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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개석의 결의형제 대계도(戴季陶)는 왜 자살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6. 26.

글: 녕녕(寧寧)

 

1949년 2월 12일 새벽, 대계도는 홀로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창밖은 칠흑같은 어둠이었고, 한밤의 차가운 기운이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추위도 마음 속의 추위보다는 못했다. 평진, 회해전투에서 일패도지하여 이때 해방군은 이미 장강북쪽까지 내려왔다. 비록 자신의 몸은 광주에 있어 전투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광주성도 혼란상태였다. 진포뢰(陳布雷)가 떠난 슬픔이 조용히 밀려왔다. 아마도 이후주(李後主)의 슬픔이 가득한 <자야가(子夜歌)>만이 그의 이 순간 심정을 대변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수한하능면(人生愁恨何能免)

소혼독아정하한(銷魂獨我情何限)

고국몽중귀(故國夢重歸)

각래쌍루수(覺來雙淚垂)

고루수여상(高樓誰與上)

장기추청망(長記秋晴望)

왕사이성공(往事已成空)

환여일몽중(還如一夢中)

 

그는 손에 든 붓을 멈추었다 다시 쓰고, 다시 쓰다간 멈추었다. 마음 속의 서늘함이 갈수록 강해지며 돌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수면제를 가득 쏟아서, 눈물과 함께 삼킨다. 탁자위에는 만언유서를 남겼다. 아침 8시경, 이 손중산의 비서, 중산대학 교장,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중앙선전부부장, 국부위원, 특종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국민당의 이론가이자, 장개석의 결의형제이고, 장위국의 친생부친인 그는 진포뢰와 마찬가지로 "위당국진절(爲黨國盡節, 당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했다. 향년 58세이다.

 

대계도, 이 장개석의 "철간(鐵杆)"이며, "지낭(智囊)"인 그는 '미령호' 전용기를 타고 광주로 왔다. 비록 병을 앓아서 문밖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장개석은 친히 그의 대만행을 어레인지해주었다. 그는 왜 생명을 포기했는가. 정말 극도의 실망끝에 "위당국진절"한 것인가? 거기에는 남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있다.

 

1. 대계도의 자살컴플렉스

 

제1차자살

 

1902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던 대계도는 11살때 서형(徐炯)이 창립한 성도유일예비학교에 입학한다. 서형이 영향을 받아, 만주족에 반대하는 경향을 지닌다. 다음 해, 그는 객적학당 고등과에 합격한 후, 혈기방장하고, 사상이 급진적인 몇몇 동창들과 자주 기숙사에서 '시정와담회'를 개최한다. 13살이던 대계도는 학교의 방식에 불만을 품고 학교에 공개적으로 도전해서 제명된다. 그 결과 관청에서는 전체 성의 학교에 통지하여 대계도를 입학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는 공부하고 싶으나 방법이 없었다. 방황하고 있을 때, 일본인 소서삼칠(小西三七)의 도움을 받아 소서의 사숙에서 공부한다. 1906년, 소서의 지지와 도움으로, 대계도는 집안에서 논을 팔아 마련한 은량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운명은 기구했다. 대계도는 나이도 어리고 몸에 돈이 있을 것같은 모양이어서, 도중에 나쁜 자들에게 노림을 당한다. 중경에서 한구부두에 도착했을 대, 은량을 넣은 짐을 강탈당하게 된다. 그는 곡을 하며 울었고, 실망한 나머지 강에 몸을 던지려 한다. 다행히 같이 가던 동료가 붙잡아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 모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모아주었고,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제2차자살

 

1923년, 상해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대전현(戴傳賢, 대계도의 다른 이름)은 전쟁의 화가 계속되는 것에 통한의 마음을 품고, 분세질속(憤世嫉俗)하여, 한구에서 사천으로 가는 배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저 자살하려 하였으나, 어민이 구해주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손중산이 진형명의 반란으로 상해로 물러나 거주하고 있을 때, 심복인 대계도를 사천으로 보내어 천군과 연락하여 재기를 도모했다. 행해도중 천군의 내분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대계도는 스스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실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려한 것이다. 일시에 각 매체에서는 대계도의 행위를 칭찬하는 글이 나온다. 대계도는 세상에 분개하여 자살한 일로 일시에 명성을 떨친다.

 

손중산의 인정을 받아,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대계도는 정말 분세질속하여 자살하고자 한 것일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러해후 대계도의 처남인 조문전(趙文田)의 회고에 따르면, 대계도가 강에 몸을 던졌으나 구해진 후 그들은 같은 방에 있었다. 한밤중에 대계도는 조문전에게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한다. 조문전은 그제서야 대계도가 자살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누나인 조문숙(趙文淑)때문이었다.

 

대계도의 처인 뉴우항은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는 대계도가 혼자서 상해에 있는 것을 걱정하여, 그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외조카인 조문숙을 상해 어양리로 보내어 그를 돌보게 한다. 젊고 미모인 조문숙이 호색한 대계도의 곁에 있으니 이는 양을 호랑이 아가리에 던진 겻이다. 대계도는 플레이보이였다. 곁에 젊고 예쁜 조문숙이 오가는게 보이니 그가 어찌 참아넘기겠는가. 곧 조문숙과 '바람'이 난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을 때, 조문숙의 부모는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시집보낼 준비를 한다. 대계도는 사천으로 가기 전에 이 일을 알았다. 그러나 집안에 '하동사'인 무서운 마누라가 있다보니 감히 조문숙을 첩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는 사천으로 가는 길에 미인을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거기에 시국의 변화로 자신의 사명도 완수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나중에 그를 사랑하는 조문숙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고, 비서의 신분으로 대계도의 곁을 지켰다. 1942년 대계도의 본부인 뉴우항이 사망한 후에 비로소 후처로 들어간다.

 

2. 대계도와 일본간첩간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제국의 꽃'이라 불리우고, "일본제일간첩'이라 불리우는 남조운자(南造雲子)는 1930년대에 대계도와의 관계가 밀접했다.

 

'서안사변'때, 장개석과 형제같이 지내던 대계도는 장개석이 가장 믿는 신하였다. 그러나, 가장 신뢰하는 국책고문인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하응흠, 거정, 섭초창과 함께 장학량, 양호성을 토벌하자는 쪽에 선다. 대계도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장학량, 양호성의 반역은 당시,국법상 용납할 수 없다. 만일 토벌하지 않으면, 나라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무슨 당국의 대계를 논하겠는가?" 공상희는 대계도가 장개석의 안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비난하자,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와 위원장의 관계는 너희 송,공친족에 못지 않다. 너희는 위원장의 안위만 신경서서, 장학량, 양호성과의 타협도 마다하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위원장의 안위도 신경쓰지만, 더더욱 당국대업을 신경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무력으로 토벌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이기 어렵고, 위원장을 구할 수 없다고." 송미령이 "나는 남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부인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위원장의 안전이 당국대계에 관련된다는 것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구하는 것에 자신이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대계도가 화를 내며: "아녀자의 견해는 쥐새끼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좁다(婦人之見, 鼠目寸光)"고 말하고는 나가버린다. 

 

12월 25일, 장개석이 남경으로 생환한다. 얼마후, 송미령은 <서안사변회고록>을 발표하며 토벌파를 엄중히 책망한다. 대계도는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지만 공격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대립(戴笠)이 대계도와 남조운자의 왕래를 알아차린다. 대계도는 장개석과 관계가 특수하지만, 완곡하게 장개석에게 자신의 판단을 얘기한다: "이 여인이 대원장과 알고 지내는 것은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장개석이 대답한다: "이 여인이 다른 의도가 있더라도, 대원장이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점에서는 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앙에서는 결정을 내린다: "고위층회의에 잠정적으로 대계도는 참가통지를 하지 않는다. 대계도가 열람할 수 있는 중앙문건의 등급을 제한한다."

 

"서안사변"전에, 대계도는 남조운자와 밀접하게 내왕했다. 대계도가 "서안사변"때 보인 태도에서의 이상한 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조운자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대계도는 비록 남조운자와 관계를 끊었지만, 이 여인이 불러일으킨 '화'는 끝나지 않았다.

 

1937년 7월 28일, 행정원 기요비서 황준은 남조운자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한다. 대립은 남조운자의 체로를 명령한다. 남조운자가 감옥에 갇힌 후, 대계도는 하루종일 전전긍긍한다.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를 털어놓을까봐 걱정한 것이다. 다행히도, 남조운자는 일본군이 남경으로 진격할때 탈옥한다. 1942년 봄, 남조운자는 군통지하인원에게 암살당한다. 대계도의 근심거리가 드디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이 깊이 묻혀 있던 사건이 다시 드러난다. 1947년, 상해정기서국에서는 '구장(仇章)"이라는 이름으로 반첩다큐멘터리소설 <안녕, 자나간첩망>을 출판한다. 소설에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많은 내막을 들춰낸다. 책에서는 여러번 남조운자가 남경활동기간중, '색'으로 유혹하여 모 '당국원로'의 비호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비록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국원로'와 '대계도'를 동일시했다. 대계도의 조카는 이 책을 읽은 후, 숙부에게 물어보았다. 대계도는 크게 진노한다. 사람들 앞에서 조카의 빰을 두 번 때린다. 대계도의 충동은 더더욱 '이곳에는 삼백냥이 묻혀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또 다른 조문전이 1970년대에 해외에서 쓴 회고록에 따르면: "1948년 7월, 대계도는 서신을 하나 받는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구장밀우(仇章密友)"라고 했다. 거기에는 대계도가 옛날 남조운자와 결탁하여 국가이익을 해친 자료가 들어 있었다. 대계도에게 20개의 금조(金條)를 내놓으면 자료를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대계도는 먼저 엄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금방 그는 금조를 주고 자료를 돌려받고는 불에 태워버린다. 그이후 그는 항상 걱정을 많이 했다. 나중에 누군가 그의 약점을 잡고 공갈협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들 자료가 사회에 공개되면, 신경이 쇠약한 그는 더더욱 정신이 붕괴될 것이다..."

 

1948년 4월, 장개석이 총통에 당선된 후, 대계도는 고시원장직을 사직한다. 그리고 국사관 관장에 취임한다. 그후 대계도는 신경통이 발적하여 약을 먹고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그의 일과의 전부가 된다. 그는 비서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은 날로 나빠지고, 병약한 몸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른다." 비록 병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국사와 시국을 항상 주목했다. 매번 누군가 방문하면, 항상 상세히 묻곤 했다. 그리고 상시지감(傷時之感)을 털어놓곤 했다. 9월, 대계도의 후처인 조문숙이 돌연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다. 이것은 대계도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리고 그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다.

 

1948년 12월말, 대계도는 광주로 간 후, 비록 예우는 받았지만, 그와 부인이 모두 환자였다. 시국을 보면서 쓸쓸함과 무력함을 느꼈다. 더욱 그를 탄식하게 한 것은 국군이 서남을 지키지 못하여 그의 고향인 사천이 공산당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장개석이 이미 대계도를 대만으로 보낼 준비를 마쳤지만, 대계도는 대만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한다. 장위국(대계도와 일본여자 중송금자의 사이에 난 아들)이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대계도의 죽음은 "위당국진절", "심병(心病)", "신병(身病)"의 3가지가 합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