그가 쓰려는 무공은 소위 초식이 아니라, 일종의 의경(意境)이다; 그가 고수의 대결을 쓸 때는 승리하는 요소는 초식이 아니라, 기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고룡식의 무공은 이심환의 비도, 초류향의 화학이거(化鶴而去)할 수 있는 현묘한 경공, 육소봉(陸小鳳)의 뭐든지 잡을 수 있는 영서지(靈犀指), 서문취설(西門吹雪)의 검 위에 점점이 천천히 떨어지는 은홍색의 핏방울....

 

고룡식의 무공은 김용식의 실재에 미치지 못한다. 아주 모호하다. 그러나 아주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시와 같고, 음악과 같다. 석양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의 빛나는 광망과도 같다.

 

책에서 일찌기 우리를 빠지게 만들었던 남자들은 바람과 같이 신비하게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그들은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시 올 것같지도 않다. 단지 현재, 가장 완벽한 현재이다. 그들은 가장 완벽할 때 그들의 가장 완벽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충실한 청중이고, 자주 우리는 들으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한다. 이야기는 끝나고 그들은 소매를 떨치며 떠나갔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한순간 나타나는 현란한 무지개와 같았다. 조금 후에는 먼 곳에서 사라진다.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룡의 무협은 바로 성인의 동화라고. 현실에서 어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시절도 없고, 쇠락하여버린 노년도 없이, 그저 가장 찬란한 시절만 있을 수 있겠는가? 단지 활짝 핀 것만 있고, 말라서 떨어지는 것은 없다. 살아서는 여름의 꽃과 같고, 죽어서는 가을의 잎과 같다. 만일 이렇게 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 애정

 

애정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다. 모든 문학작품의 영원한 주제이다. 무협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김용이 쓴 애정은 첫사랑이다. 수정처럼 순진하고 투명하다. 보는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매림호의 가에서, 곽정이 처음으로 여인모습을 한 용아(蓉兒)를 만났을 때, 그 질박한 소년은 멍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애정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그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쁨을 느꼈을 뿐이다. 그 시그러운 영웅대회에서, 소룡녀(小龍女)는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부끄러움에 양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곽정에게 말한다: 과아(過兒)는 당신의 딸을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과아에게 시집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에 비친 달처럼 깨끗한 여인의 그렇게 청정무구한 마음. 책을 읽는 사람은 저절로 웃으며 감동을 받게 된다.

 

아마도 자신도 감동받았던가보다. 그래서 김용은 사랑을 이루어준다. <사조영웅전>에서 곽정과 용아를 맺어주었고; <신조협려>에서는 소용녀와 16년간 마음을 바꾸지 않은 양과를 맺어주었다; <소오강호>에서는 시원스럽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영호충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던 임대소저를 맺어준다. 당연히 <천룡팔부>에서도 천산만수를 넘어 결국은 고정(枯井) 바닥이 더러움 가운데 바라던 대로 대리의 단옥과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여긴 왕어언(王語嫣)을 맺어주었다.

 

희극이 있으면 비극도 있는 법이다. 교봉은 아무런 의문없이 말할 수 있다. 그는 김용의 책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비극영웅이다. 그의 생명, 그의 애정은 모두 심각한 비정이다. 그 큰 비가 쏟아붓던 밤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때려죽인다. 번개가 하늘을 지나갈 때, 그의 차갑고 뼛속을 시리게 하는 아픔과 절망을 비춘다. 그때부터는 영원한 적막이다. 아자(阿紫)는 그의 발걸음을 뒤쫓으며, 계속 부른다: 자형, 자형. 그의 마음은 반석과 같다. 안문관 밖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송.요의 화평을 얻어낸다. 아자는 그를 안고 소리친다: 자형. 자형. 이제야 말을 잘듣는군요. 내가 안고 있는데도 밀어내지 않다니. 그렇다. 이 것이 가장 좋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을 비처럼 흘렸고, 손에 쥔 책을 적셨다.

 

만일 김용의 애정은 소년의 사랑이라면, 고룡의 애정은 성인의 세계이다.

 

고룡이 애정관은 영원한 것이나, 끝까지 서로 기다리는 것같은 류의 개념은 없다. 아마도 그렇게 굳건한 애정이 있다고는 아예 믿지 않는 것같다. 아마도 그는 비극이 더욱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간에, 고룡의 책에서 애정이 결말은 대부분 이별이다. 생이별이든 사별이든.

 

이심환은 임시음(林詩音)을 용소운(龍嘯雲)에게 넘겨주고 떠나간다. 이때부터 그와 함께 하는 것은 한 병의 술, 한 자루의 칼, 그리고 나무조각이다. 그 많은 임시음은 그저 생명이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일뿐이다. 소리비도(小李飛刀)는 더욱 많은 경우에 손안의 나무를 조각하는데 쓴다. 그의 마음을 조각한다. 한칼 한칼의 아픔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임시음의 고통은 또 누가 알 수 있으랴.

부홍설이 취농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이다. 취농이 떠남으로 인해 그는 칼을 뽑을 힘조차 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하여, 그는 취농을 버리고, 고통을 참고 홀로 간다. 비록 결국 그는 다시 취농을 안을 수 있었지만, 마침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기실 취농이 죽지 않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부홍설을 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원한은 사랑보다 깊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별은 각골명심이다. 피차간의 생명속에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조금만 부닥치면, 바로 파열된다. 처절한 피가 흐른다.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누가 한가로운 정은 버린지 오래되었다고 말하던가. 매번 봄날이 오면, 슬픔은 예전과 같이 여전하다."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떠난다. 그래도 상처는 있고 그리움은 있다. 그저 짧은 기간의 상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초류항, 육소봉 그들은 나비와도 같은 영혼을 지닌 남자이다. 영원히 새로운 꿀을 찾아나선다. 영원히 하나의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 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아름다운 여인 석수운은 초류향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후 그녀는 스스로 떠난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와 하나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억지로 그를 붙잡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혹은 반드시 너를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는 불행할 것이다."

빙설과 같이 총명한 여자인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가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 속에 씻겨지지 않을 기억을 남기는 것이라는 것을.

고룡이 애정은 나로 하여금 허외(許巍)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먼 곳을 향하여 혼자서 걸어가는 낭자(浪子, 떠돌이)이다. 너는 망망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나의 여인이다..." 아마도 모든 낭자(浪子)의 뒤에는 여인이 있나보다. 기꺼이 그를 지켜주고 눈물을 흘려주고, 꽃을 피우려 한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하여 말라간다. 어떤 때는 한 명이 아니다.

 

3. 우의

 

대담하게 말하자면, 김용은 우의에 대하여 쓰지 않았다. 그의 책에서, 한가지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간담상조(肝膽相照)이다. 이 단어는 친척이나, 애인간이 아니라, 단지 친구간에서 있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사이에.

 

곽정은 몽골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는 톨루이(징기스칸의 막내아들)와는 안다의 관계를 맺었고, 그 정이 형제와 같았다. 징기스칸이 송나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곽정을 죽이려고 하자, 톨루이는 부친의 명을 어기고, 말을 끌고와서 돈까지 집어주며 곽정이 남쪽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들의 우의는 아마도 완벽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중에 곽정은 양양을 지키게 되고, 병력을 이끌고 송군을 공격하는 몽골의 총사령관이 톨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죽이려는 생각을 품는다. 비록 국가존망의 대계를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생사지교인 친구를 대하는 것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곽정은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을 보자. 양과의 생명 속에, 소룡녀와 다른 몇몇 소룡녀와 용모가 비슷한 여자들을 제외하고 동성의 친구는 하나도 없다. 만일 억지로 게산해서 넣어준다면 신조(神雕)가 있을 뿐이다. 영호충은 비록 성격이 광야무기(狂野無羈)하지만, 전백광, 향문천등과 잘 지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뿌리깊은 정사(正邪)의 구분이 있다. 이처럼 마음 속에 거리낌이 있으면, 간담상조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시 교봉을 보자. 단옥과 허죽행이라는 두 명의 의형제가 있다. 그러나 같이 지낸 시간이 길어지자, 더 이상 공동언어가 없고, 느낌은 그저 데면데면해졌다.

 

만일, 김용의 소설속에서 우정에 집착한 사람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바로 위소보이다.

 

위소보는 절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여춘원에서 태어난 무뢰배이다. 바람이 부는대로 흘러가고, 양면삼도에 재물과 여색을 탐하고, 궤계다단(詭計多端)이다. 그는 책을 읽은 적이 없고, 공맹의 도도 모른다. 대인대의도 모른다. 그는 단지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 그것은 바로 친구를 배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때문에 위소보는 고통스럽게 오갔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기 힘들어했다. 한편에는 그와 함께 씨름을 하고 같이 점심을 먹던 소현자(小玄子, 강희제 현엽)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느 그를 신뢰하고 인정해주며 그가 하자는대로 해주는 천지회 형제가 있다. 그는 어느 한 쪽도 배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저 온갖 머리를 짜내어 대응할 수밖에 없다. 실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한마디 욕을 해댄다: "XXX, 나 안해. 어느 배도 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소매를 떨치고, 7명의 꽃처럼 옥처럼 아름다운 마누라와 큰 돈을 가지고 양주로 모친을 만나러 간다.

 

위소보는 영웅이 아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민족대의는 없다. 국가존망도 없다. 그는 그저 양심에 꺼리지 않고, 친구에게 미안하지 않는 것만 안다. 원래 사람들이 욕하는 겁쟁이의 행동을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인데, 이런 뺀질이의 행동이 아주 귀엽게 느껴진다.

 

김용과는 달리, 고룡의 우정은 아주 격정적이고 감동적으로 쓰여진다. 심지어 그의 붓끝에서, 우정은 이미 아무도 초월할 수 없는 높은 봉우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이심환과 아비(阿飛)가 그들이다.

 

"마차에 타라. 내가 너를 데려다 주겠다." 이 따듯한 말은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 큰 눈이 온 하늘에 내리는 엄동설한에, 따스한 향을 풍기는 술과도 같고, 이렇게 하여 한 낭자의 생명은 따스해진다.

 

아비는 흑사(黑蛇)를 죽이고, 그는 50냥은자를 얻었다. 그는 이심환에게 말한다: "내가 술한잔 사겠다."

 

나중에 주화건이 친구라는 노래를 부른 것을 들었다: "한마디 말, 한 평생, 앨생의 정, 한잔의 술." 순간에 지나가는 황홀함. 눈앞에서 흐르는 물처럼 흔들리며 두 사림이 탄 마차안에서 한잔 한잔 술을 마시는 모습, 영화와 같은 진실이고, 마음 속에는 따스한 감동이 온다. 버드나무가지가 봄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본다.

 

이심환은 한번도 남에게 부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 그는 여봉선에게 부탁한다. 두 번이나 부탁한다. 한번은 그에게 아비와 한번 겨뤄주어 그가 다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두번째는 그에게 임선아(林仙兒)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아비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쉽게도 여봉선은 임선아를 죽이지 못했다. 아마도 이심환을 제외하고, 그 어느 남자도 임선아를 죽일 수 없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가 그를 평생 미워하지 않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제63장은 제목이 <단의(斷義)>이다. 검끝보다 날카로운 두 글자로 보는 순간 가슴이 흔들린다. 아비는 말한다: "이후, 너는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지금 그녀를 찾으러 가겠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녀를 찾겠다. 너는 나를 따라오비 말라. 절대로 따라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떠났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심환은 정말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기침을 한다. 각혈은 그의 옷소매를 적신다. 그 순간 나는 아비를 깊이 미워했다. 그 멍청한 자식을.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이심환은 정말 아비를 잘못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깨닫는다" 그는 이심환을 구하러 간다. 그의 검은 이미 없었다. 그러나 검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아비이다. 그는 그의 가장 좋은 친구를 구하러 갔다. 그래서 죽검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죽검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1촌 두께의 철문은 뚫을 수 없다. 아비의 검이 그 죽음과도 같이 차갑고 고요한 문을 잘랐을 때, 모든 사람은 절망한다. 만일 이심환이 죽었다면 아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하기도 싫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생각하기 싫을 것이다.

 

이심환은 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아직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랑도 있고, 당연히 희망도 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을 열었고, 걸어나갔다.

 

나는 생각한다. 고룡은 분명히 미소짓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말을 적으면서. 얼마나 좋은가?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고, 그 후에 각자의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후에 어느 곳에선가 만나서 계속 술을 마신다. 아마도 그 날도 눈오는 날일 것이다. 큰 눈이 휘날리며 그들의 머리 위에 내릴 것이다. 술잔 속에는 아름다운 매화꽃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친구는 평생 함께 간다. 한 마디 말, 한 평생, 일생의 정, 한잔의 술....

 

4. 강호

 

강호가 무엇인가? 강호는 어디에 있는가?

 

강호는 무협이 뿌리를 밖고 싹을 틔우는 옥토이다. 강호가 없으면, 그 재미있는 무협이야기도 없다.

 

김용의 강호는 군체(群體)의 강호이다. 대기(大氣)의 강호이다. 책 한권에서 십여명, 수십명. 심지어 백명이상의 사람들이 호호탕탕하게 그들의 강호에 모여 있다. 그 후에 어느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살기 힘들고, 심지어 국가가 곧 망할 지경인 역사배경하에서 침통하고 비장하고 장엄한 색채를 덧칠한다. 영웅은 바로 그런 환경하에서 생장하고, 자강불식(自强不息)에 상창수청(上蒼垂靑)을 더해서, 마침내 절세고수가 탄생하고, 소오강호한다. 그 후에 창생을 구하고, 여민을 구원한다. 국가가 망하려는 시기에 흐름을 바꾸어 외적의 침입에 저항하고, 비장하고 칭송할만한 사업을 벌이게 된다.

 

김용의 강호는 기세가 대단하다. 설사 아무런 역사배경이 없는 <소오강호>라고 할지라도, 이 네 글자 자체가 주체를 승화시킨 것이다. 금과 소의 합주인 소오강호 한 곡이 청산취곡의 사이에서 돌연 울려퍼기고, 맑은 소리는 은은하게 멀리까지 퍼진다. 정사의 사이에서 반석과도 같이 단단한 질곡은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분쇄된다. 사람이 살면서 지음을 얻으면 구천의 아래에서도 웃을 수 있다. 이같은 풍광의 호연한 흉금에 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김용의 강호는 대아(大我)의 강호이다. 짙은 비장함의 주기조를 지니고 있다. 고대그리스의 비극과도 같이 광세의 영웅호걸을 만들어낸다. 위국위민, 협지대자(爲國爲民, 俠之大者). 이 여덟글자는 김용의 강호를 개괄한다.

 

고룡의 강호는 자신의 전장이다. 그는 대시대를 쓰지 않는다. 대영웅을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람을 쓴다. 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인성(人性)"이 바로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자신이 창조한 강호에 놓아둔다. 그 후에 엄격한 부친의 눈빛으로, 그들이 잔혹한 환경하에서 힘들게 생존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도광검영의 가운데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고통, 높은 봉우리에서 홀로 우뚝 선 것도 보고, 깊은 계곡에서 몸부림치는 것도 본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본다. 그 후에 그들의 힘든 역정을 기록하고, 생명체험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소십일랑(蕭十一郞)은 천지간에 홀로 간다. 나는 그가 낮게 읊는 것을 듣는다: "인심연양(人心憐羊), 낭심독창(狼心獨愴), 천심난측(天心難測), 세정여상(世情如霜)" 철두철미한 한랭을 노래한다. 부홍설은 밤에 걸어온다. 창백한 얼굴, 칠흑같은 눈, 창백한 손, 칠흑같은 칼. 그의 눈은 시종 전방을 본다. 그의 손은 시종 칼을 쥐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아주 힘들었고, 아주 멍청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고룡의 붓끝에는 이런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적막하고 고독하고,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소인물이다. 무슨 큰 계획이나 큰 뜻이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견지해낼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의 생명뿐이다.

 

고룡의 강호는 너무나 많은 피비린내와 잔혹이 있다. 도광검영이 있고, 함정이 겹겹이 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분신쇄골이다. 고룡은 조금도 그의 아이들을 마음아파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전쟁터이다. 모든 위험은 자신이 직면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생명의 댓가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룡의 책에는 너무나 많은 어두운 것이 있다고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룡은 사람이 선량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믿었다. 예를 들어, <절대쌍교>에서 그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람의 본질은 좋은 것이다. 아무리 악랄한 환경에 처해지더라도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는다.

 

소어아(小魚兒)는 악인곡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도교교가 바라는 것처럼 '세강제일의 대악인'이 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약간 장난끼있고 약간 나쁠 뿐이다. 장난을 좋아하고, 사람을 놀리기 좋아할 뿐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 화무결(花無缺)은 요월영성(邀月怜星)의 교육에도 감정이 없는 천년견빙이 되지도 않았고, 그는 침정고귀(沈靜高貴)하고, 청아무진(淸雅無塵)하며, 함축내렴(含蓄內斂)하여 진정 '무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성장한다.

 

요월영성이 17년간이나 기획한 그 형제간의 싸움이라는 참극도 끝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들은 결국 함께 만나서 뭉친다. 연남천이 이 쌍둥이를 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고룡 선생은 아마도 싱긋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득의만면하여 선포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은 모든 사악을 이길 수 있다.

 

고룡의 강호는 소아(小我)의 강호이다. 사람의 강호이다. 혈우성풍이 있고, 풍광제월이 있고, 함정이 있고, 음모가 있고, 사악이 있다. 그러나 진정도 있고, 꿈도 있고, 친구도 있다.

 

아마도 이런 강호가 더욱 진실할 것이다.

 

이미 누렇게 되어버린 책을 덮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점점 멀어지고, 익숙한 얼굴도 점차 모호해지지만, 우연히 생각날 때마다 우리를 웃음짓게 한다. 고룡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고, 김용은 이미 강호에서 붓을 꺾고 금분세수했으며, 편안하게 예지있는 학자로 지내고 있다. 무협의 대막은 그들의 뒤에 화려하게 내려왔다. 이제는 적막만 남았다.

 

무혀을 읽지 않으면 소년시절을 미치지 못한다. 지금 나는 청춘의 꼬리 위에 있다. 글을 한번 써본 것은 그저 기념하기 위함이다. 이전의 무협을 기념하고 지나가버린 세월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