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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달마(達摩)는 소림사무술의 비조인가?

by 중은우시 2013. 8. 17.

작자: 미상

 

1980년대에 김용(金庸), 양우생(梁羽生)등을 대표로 하는 신파무협소설이 물밀듯이 중국대륙으로 밀려들어왔다. 거기에는 거의 모두 소림파(少林派)가 언급된다. 소림파는 무당파(武當派)와 함께, 승(僧), 도(道)의 무학정종이 된다. 이것은 민간에서, "천하의 무공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정종이 있으면 성지가 있다. 바로 하남 숭산의 소림사를 위주로 하고, 복건 남소림(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보조로 한다. 성지가 있으면 성인도 있다. 신파무협소설에서, 소림무술의 창시자는 달마라는 인도화상이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중국불교사상 이름있는 고승은 거의 모두 정사에서 고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달마는 예외이다. 그의 내력은 수수께끼이다. 소림사와 관계가 있는지 여부도 고증이 필요하다. 더더구나 소림무술의 비조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달마는 누구인가?

 

숭산 소림사에 가본 사람이라면 그곳에 있는 달마동(達摩洞)을 기억할 것이다. 달마가 당초 이 곳에서 수련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면벽시간이 아주 길어서, 지금까지도 달마의 모습이 벽에 비친다고 한다. 이 주장은 당엲 초현실주의적이다. 우리는 이를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만 보자.

 

달마(達摩)는 달마(達磨) 혹은 보리달마(菩提達摩)라고도 하는데, 중국불교선종에서는 그를 개산조사로 받든다. 그러나, 달마가 누구인가>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고 어디에서 언제 죽었는가 여기에는 견해가 각각 다르다.

 

원나라때의 승려 각안(覺岸)의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및 양나라때 석혜교(釋慧皎)의 <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남천축국 사람이다. <석씨계고략>에는 이렇게 명확히 적고 있다: "서천이십팔조, 동토의 초조 보리달마는 남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아들이고, 이름은 살제리(殺帝利)이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인이라는 것이다. 북위때 사람인 양현지(楊炫之)의 <낙양가람기>에 따르면, "당시 서역 사문 보리달마라는 사람은 페르시아국의 호인(胡人)이다. 황예(荒裔)로 중토로 왔다." 이상의 3가지 책은 모두 불교연구의 중요문헌이다. 다만 기록의 차이가 너무 크다. 남천축국은 현재의 인도에 해당하고, 페르시아는 현재의 이란에 해당한다. 달마는 도대체 인도인인가, 이란인인가?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달마는 언제 중국으로 왔는가? 이것도 답이 없는 문제이다. 현재 비교적 유행하는 것은 520년, 526년, 527년의 3가지 설이다. 그것은 각각 <석씨계고록>, <경덕전등록>, <불조통기>에서 왔다. 우리는 원래 그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다만, <경덕전등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달마)는 태화19년 병신년 십월 오일 단거이서(端居而逝)했다." 남북조시기에 "태화"라는 연호는 단지 북위 효문제 원굉 때이다. 태화19년은 495년이다. 이렇게 보면 모순이 나타난다.이미 495년에 사망한 사람이 어찌 다시 520년(혹은 526년, 527년)에 중국으로 올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달마는 언제 사망했는가? 이것도 확정하기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태화19년설이외에, 528년, 534년, 536년, 537년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것은 각각 <석씨계고록>, <속고승전>, <구당서>등에 나온다.

 

달마는 중국에 온 후 소림사로 갔는가? 이것도 수수께끼이다.

 

<구당서.방기전>에 따르면, "후위말기에 달마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원래 천축의 왕자였다. 호국을 위하여 출가하여, 남해로 가서 선종의 묘법을 얻었다. 스스로 석가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하였고, 의발을 표지로 삼았으며, 대대로 전해졌다. 달마는 의말을 가지고 바다를 항해하여 왔다. 요에 이르러 무제를 만난다. 무제는 유위(有爲)한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달마는 불쾌해하며 위로 가서, 숭산 소림사에 은거하고, 독을 맞아 죽었다. 그해에 위나라의 사신 송운은 파리므에서 그를 보았다. 문도들이 그의 묘를 만들었는데, 신발을 표지로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는 대체로 달마가 중국에 온 후의 활동노선을 알 수 있다; 달마는 중국에 온 이후 먼저 남조의 양나라로 간다. 그리고 양무제 소연과 한번 만난다. 소연은 경건한 불교도이다. 세번이나 자신의 몸을 사원에 바친다. 그리고 친히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하고, 친히 설법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대한 관점이 달마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얘기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후에 달마는 강을 건너 북상하여 북조의 위나라로 간다. 그리고 숭산 소림사에 은거한다.

 

<구당서>의 작자가 누구인가? 현재까지도 논쟁이 있다. 통상적인 견해는 오대시기 후진의 유구(劉昫)라는 것이다. 유구가 생활한 시기는 달마가 생활한 시대보다 4백년이나 뒤이다. 이전에 달마라는 사람은 <낙양가람기>, <고승전>, <속고승전>등에 언급되어 있다. 모두 달마가 소림사에 간 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구당서>의 기재는 의문이 든다.

 

<구당서>이후, 북송 진종 경덕연간(1004-1007)에 만들어진 <경덕전등록>에서는 다시 한번 달마가 "숭산소림사에 거처하다" "면벽구년" "거단이서(居端而逝)"등의 말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또 다른 곳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달마는 495년에 이미 사망했다. 소림사는 바로 다음 해 즉 태화20년(496년)에 완공되었다. 한 책에 이렇게 명백한 헛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서 언급한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9년했다는 일은 의심이 들 수밖에 ㅇ벗다.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달마와 소림사 및 소림무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본다.

 

달마가 소림사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소림사에 있는 많은 달마와 관련한 유적, 유물들 즉, 천불전의 달마정, 천왕전 서북의 '일위도강' 석상, 소실산 아래의 '달마암', 소실산 정상의 '달마동', '면벽석'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해석은 달마가 확실히 소림사가 건립되기 전에 소실산에서 수행한 바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구당서>등 책에서 뒤에 일어난 일을 앞에 있었던 사람에게 얹은 것이다. 달마가 '소림사에 거처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서에서 유방이 태어나자마자 '태조'라고 칭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천하의 쿵푸는 소림에서 나왔다. 소림무술은 그렇다면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는 명청이래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슈이다. 그중 달마 혹은 소림초조 발타(跋陀)가 창조했다는 두 가지 설이 널리 알려졌다.

 

달마가 확실히 소림사에 왔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소림무술과 어떤 연원이 있을까? 그래도 없다. 왜냐하면, <낙양가람기>, <고승전>, <속고승전> 및 <구당서>, <경덕전승록>등 사서에서 모두 달마가 소림무술과 관련있다는 언급은 없기 때문이다. 진정 달마와 소림무술을 함께 연결시킨 것은 <역근경>이라는 무학저작이다. 이 책은 두 편의 신화색채의 서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작자는 전해지기로 당나라초기의 명장 이정(李靖)과 남송의 명장 우고(牛皋)라는 것이다.이 두편의 서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달마가 면벽9년을 마치고 원적한 후 시신은 망혜를 끌고 '서천'으로 갔다고 한다. 즉 파미르고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가 면벽한 곳이 파손되어, 소림사의 승려가 새로 수리하면서 돌상자를 발견한다. 승려 혜가는 석상자에서 두 권의 책을 발견한다. 하나는 <세수경>이고 다른 하나는 <역근경>이다. 두 책은 모두 범문으로 쓰여 있었다. 혜가는 <세수경>을 가져가고, 다른 승려가 <역근경>을 가져간다. 승려들은 <역근경>을 일부분 번역해보고는 이것이 무학저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달마조사의 유물이므로 시키는대로 연마해본다. 나중에 반랄밀체(般剌密諦)라는 천축승이 <역근경>을 모조리 번역해낸다. 그리고 이를 수말당초의 풍진삼협중 규염객에게 전하고, 규염객은 다시 그의 의매부 이정에게 전해준다. 이정이 사망한 후 수백년이 지나서 이 책은 다시 신화처럼 한 노화상의 손에 들어간다. 노화상은 자칭 항금명장 악비의 스승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 기서를 우고에게 전한다. 노화상은 이 책을 왜 악비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전해지는 바로는 그는 일찌감치 악비가 "명성은 이룰 수 있지만, 뜻을 펼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확실히 악비가 간인 진회에게 모함당해 죽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다만, 우고는 마지막에 진회가 보낸 사람에게 독살당한다. 우고, 악비는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우고에게 전하고 악비에게 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것같다. 다시 말해서 규염객은 그저 전설고사의 인물이고,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서언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근대의 연구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무술을 소림사로 끌어들이고 크게 발전시킨 것은 소림사의 제2대주지 조선사(稠禪師)라고 본다. 조선사는 승조(僧稠)라고도 한다. 조적은 하북 창려이다.

 

조선사는 삼십삼세 혹은 그 후에 소림사로 온다. 시간은 개략 북위무제 연창연간(512년)이다. 문헌과 실물에 따르면, 조선사는 소년시기에 무승이 대거 활동하던 또 다른 불교사원인 업하사원(鄴下寺院)(유적지는 하남성 안양현 선응진 경내)에서 수행했다. 업하사원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문헌으로 고증이 가능한 사원이다. 이것은 즉 조선사가 "대예진사(帶藝進寺)"했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 소림사의 방장은 고승 발타였다. 그가 주지로 있을 때, 소림사의 문헌에서 무술과 관련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를 보면 조선사가 소림사 최초의 무승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사가 수림사주지를 물려받은 후, 소림사의 무술숭상기풍이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점차 발전한다. 특정한 사회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전교하고 풍부한 소림무공이 형성되었다. 고증에 따르면, 천하에 이름을 떨친 "소림사십삼곤승구당왕"의 이야기에 나오는 제일승인 소림사 주지 지조법사는 원래 업하 청운사(靑雲寺)의 유명한 무승이었다.

 

조선사가 세상을 떠난 후, 유골은 둘로 나뉘어, 각각 등봉 소림사와 안양 운문사로 나뉘어 보관한다. 이것도 조선사가 소림사에 들어오기 전에 안양사원과 깊은 연원을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소림무술의 원류는 하남성 안양시의 업하사원이고, 달마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