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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상업시대의 무림문파: 공동

by 중은우시 2012. 4. 23.

출서: 간천하

 

현대사회에 한 문파의 장문인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여러 명이 경쟁에 참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공동파의 백의해는 세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신물감정, 동문선거 및 비무

 

"현재는 조화사회이다. 비무를 제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해야한다면 나는 용감하게 맞이할 것이다." 40세가량된 백의해는 스스로 자신의 사부이자, 공동파 제10대 장문인인 연비하(燕飛霞)의 진전(眞傳)을 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경쟁상대방중 한 명은 그의 사모(師母)인 일본여인 갑비목자(甲斐睦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사질(師姪)인 진호(陳虎)이다.

 

그가 다투는 장문인의 자리는 얼마나 대단한 자리일까? 공동파는 확실히 유구한 역사를 지닌 것일까, 아니면 소설에 의존하여 그저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현재의 장문인 다툼의 시비은원과 마찬가지로 오리무중이다.

 

무협에 나오는 공동파는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의 소설 <강호기협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공동파는 거기서 주력문파이다. 환주루주의 <촉산검협전>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역할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파를 잘 알게 된 것은 김용의 <의천도룡기>이다. 공동파의 칠상권(七傷拳)은 소설에서 대단한 무공으로 나온다.

 

"나는 일찌기 공동파의 역사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해봤습니다. 이것은 원래 역사전승이 없던 문파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본 <난주신보>의 편집인의 말이다. "이 문파는 중화민국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아무런 증빙도 없다. 지방지에조차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1980년대 김용소설이 대륙에 소개되면서, 자칭 공동파 장문인이라는 무술가 연비하가 매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공동파의 역사는 바로 연비하로부터 시작된다. 이 역사는 거의 그의 구술에 의한 것이다.

 

연비하는 동북사람이고 본명은 왕진(王進)이다. 2005년에 사망한다. 1985년, 무술잡지 <정무>에서 연비하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무림침주>라는 글에서 연비하는 공동파의 역사를 설명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동파는 당나라중엽에 비홍자(飛虹子)가 감숙성 평량 공동산에서 창시한다. 그는 제10대 장문인이다. 제4대 장문인으로부터 공동파는 공동산을 떠나게 된다.

 

당나라중엽에서 중화민국까지는 14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거의 15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공동파에는 단지 10명의 장문인만이 나타난다. 장문인이 없던 때에는 문파가 어떻게 전승되었는가? <무해침주>라는 글에서는 더 이상 추가적인 설명이 없다.

 

"공동파는 대(代)마다 장문인이 있던 것은 아니다." 공동파 제11대 장문인이라는 갑비목자 여사는 이렇게 섦여한다. 그러나 장문인이 없는데 어떻게 전승되었는지에 대하여 갑비목자는 아무런 해명도 해주지 않았다.

 

연비하는 <정무>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7살때 공동파 제9대 장문인인 호혜민(胡惠民)을 만나서 무공을 배웠다고 한다. "연선생은 무학기재이다. 17세때 공동파의 의발을 전수받아 공동파의 제10대 장문인이 된다. 그리고 1956년 전국무술경기 1등을 하고, 1957년 버마무술대회에서 5개 종목 우승을 차지한다." 공동파 제자이며 공동문무학교 교련인 진호의 말이다.

 

호혜민은 이미 죽었고, 연비하가 어떻게 공동파무공을 익혔는지는 이미 확인할 길이 없다. "1956년에 전국무술대회는 절대로 없었다. 1957년 버마의 세계무술대회는 더더구나 없었다." 무술사연구에 종사하는 기남대학 교수 겸 저명한 무술가인 마명달(馬明達)의 말이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가는 무술을 정돈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무런 대회도 개최하지 않았다."

 

그후, 연비하는 전국각지에서 무술을 가르치며 살았다. "1987년 나는 광저우에서 처음으로 연사부와 만났다. 당시 그의 경제상황은 아주 좋지 않았고, 고정된 거처도 없어, 제자의 집에서 살았다." 일본 외교관집안출신인 갑비목자는 연비하의 제자를 통하여 소개받아 연비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동파 무공을 익힌다.

 

영어, 독일어에 정통한 갑비목자는 원래 일본에서 독일어 통역일을 했다. 그의 부친은 일본외교관이고, 가보에 나오는 성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일본 제1대천황때부터이다.

 

갑비목자가 처음 연비하를 보았을 때, 연비하는 말을 하면서 눈을 깜빡이지 않아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북경, 상해, 대만등지에서 많은 유명한 무술교련을 만났다. 그러나 그처럼 사람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는 무술교련은 없었다." 그녀는 연비하가 진정한 무술가라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두 달동안 배운다.

 

1990년 3월, 갑비목자는 다시 광주로 가서, 연비하로부터 무술을 배운다. 두 사람은 같이 연공하고, 같이 식사한다. 갑비목자는 연비하를 알게 되면 될수록 강렬한 의문을 품게 된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왜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을까?" 갑비목자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얘기한다.

 

두 달후의 어느 날, 연비하는 돌연 갑비목자에게 말한다: "너는 이렇게 공동무술을 좋아하니, 나의 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이렇게 직접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갑비목자는 회고한다. 결국, 그녀는 연비하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그해, 갑비목자는 38살이고, 연비하는 50살이다. 1990년 6월,그들은 중국에서 결혼증을 받는다.

 

"연사부는 나에게 말했다. 국내에서 공동무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큰 장애가 있다고. 그는 환경을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1990년 8월, 갑비목자는 연비하를 일본으로 이민하게 도와준다. 동경의 신주쿠에서 공동무술을 가리킨다. "일본은 땅갑이 비싸다. 우리같이 무술을 가르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모두 장소를 빌려서 한다." 그들이 가장 자주 빌린 곳은 신주쿠 다카다경마장의 체육관이다. 3시간 빌리는데 1만엔이다.

 

연비하는 일본에서 점점 명성을 얻는다. 1990년 10월 9일, 아사히신문의 산하에 있는 <AERA> 잡지는 <재미있는 중국전통비술 - 부패와 우산을 사용하는 현대 손오공>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연비하를 소개한다. 이 보도는 그들이 유명해지게 해주었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우리의 월수입은 50만엔가량이 되었다." 갑비목자의 말이다.

 

일본에서 뿌리를 내린 연비하는 국내에서도 기회를 맞이한다.

 

1980년대부터, 평량 정부는 공동파무술을 발굴하여, 현지의 문화브랜드로 삼으려 한다. "당시 평량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완전히 계통이 없었다." 공동무술연구회 회장인 왕표의 말이다. 이 일을 책임진 공동산관리국은 <무술침주>라는 글을 발견하고, 글의 작가를 통하여 연비하부부와 연락한다. 그리하여, 1994년 그들을 평량으로 초청한다.

 

정부가 글 하나를 가지고 한 문파의 전승을 인정했는가? "평량에서 연사부는 공동무술을 시연하여, 그들을 믿게 만들었다." 왕표의 말이다. 연비하는 동시에 <중국체육사학회>가 발급한 증명서신을 내놓는다. 증명서신의 원문은 이렇다: "우리 단위는 관련 단위의 사실확인을 거쳐, 왕진, 예명 연비하는 확실히 중국 공동파 제10대 장문인이다." 1989년 1월 24일자로 발급된 이 증명서신은 "중국체육사학회"의 인감이 직혀 있어, 현지정부는 공동파의 전승과 연비하의 지위를 확인해준다.

 

중국체육사학회는 체육총국 문체발전중심의 한 연구기관이다. "중국사학회는 직능부서가 아니고, 이 방면의 권위자는 당연히 중국무술협회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우리는 중국체육사학회라는 인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중국과학협회 체육사분회'라는 것이다. 나는 1990년 중국체육사학회에 들어왔다. 내 생각에 이 증명서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학회의 주임인 최낙천이 기자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94년 평량에 가서, 연비하는 현지에서 10명의 제자를 받는다. "백의해 외에, 다른 사람은 기자, 화가등이고 무도 권법을 연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갑비목자의 말이다. 그 후, 연비하와 갑비목자는 다시 평량을 세번 방문한다. 그리고 2003년에 왕표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기실 현지정부는 연비하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민간에서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 공동파의 전파는 정부가 주도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갑비목자의 말이다.

 

아미, 청성, 무당과 달리, 공동파의 발전은 현지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서 이뤄졌다. 연비하의 전승을 확립한 후, 정부는 공동무술에 대거 투자한다. "2009년, 공동구정부는 2300만위안을 투자하여, 공동문무학교를 설립했고, 내가 교장을 맡았다." 왕표의 말이다. 이 무술학교는 국내 최초의 공립무술학교이다. 공동구 교육국 직속이다.

 

"우리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공동무술학교에) 그들은 정부 것이지 않습니까?" 사립무술학교를 운영하는 아미파 장문인 왕건의 말이다.

 

2010년부터, 공동산 관리국은 관광객들에게 무술양생 상품을 보급한다. "만일 관광객이 김용 소설의 공동무공에 흥미를 나타내면, 우리는 그에게 2,3일 가르치고, 300-500위안을 받는다." 왕표는 일찌기 소림기공을 수련한 바 있고, 공동무술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자신을 관리역할이라고 말한다.

 

현지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공동무술학교는 공동무술교육집단과 국제공동무술전파센터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한다: "5년내에, 학생수는 2천명을 목적으로 한다." 왕표의 말이다.

 

이들 목표의 기초는 공동파전승의 합법성 및 공동브랜드의 통일이다. 그러나 공동파 브랜드는 2005년 연비하가 사망한 후 심각한 분열을 맞이한다.

 

2005년, 연비하가 폐암으로 병사하자, 공동파는 장문쟁탈전이 벌어진다.

 

연비하가 죽은 후, 활동범위가 주로 광동 동관이었던 백의해는 자신이 제11대 공동파 장문인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공동파의 전파대인(傳派大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부가 2004년 병석에서 나에게 준 것이다." 백의해의 말이다.

 

"그 대인은 그 자신이 만든 것이다." 갑비목자의 말이다. "나는 연사부의 쿵푸를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다. 연사부는 많은 동영상을 남겼다. 나는 모든 초식을 배웠다. 나는 이것이 바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파의 장문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연사부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공동파 초식을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다. 너는 이 문파의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연비하가 직접 쓴 임명장을 보여준다. 임명장에는 그녀를 공동파 제11대 장문인으로 한다고 쓰여 있다. 낙관은 '공동파 제10대 장파대종사(掌派大宗師) 연비하"로 되어 있다.

 

"갑비목자라는 일본인은 우리 국가의 무술유산을 훔쳐갔다.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은 공동파무술을 국내에 남기는 것이다" 3월 23일 오후, 성도 낙대진에서 무협문화제에 참가한 백의해는 이 일본장문인을 언급하며 극히 분노했다. 그는 전통의상을 입고 용모가 단정했다.

 

"갑비목자는 그저 연사부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할 뿐이다. 일본에서 공동파무술을 가르키는 모든 돈은 그녀의 손에 들어간다. 연사부는 공동 현지에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자 했지만 그것도 못했다." 백의해의 비서장인 항해흠의 말이다.

 

바로 백의해와 갑비목자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2010년, 공동파에는 세 번째 장문인이 등장한다. 당시 <난주신보>에 <공동장문인 전승분쟁>이라는 글이 실린다. 글에서 공동파 전인인 진호가 8월 21일, 공동파 제12대 장문인을 이어받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후 갑비목자는 <난주신보>에 성명을 발표하여, 진호의 장문인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진호는 2009년에 받아들인 제자이고, 2010년 내가 평량에 갔을 때, 왕표가 일찌기 나에게 진호를 다음 번 장문인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떠난 후, 그는 기자회견때 자신이 이미 장문인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진호가 제12대 장문인에 취임했다는 증거는 갑비목자가 서명한 임명장이다. 그러나, 갑비목자는 그녀가 임명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 임명장은 왕표 그들이 위조한 필적이다. 이전에 왕표가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거기에 반드시 진호 두 글자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유를 알았다." 갑비목자의 말이다.

 

"그(진호)는 왕표의 괴뢰이다." 이 건을 얘기하자, 갑비목자는 아주 분노한다. "작년에 내가 평량에 갔을 때, 백의해와 진호가 모두 나에게 사죄했다. 진호는 무릎을 꿇고 나에게 잘못을 비렀다. 백의해는 회족이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성의있게 나에게 사죄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내가 일본에 돌아온 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공동파 장문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다."

 

기자인터뷰때, 왕표는 여전히 진호가 승계한 것이 합법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구룡옥새와 연사부의 판관필을 가지고 있다" 왕표의 말이다.

 

현재 공동파는 동경, 동관 및 평량에 각각 실체가 있고, 모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백의해는 진호의 옥새가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갑비목자는 백의해의 옥새도 위조되었다고 말한다.

 

진정한 옥새는 어디에 있는가? 혹은 원래 옥새는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